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의 완성
남자가 빈 악보를 펼치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남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떠올린 첫번째 음표를 악보에 그렸다. 그러자 완전히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의 첫번째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남자가 두번째 음표를 그리자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 한 줄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가 세번째 음표를 그리자 그 바람의 남자의 목덜미를 스쳤다. 남자는 머릿속의 음을 기호로 남기는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은 남자가 빈 악보의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만큼만 멈췄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날 남자는 악보를 쓰던 도중 창밖을 내다보고 말았다. 눈들은 하늘에 붙박혀서 그대로 있었고, 깜짝 놀란 남자는 악보를 내팽개치고 문 밖으로 나섰다. 눈송이들은 남자의 몸에 닿고 나서야 천천히 녹아내렸다. 남자는 흠뻑 젖으며 거리를 돌아다닌 다음에야 시간이 흐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남자는 가끔씩 악보 쓰기를 멈추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산책을 이어갔다.
남자는 그런 행동이 자신의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악보를 쓰다말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느라 남자의 음악은 자연스러움과 멀어졌다. 그것은 남자가 만든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팔리지 않는 악보 때문에 주눅들었고 악보를 쓰다가 멈추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자연히 악보는 더 팔리지 않았고 남자는 점점 더 악보를 쓰는 시간을 줄였다.
어느 날 남자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악보를 쓰다가 멈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악보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의 커피에 액젓을 타는 장난을 치거나, 은행에서 돈을 훔친 다음 지갑에 넣을 수 있는만큼 넣고 나머지는 허공에 뿌렸다. 돈은 흩뿌려진 그대로 떠있었다.
여자는 허공에서 돈을 집었다.
세상에 모든 것의 시간이 멈추었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는 어렸을 때부터 시간이 종종 멈춘다는걸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이따금 있는 지연된 시간을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게 되었고, 왜 시간이 멈추었는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자신의 나라에서 원인을 찾지 못한 여자는 수레에 먹을 것을 잔뜩 싣고 바다 위를 걸어서 다른 나라로 갔다.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여자는 강도에 손에 들린 칼을 집어 강물에 던져두거나, 차에 치일뻔하는 아이를 안아 인도 위에 두었다.
그리고 허공에 돈이 떠 있는 마을에 도착한 여자는 자신이 도착할 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았다. 도시의 사람들은 옷을 발가벗고 물구나무 선채로 있었고, 돈 뿐만 아니라 의자와 텔레비전, 옷들이 허공에 그대로 떠 있었다. 여자는 물구나무 선 채 벌거벗은 사람들을 바닥에 눕혀주고 손이 닿는대로 물건들을 바닥에 놔두었다. 그럼에도 도시는 더는 손대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여자는 도시 가운데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자를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여자는 어째서 시간이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자는 자신이 더이상 악보를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자신은 더이상 악보를 쓸 수 없으며 영원히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자신이 악보를 쓰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찰나, 또는 오랜 시간이 걸려서, 여자는 남자를 악보 앞에 앉히는데 성공했지만, 남자는 단 하나의 음표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를 죽여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남자는 건물의 벽돌을 뽑아서 하늘로 이르는 계단을 만들거나, 잡동사니를 쌓아서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피에로 화장을 그리고, 관청을 화장실로 썼다. 여자는 매일 정오에 눈을 뜨면서 오늘은 남자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했고, 정오에 눈을 감으며 내일은 꼭 하자고 다짐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잠을 자던 여자는 벼락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자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노쇠한 남자가 늙어 죽었다는 걸 알았다. 남자가 최후까지 쌓아올리던 잡동사니 산이 무너져 내리고, 남자가 더이상 악보를 쓰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도, 자신이 악보를 쓰지 못하는 남자를 죽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맞잡은 두 손에서 느껴지는 주름을 통해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