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소설 독서 결산
변함없는 저조한 독서량으로 본인 게으름을 탓하게 되는 우울한 한해였습니다. 본래 결산글은 31일날 올릴 예정이었으나, 정작 그날이 오면 귀찮아서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오랜 경험과 자학적 직관때문에 서둘러 글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정도의 소소한 차이를 걸고 넘어지는 사람도 없을테고. 과연 누가 이 글을 보기나할지요.
결산 방법에 있어 올 한 해 읽은 책을 모두 나열하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기실 좋은 방법은 아닌듯 싶었습니다. 나 이만큼 책읽었지롱 하는 자랑에 지나지않을거란 생각이 드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것이 본인과 여러분에게 있어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꼭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서도. 결산이란 것이 그저 올 한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기회를 삼고저 하는 일이라면, 큰 맥락으로 묶어 단순하게 정리하는 방법도 있을 것 입니다.
서두가 쓰잘데 없이 길었네요. 만약 여기 세번째 문단부터 글을 읽고 계신분이 계시담, 위에 두 문단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헛소립니다.
판타지
1. 마고 래너건의 ‘블랙주스’
2. 류세린의 ‘엔딩 이후의 세계’
3. 니시오 이신의 이야기 시리즈
etc. 코, 원고지 위의 마왕, 전나무와 매
‘블랙주스’는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단편집입니다. 이미지가 강해 두리뭉실할 것 같은 환상성이 시신경 안쪽으로 틀어박히죠. ‘엔딩 이후의 세계’와 이야기 시리즈는 순항중이라는 말 말고는 따로 할 말이 없군요. ‘코’는 일본 호러 소설로 좋은 단편 세 작품이 들어 있습니다. ‘원고지 위의 마왕’은 다소 거친 모양새로 완결을 냈고, ‘전나무와 매’는 게임 ‘아키에이지’와 후속작인 ‘상속자들’의 프롤로그입니다.
SF
1. 데이비드 브린 등 ‘하드SF르네상스’
2. 이언 뱅크스의 ‘비지니스’
3.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
etc. 제저벨, 신의 궤도, 은닉
‘하드SF르네상스’의 각각의 단편을 하나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모두가 주옥같고, 특히 더 반짝이는 작품들이 있을 뿐이라서. 단편선집이라는 계획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읽은 단편집이었던 거 같습니다. ‘비지니스’는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황폐함이 아닌, 순수한 자본주의 그 자체와 인간의 갈등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 지나치게 뭉뚱거리는 느낌이군요. ‘야생종’은 죽지않는 두 존재에 인간의 두 성을 은유합니다. ‘제저벨’은 링커 우주를 잇는 듀나의 신작이고, 무척 듀나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의 궤도’와 ‘은닉’은 배명훈의 작품입니다.
추리
1. 이언 뱅크스의 ‘공범’
2. 우타노 쇼고의 ‘밀실살인게임’
3.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
3. 마야 유타카의 ‘애꾸눈 소녀’
etc. 점성술 살인 사건, 조화의 꿀, 완전 연애, 변호측 증인
본인은 ‘공범’에서 그려지는 정치적 함의를 많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이해하고 느끼는데엔 큰 지장을 주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밀실살인게임’은 마니악스를 통해 이전에 아직 건드리지 못했던 트릭의 궁극까지 나아갑니다. 이쯤되면 책이 세 권이나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죠. ‘부러진 용골’은 판타지를 추리 그 자체로 접목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애꾸눈 소녀’는 메타추리라고 봐도 되겠군요. ‘점성술 살인 사건’과 ‘조화의 꿀’, ‘완전 연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엄청나고 뛰어난 트릭을 구사하며 그 치밀함에 구멍이 없다는 점이죠. ‘변호측 증인’의 변칙은 시대를 고려하지 않은 지금에 와서도 놀라게 됩니다.
etc
1. 김훈의 ‘남한산성’
2. 레이몬드 카버의 ‘대성당’
3. 김훈의 ‘흑산’
etc. 라쇼몽, 숨덕부, 오더 메이드 살인 클럽
이건 귀찮으니까 넘어가죠. 모두 좋은 작품들입니다.
결과적으로 추리 소설에 다소 치중해 읽은 한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국내에 출간되는 일본추리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고, 작품의 질 또한 무시무시합니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더 많이 손이 갔던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판타지는 그 수가 적습니다. 솔직히 좋은 판타지 소설을 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죠. 어째서인지 이제 좋은 판타지란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물론 수 천 마리 나쁜 판타지를 본다고 해서 한 마리 좋은 판타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흰까마귀를, 통계학을, 테크노라시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작가를 믿기엔 올 한해는 너무 성적이 저조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