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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된 헐리웃 장르로서의 백룸: 백룸(2026) 리뷰

“의자를 만드는 것이 마천루를 짓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처럼, 의자는 인간의 무게를 버티고 서 있어야 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건축물로, 신소재와 재료 공학을 시험할 수 있는 시험장이자 공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접점으로 건축가의 신념과 도전이 반영되는 오브제다. 가구가 곧 건축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백룸은 무척 친절한 영화다.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클락은 건축가를 희망했으나 지역 가구 판매점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실패와 좌절을 암시하고 있다. 원형이 아니라, 원형의 열화된 기성품을 내다 팔 뿐이다.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사장’이 실패와 좌절을 겪고 있다는 건 이상하게 보인다. 자본이 곧 힘이 되는 곳에서 미국 교외의 가구점 사장은 영주는 아니라도 기사 정도는 되어보인다. 봉토도 있고 종사도 있다. 물론 모든 기사는 나름의 어려움에 처해있긴 할 것이다. 그의 사업장은 경쟁 업체로 인해 ‘단 한 명의 손님도 보이지 않’고, 알코올 중독자이며, 아내와는 결별하여 자신의 사업장을 집 삼아 생활하고 있으며, 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심리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의도된 바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불안, 강박, 중독. 클락의 문제는 가졌기 때문에 가지는 문제, 자본의 풍요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다. 이미 가졌기 때문에 잃어버릴 일 밖에 남지 않았으며, 지위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고통받고, 불안과 강박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기에 그 고통을 마취시키려면 중독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는 또 다른 주인공이자 클락의 주치의인 메리에게 전가되지만, 해결되지 않는다. 클락은 기사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것인지, 또는 유지하지 못할 것인지의 문턱(Liminal Space)에서 백룸을 발견한다.

백룸의 원형은 위스콘신주 오시코시의 가구점으로 알려져있다. 폐점을 하면서 가구가 모두 빠져 있는 공간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어딘가 으스스한 감각(Eerie)을 느꼈고 그로부터 촉발된 상상력이 백룸 크리피파스타 만들어냈으며 그 과정에서 케인 픽셀즈라는 영상 제작자가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여 업로드를 하기에 이른다. 알려진 바와 같이 원작자인 케인 픽셀즈가 케인 파슨스라는 이름으로 감독 데뷔로 영화 백룸을 만든다. 으스스함이 백룸의 기원이자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의 톤인 셈이다. 마크 피셔의 말에 따르면 으스스함이란 ‘없어야 하는데 있는 것’ 또는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백룸에서 자주 보여진다. 클락이 백룸에 처음 발견하게 되는 마치 뭉쳐진듯 모여있는 가구 오브제들, 아무런 맥락 없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통로들,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보이지 않는 인적까지. 으스스함은 그 자체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인과의 부재를 탐구자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할 때의 초월적 시선을 경험하게끔 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데리다는 ‘유령’이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실체가 잃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계속해서 영향을 줄거라고 했다. 그 자의 폐해가 드러날 때마다 공산주의로부터 승리한 자본주의는 더 나은 선택임을 변호하게 된다. 마크 피셔는 이 유령론을 과거로부터 사라진 것만이 아니라 오지 않는 미래로 확장했다. 공산주의의 유령만이 아니라 낙관을 약속한 자본주의 그 자신의 유령이 현재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재생산하는 매체는 레트로로 돌아간다. 오래된 노란 벽지에 브라운관 TV, 촌스러운 CM을 낀 지역 광고, 낡은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듯한 노이즈 낀 화면까지. 케인 픽셀즈의 초기 백룸 영상의 레트로 컨셉은 기술 한계를 가리기 위한 시도였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유튜브 유저의 요구에 맞아떨어졌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실패를 감지하고 있고, 과거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낀다. 백룸은 공간-유령이다.

백룸의 많은 오브제들이 맞붙어 있거나 겹쳐져 있듯, 백룸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겹쳐져 있다. 자본주의의 문턱에 올라선 클락은 유령-공간을 헤매며 실제 오시코시의 가구점과 유튜브에서 시작된 케인 픽셀즈의 첫 번째 백룸 영상―, 그리고 영화 백룸을 헤매인다. 영화에서 클락이 백룸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백룸엔 명백한 위험이 암시되고 백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보인다. 클락은 백룸 안에서 위협적인 무언가로부터 쫓기면서 도망쳤고, 처음으로 집은 나무 의자는 서로의 등받이가 좌판에 붙어 기능하지 않는 의자였다. 처음 들어간 것은 사고였지만 두 번째는 그렇지 않다. 이는 클락을 통해서 설명되는 게 아니라, 클락과 함께 초점이 이동되는 관객이 바로 백룸에서 헤메이고 싶어하며 으스스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친구가 전달한 링크로 보는 9분 가량의 무료 유튜브 영상 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된다. 하지만 15000원을 주고 1시간 50분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선 영화 백룸에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그렇다. 그래서 영화 백룸은 원작 영상과 다르게 으스스함도 아름다움도 부분적으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백룸은 완전히 불가해한 공간이 아닌 명백한 출입구를 통하고, 백룸의 오브제들과 백룸의 엔티티는 보다 선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근거는 다름 아닌 주인공 클락의 내면이다. 이 영화의 부분적인 줄거리는 마치 감독이 나레이션을 해주듯 선명하다. “실패를 겪고 자신의 심상세계 안에 갇힌 클락을 구하기 위해 ‘정신과의사’인 메리가 그 세계 안으로 뛰어든다.” 조금 더 써볼 수 있을듯 하다. “클락의 자아는 메리로부터 자신을 긍정하게 되지만 클락의 또 다른 자아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심리 치료의 실패 사례를 은유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 백룸은 클락과 메리의 배경과 캐릭터를 만드는데 영화의 1장, 그리고 3장의 절반 가량을 투자한다. 이는 원작 백룸에서 기대되는 성질이 아니다. 이는 헐리웃 영화에서 기대되는 성질이다. 그리고 영화 백룸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백룸은 영화 백룸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개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개를 설명하고 따라 그린 것 같은 결과물’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는 이데아의 그림자로 대표되는 원본과 열화 복제(‘흐릿한 JPEG’)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그리고 원작 백룸을 본 이들에게 영화 백룸은 단연 그림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원작자가 곧 감독이라는 건 의미가 없다. 매체가 다르면, 플랫폼이 다르면, 길이가 다르면, 들이는 돈이 다르면, 투자자의 유무로부터, 시간이 흐르면 달라진다. 그럼 영화 백룸은 원작 백룸의 열화된 복제품인가?

그렇다고해도 상관없다. 백룸이 바로 현실의 열화된 복제판이므로, 영화 백룸 안에서 다루어지는 백룸이 곧 영화 백룸의 성질을 반영한다 할 수 있다. 즉 백룸=영화 백룸이다. 영화 백룸은 이해할 수 없는 소품의 배치와 객관적 상관물, 시퀀스, 몽타주가 삽입되어 있고 암호풀이와 같은 접근을 요구한다. 이는 으스스함의 근원으로 파고들고, 유령-공간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백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한 그것을 연구할 방도는 없다.

케인 파슨스는 영화 백룸이 흥행하는 경우 개인적으로 아홉 편의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한 편, 케인 픽셀즈와 별개로 성장한 백룸 위키는 수 천개의 레벨이 있다. 또 한 편, 원작 텍스트의 저자는 아직도 누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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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보고 당일 쓴 글. 진짜 이런 의견이라기 보다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다 뱉어보는 러프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감독 인터뷰보니 그럭저럭 의도를 설명하는 글이 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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