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머리주의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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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 정신, 자아와 같은 비물질과 물질인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일원론에 따르면 인간에겐 영혼이 없고, 인간이 가진 것은 오로지 몸뿐이다. 이원론이 지칭하는 영혼, 정신, 자아를 가리키는 ‘나’라는 존재는 뇌의 뉴런간의 상호관계에서 발생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통속의 뇌’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통속의 뇌라는 것은 ‘우아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 시는 철학이나 과학을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잘린 머리’가 된다. 하지만 잘린 머리의 등장은 불가결하게 ‘잘린 몸뚱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일원론자가 잘린 머리(=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야기되지 않는 잘린 몸뚱이(=나이면서 잘린 머리가 아닌 것)가 남기 때문이다. 이원론의 관점에서 영혼을 대입시키면 이러한 분할이 이해될 수 있지만, 일원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시에서 등장하는 모든 잘린 머리와 잘린 몸뚱이가 벌이는 싸움은 나와 세계, 남자와 여자, 일원론자와 이원론자, 현재와 과거, 서울과 런던 사이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고통스럽다. 「신화」 연작은 이러한 갈등의 원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신화 1」에서 존재론적 자각은 ‘공포’와 ‘비명’을 일으키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참수’하게 된다. 「신화 2」는 이 참수를 통해 벌어지는 갈등을, 「신화 3」은 이러한 갈등의 종말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등의 끝은 바로 머리와 몸의 합일(또한 신화의 시작과 끝의 합일)이며, 시에서 등장하는 잘린 머리와 잘린 몸뚱이들은 이 합일을 향해 나아간다. 이 ‘신화’라는 원형을 빌린 잘린 머리 내러티브는 역사와 문학사를 관통하며 총체성을 아우르려고 든다. 로베스피에르와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는 ‘도끼’를 등에 진 시인은 「떠가는 배」 연작을 통해 플라톤의 『대화』, 「공무도하가」와 같은 다른 컨텍스트들을 아우른다. 컨텍스트들은 제 모습을 간직한 ‘번역시’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 컨텍스트들이 단순히 시의 풍성함만을 의도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번역시는 필연적으로 원문의 번역을 파괴시킬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일, 즉 나를 잘린 머리와 잘린 몸뚱이로 나누는 도끼와 같은 형상인 것이다. 「떠가는 배」는 이러한 훼손된 자신이 도달한 장소인 ‘잘린 몸뚱이 위의 잘린 머리’임을 자각해내는 연속으로, 끊어진 목을 쉴 새 없이 매만지는 불편함이기도 하다. 이런 깨달음은 시인이 시선을 던지는 모든 방향으로 발산된다. 모든 존재는 끊어지고 단절되어 있으며 시인의 시 조차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끝을 노래하는 것으로, 잘린 머리와 잘린 몸뚱이가 만들어내는 역설을 형식으로서 구사한다. 하지만 절단을 발견하는 ‘잘린머리주의자’인 시인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동강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잘린머리주의자의 시선으로 주지시킨다. 잘린 머리에 대한 찬가는 처형 그 자체이자 처형에 대한 불복인 것이다.”
작년 말에 jhaloff 님이 김수영 문학상 본심에 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시좀 볼 수 있으려나, 얼쩡거리다 좋다고 허락은 떨어졌는데, 대신에 감상을 달라기에 질질 끌다 졸문을 쓰게 되었다. 그게 1월 3일. 그러다 오늘 jhaloff 님이 시를 공개하시기에 감상문도 덧붙여 올린다. 단 감상문은 50개 시 전편에 대한 단상인데, 공개된 것은 시 열 편이니 아귀가 좀 안 맞는다. 블로그 글이고 정리된 것도 아니고 하니 그냥 올린다. 그래도 「떠가는 배」는 50편 시 중 주요한 연작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회가 다시 오니 덧붙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문단 밖에서도 이렇게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는걸 누군가 알아주면 좋겠다. 내 졸문이나마 그런 관심을 jhaloff의 시로 이끌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