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감상3, 우리는 뉴폴리네시안을 꿈꾸는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인류 멸망은 식량 위기로부터 찾아온다. 이것은 SF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잘만들어진 SF란 현실적인 가능성에 근거해서 만들어진다. 『인터스텔라』의 시나리오 작가인 조너선 놀란은 과학자 자문단으로부터 여섯 시간 동안 인류를 멸망시킬 가능성들에 대해 듣고 난 다음,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된 병충해에 의한 식량 위기를 영화 속 인류의 멸망 조건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실 ‘식량 위기’라는 말은 그리 낯설지 않다. 우리가 이미 식량 위기에 봉착해있으며, 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익숙하다. 『인터스텔라』에서의 식량 위기와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고 있는 식량 위기는 다른 문제이나, 둘 모두 임박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전자의 경우 환경·생태적 위기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기후 변화에 따른 수확량 저하의 문제다. 실제로 지금 캘리포니아는 1200년 이래 가작 극심한 가뭄을 몇 년째 겪고 있고 미국의 곡물 수확량에 영향을 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전적인 문제다. 우리는 대량 생산을 위해 곡물의 유전적 형질을 변형시키게 되는데, 이런 변형은 병충해에 대해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 생물종의 다양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얼마전 떠들썩 했던 바나나의 멸종 위기는 이러한 문제를 실감시키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 세대가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식량 위기는 정치·경제적 위기다. 우리가 전인류가 먹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기아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식량 불균형의 문제가 범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급자족의 경제를 넘어선 이후 식량은 자원화되어 경제적이거나 정치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29일째 날의 이스터 섬』에서 1400년경 나타나는 식량 문제는 어느 쪽이든 야기될 수 있는 식량 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위기는 현대에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사실 하나의 문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에 정착한 폴리네시안들은 1400년에 들어 갑작스럽게 인구수가 늘어난다. 늘어나는 인구수를 충당하기 위해 돌뿌리덮개농법과 같은 경작 방법이 탄생한다. 문제는 모아이였다. 하나의 모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넓은 땅을 필요로 했고, 그 땅에는 돌뿌리덮개농법을 할 수 있는 농지도 포함되었다. 그 시작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넓은 농지를 유지하는 것 보다 모아이를 만드는 일이 우선시 되면서 1500년을 기점으로 이스터 섬의 인구가 줄어들게 된다.
둘 중 하나를 포기했어야만 하는, 모아이와 돌뿌리덮개농법의 대비는 사실 그 둘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으리란 생각을 들게 한다. 어떠한 요인에 의해 인구수가 증가된다면 첫번째 문제는 ‘식량’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돌뿌리덮개농법과 같은 경작은 타당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경작 방법이 보여주는 것처럼 고되고 순탄치 않다. 다른 대안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다. 이스터 섬의 정치구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힘들지는 몰라도 커다란 성취감을 주고 고양감을 들게 할 수 있는 모아이 설치에 매진한다. 그리고 더 배가 고파질수록 더 커다란 모아이를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한계를 맞이한다. 모아이 설치는 중단되었고, 섬의 주민들은 불우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스터 섬의 역사를 현재에 우리에게 대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스터 섬 사람들이 배가 고팠던 것처럼 식량 위기를 겪고 있으며, 돌부리덮개농법 같은 그것을 지연시키거나 극복할 방법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돌뿌리덮개농법을 무시하고 모아이를 건설하듯, 환경·생태적 위기를 무시하면서 정치·경제적인 부분에 얽메여있다. 여기서 환경·생태적 위기가 객관적 관념론에 입각해서 일어난 것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문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구에서 나타난 이성에 대한 긍정은 자연에 대한 지배를 부추겼고, 급기야 종교 민족 경제로 이어지는 구조틀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구조틀은 이성을 통해서라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었는데, 문제는 이 믿음이 과연 이스터 섬의 모아이에 대한 믿음과 크게 다를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에 대한 긍정은 서구의 대중문화 매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은 최근 개봉되어 화제를 모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와 같은 작품이다.
『인터스텔라』는 비록 최신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SF 영화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상대성 이론과 블랙홀과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인 쿠퍼가 자동차를 타고 집을 떠나오는 장면에 우주선 발사 카운트가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이런 교차 편집은 쿠퍼가 자신의 집 뿐만 아니라, 지구라고 불리는 우리의 가장 큰 집(oikos)을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병충해에 의한 식량 위기처럼 『인터스텔라』는 생태학(ecology)에 대한 텍스트로 읽힐 여지가 있는 것이다. 주인공 일행이 모험 끝에 과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내는 것은 서구의 객관적 관념론, 또는 미국식 개척 정신이 짙게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터스텔라』의 위기 해결은 ‘미래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미리 실제하는 미래는 그 과거들을 모두 ‘역사’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공간은 사건의 지평선 내부다. 따라서 『인터스텔라』는 낙관적 역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내버린 셈이 된다. 이것은 마치 이스터 섬 사람들이 모아이를 섬 내부를 바라보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 모아이는 종교에 근거하므로 그 해결을 내부에서 일어날 기적을 기대하고 있다. 그에 반해 현재의 우리는 과학에 근거하므로 그 해결을 외부에 있을 자원에 기대하고 있다. 방법론에 있어 둘은 전혀 다르지 않은 셈이다.
『29일째 날의 이스터 섬』에서 이른 것처럼, 우리는 29일째 날의 이스터 섬에 와있다. 30일이 되던 날 이스터 섬은 몰락에 치달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뉴폴리네시안이 될 것인가? 쿠퍼가 되어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날 것인가? 얼마전 발매한 게임 『비욘드 어스』와 같은 SF 게임은 그런 뉴폴리네시안을 주인공으로 삼은 게임이다.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해 지구인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행성을 개척하고, 자원을 모두 소모한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제 2의 지구를 버리고 다시 제 3의 지구를 찾아 떠나야하는가?
이런 물음은 이와 같은 방법론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이 없는 무한한 소비는 이성적이라기 보다 근시안적인 야만성을 보여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의 집은 이미 삐걱거리고 있으며 우리가 대비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반성할 여유가 남아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 복원된 모아이 하나가 섬 안쪽이 아닌 섬 밖으로 향하게 두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우리도 미지의 저편이 아닌, 바로 우리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