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빌슈트 건담 디 오리진 감상
<오리진>에서 제일 특이한 눈에 띄는 캐릭터라고하면 라라아 슨이다. 라라아가 등장하면서 작품 저변에 깔려있던 뉴타입론이 실제적으로 부상한다. 건담은 여러 정치적인 배경을 레퍼런스로 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인데 라라아가 등장하면서 뉴타입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를 교감하고 사이코뮤와 같이 뉴타입만이 조종할 수 있는 시스템도 등장하며 작품의 최후반부에서는 이런 뉴타입 능력을 통해 구원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라라아는 작품 안에서 샤아와 관계된다. 샤아의 “라라아는 나의 어머니가 되어 줄 여자였다"라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 샤아는 라라아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라라아가 샤아에게 끼친 영향력에서도 볼 수 있는데, 본래 복수귀 캐릭터로서 아버지를 죽인 자비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작전을 거듭하지만, 라라아와의 만남 이후 여러 성격적 면모가 변하다가 이윽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냈던 뉴타입론에 감화되어 버린다.
사실 작가가 작품으로서 그렇게 그렸다고하면 그냥 읽는 수밖에 없고, 뉴타입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것을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주의적 작품에서 괜한 소재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군다나 라라아의 등장 이후 샤아만이 아니라 아무로마저도 마치 홀린 것처럼 이 인물에게 매료되는 등 전쟁 활극으로서의 장르가 흔들리게 된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며 오히려 라라아가 죽고난 뒤 유령으로서 존재하게 되자 더 또렷한 주제가 보였다. 라라아를 만나기 전까지의 아무로는 뛰어난 파일럿이라는 이유로 전쟁에 내몰린 소년병이었고, 아무도 아무로의 고립감과 고독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은 게 전부인 라라아가 그 모든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때문에 라라아라는 존재의 우연성은 반개연적이라기보다는 기적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문제적인 것은 작중에서 이야기되듯이 라라아가 아무로만이 아니라 샤아와도 매개로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고, 아무로와 샤아가 서로 반목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에 있다는 점이었다. 샤아 또한 가면 아래 항상 얼굴을 숨기며 이름마저 바꾸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실상 유일하게 이해하는 인물인 라라아에 대해 애틋하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런 두 사람의 싸움은 건담과 지옹의 결전에서 드러난다. 최후의 싸움에서 건담은 머리를 잃고, 지옹은 몸을 잃은 상태에서 맞서는데 이러한 모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책략을 써가며 머리로 싸워온 샤아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더는 잃고 싶지 않고자 마음으로 싸우는 아무로를 상징한다. 두 사람의 싸움은 장르 작법적으로 흥미롭다.
샤아는 복수를 향해 나아가야할 시점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복수의 대상 중 하나였다가 친구인 가르마 자비를 죽인 것이 그 이유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 작품은 작중 인물의 직접 독백이 거의 없고 그나마 주어진다면 아무로에게 주어지며, 샤아는 실상 두 번째 주인공이나 다름 없음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행동만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샤아의 방황의 결과가 뉴타입론과 라라아인 것이다.
<오리진>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적이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작품의 방향이 도달할 곳은 허무주의 뿐이다. 복수는 언제나 업보가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샤아는 아무로와 대적하기 보다는 가르마를 처리했던 것처럼 아무로를 이용했어도 된다. 오히려 이런 부분이 문제일 수 있다. 샤아는 너무 유능하고, 아무로를 이용하자면 샤아의 복수는 너무 쉬워진다. 실제로 <오리진>은 샤아가 적극적으로 복수를 획책하지 않고 많이 길을 헤매었음에도 샤아의 복수가 완성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작품은 더 빨리 끝났을 것이다. 샤아의 방황은 작법적으로 필요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물로 회귀시키는 존재가 있다. 그게 바로 아무로다. 아무로는 샤아의 뉴타입 부대를 처리하고 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하고 라라아를 죽이는 것으로 샤아의 방황을 끝맺게 만든다. 원래 있던 장르로, 복수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작품은 복수물로, 사실주의적 스페이스 오페라 활극으로 돌아간다. 작품은 이렇게 나아가야만 했다.
사실 샤아는 잃은 것이 많지 않다. 복수를 결정한 순간부터 보다 작은 행복에서 만족할 수 있었던 기회를 걷어찼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샤아의 동생인 아르테시아다. 아르테시아는 새로이 얻은 것을 또 잃으면서 고통을 느낄 정도로 행복을 느꼈었다. 반면 샤아는 애초부터 얻을 생각이 없었으니 상실감도 없다. 반면 아무로는 자신의 어두운 골방에 갇힌듯 지내왔으나, 사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화이트 베이스의 여러 승무원 동료들을 비롯해 유일한 이해자였던 라라아까지 잃었다. 아무로의 우울감은 작품 안에서 여러번 드러난다. 전쟁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아무로에게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음 해야할 의무도, 의지도 있었다.
작중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인 아 바오아 쿠는 인도 신화에서 열반에 이를 수도자를 탐색하는 괴물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 장소에 들어온 이들을 수도자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처음에 아무로와 샤아 두 사람을 수도사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숫자는 맞았지만 인물이 틀렸다. 샤아는 맞다. 샤아는 구도자였지만 열반에 이를 인물은 아니었다. 때문에 뉴타입이라는 이상에서 좌절하고 인간의 일, 복수로 눈을 돌려 수행하게 된다.
두 번째 수도자는 아무로가 아닌 샤아의 동생 아르테시아다. 아르테시아는 아무로와 샤아의 싸움에 끼어들어, 두 사람의 싸움을 막는다. 아르테시아는 언제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함선에 오르기 전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숨기고 샤아와 무관한 삶을 살수도 있었고, 함선에서 승무원인 세일러 마스로 계속 지낼수도, 람바 랄과 함께 함선을 떠날수도, 아 바오아 쿠에 이르러선 지지를 받아 새로운 지온의 수장에 오를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진정한 위치가 어디인지 끊임없이 찾아다닌 끝에 두 사람 사이에 서게 된 것이다.
아르테시아는 작품 내내 독자는 물론 작중 인물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로 함선 내 포지션이 바뀌고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역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이 오히려 가장 중요한 때에, 아무로와 샤아가 각자 스스로의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도록 서로를 막아서는 역할로 나선다. 두 인물 모두에게 지켜야할 동료이자 하나 뿐인 가족으로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인 아르테시아만이 맡을 수 있는 역이기도 했다. 덕분에 두 인물의 서사가 한쪽의 파국이 아닌, 분리를 맞아 이야기가 뻗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아르테시아는 샤아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정리하고 헤매지 않고 정착하게 된다.
그런 아르테시아를 구원한 것, 수도자를 열반에 이르게 만든 것이 아무로다. 아 바오아 쿠는 열반에 이를 수도자를 찾으면 빛을 내는데, 아르테시아가 쓰러져 있을 때 아무로가 뉴타입의 힘으로 탈출구를 알려준다. 아르테시아가 어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빛나는 탈출구가 아 바오아 쿠의 빛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