노트르담 드 파리 감상, 대성당의 그늘 아래에서
노트르담 드 파리 프렌치 오리지널 내한공연
계명아트센터, 2014/12/18 ~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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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R석으로 무대의 왼쪽이었다. 유난히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달리 불편하다고 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자막을 보는 것에 신경이 쓰였지만 곧 익숙해졌고,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원작을 접해보지는 못했으나, 작품의 서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작품은 그랭구와르의 ‘대성당들의 시대’로 시작된다. 이 웅장한 가곡의 이면에는 ‘거리의 방랑자들’이 존재하며 작품은 이러한 외면과 내면의 대비를 계속 이어나간다. 떠돌이 중 가장 아름다운 에스메랄다, 그런 에스메랄다를 사랑하는 페뷔스, 프롤로, 콰지모도. 하지만 페뷔스는 근엄한 근위대장이며, 프롤로는 엄격한 성직자다. 겉보기에 완성된 그들은 에스메랄다를 얻는데 있어 삐뚤어지고 올곧은 것이 되지 못한다. 페뷔스는 이미 약속된 사랑이 있고, 프롤로는 성직자이므로 여인과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가지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감정은 마냥 순수하다고 할 수 없다. 페뷔스의 사랑은 (뒤늦게 후회하듯) 일종의 하룻밤 불장난이고, 프롤로의 사랑은 (스스로가 자괴감을 가지는 것처럼) 성직을 바탕에 둠으로 색욕으로 해석된다. 그에 반해 가장 정상적이지 않은, ‘광인들의 왕’인 콰지모도는 가장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집을 내어줄 수 있는 이면서, 다른 두 사람의 에스메랄다와의 관계에서 파국을 맞이할 때, 그녀를 끝(죽음)까지 따라갈 수 있는 이였다. 작품은 이런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 찬가를 조명해내고 있다. 하지만 작품은 15세기라는 르네상스를 앞에 두고 있는 시대적 배경으로 두고 있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어쩌면 네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다면적인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대성당들의 시대’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중세시대를 이르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시기에 대한 암시를 보여주는데, 이 새로운 시기는 르네상스를 의미한다. 또한 원작이 쓰여진 19세기 초반은 유럽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로 이 또한 시대와 시대가 맞붙는 때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초연이 있던 19세기 후반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 열강들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것은 ‘노트르담 드 파리(또는 노틀담의 꼽추)‘라는 작품이 15세기의 파리로부터 각 시대의 작가들에게 시대와 시대가 마주하는 장소를 관객들(또는 독자들)에게 거울처럼 비추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거울상은 현대에게까지 비추어져 들어온다. 13만원의 R석, 무대 왼쪽으로.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상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조되는 둘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페뷔스라는 인물상은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사랑을, 프롤로는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의 패러다임)과 사랑을, 과지모도는 자기 자신과 사랑을 저울질하게 된다. 어느 한쪽을 얻기 위해서 어느 한쪽을 버려야하며, 결국 에스메랄다로 대표되는 진실로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콰지모도였음이 그 끝에서 드러난다. 비록 에스메랄다도, 콰지모도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나 그 죽음은 끝이라기 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씨앗에 가깝다. 추한 꼽추의 순수한 사랑이 세계를 떠도는 집시의 입에서 영원히 떠돌 것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자신이 바로 그 새로운 시대 앞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