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standalone="yes"?><rss version="2.0" xmlns:atom="http://www.w3.org/2005/Atom"><channel><title>소설 on wirae.me</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link><description>Recent content in 소설 on wirae.me</description><generator>Hugo</generator><language>ko-KR</language><lastBuildDate>Sat, 16 Apr 2022 00:00:00 +0000</lastBuildDate><atom:link href="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index.xml" rel="self" type="application/rss+xml"/><item><title>가장 많은 빛을 받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0%80%EC%9E%A5-%EB%A7%8E%EC%9D%80-%EB%B9%9B%EC%9D%84-%EB%B0%9B%EB%8A%94-%EC%82%AC%EB%9E%8C%EC%9D%B4-%EC%9D%B4%EA%B8%B0%EB%8A%94-%EA%B2%8C%EC%9E%84/</link><pubDate>Sat, 16 Apr 2022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0%80%EC%9E%A5-%EB%A7%8E%EC%9D%80-%EB%B9%9B%EC%9D%84-%EB%B0%9B%EB%8A%94-%EC%82%AC%EB%9E%8C%EC%9D%B4-%EC%9D%B4%EA%B8%B0%EB%8A%94-%EA%B2%8C%EC%9E%84/</guid><description>&lt;p&gt;너는 알 수 없는 캄캄한 공간 안에 있다. 어두운 공간에 삼각뿔 모양의 색색들이 조명들이 마구잡이로 섰다. 너는 무심코 가장 크고 이쁜 빛을 발하는 조명 앞에 서서 빛을 받는다. 어둠이 가시자 덜 불안해진다. 만족하고 있으려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amp;lsquo;가장 많은 빛을 받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amp;rsquo;이라고 한다. 당신은 주변을 돌아보며 첫 번째 조명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른 조명의 불빛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찾는다. 너는 위치를 이동해 이제 세 개의 조명을 받는 곳에 선다. 하지만 세 개의 빛이 교차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숙덕거린다. &amp;lsquo;어딘가에 다섯 개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고 들었다.&amp;rsquo; 너는 곧장 자리를 옮기지는 않고 다섯 개의 조명 불빛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존재할지 계산해본다. 그건 충분히 가능해보인다. 너는 이제 그 위치가 어디일지도 가늠해본다. 다른 사람의 말도 경청한다. 놀랍게도 그 위치는 첫 번째 조명에서 벗어나야만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빛 속에서 누군가 말한다. &amp;lsquo;그런 것을 찾으러 다니지 마라. 너는 어둠 속의 사람들처럼 헤맬 것이다.&amp;rsquo; 만류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섯 개의 조명 불빛을 받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너는 초조하게 조명과 불빛, 어둠 속에서 읊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를 거닐다가 기이한 장소를 발견한다. 다섯 개가 아니라 더 많은 조명 불빛이 교차하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엔 아무도 없다. 너는 그곳에 가서 선다. 너는 얼마간은 만족감에 빠져들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소 덥지 않은가 생각을 한다.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불안해진다. 무엇보다도 네가 견딜 수 없는 사실은 그림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너는 그림자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모래 여권 추격</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A%A8%EB%9E%98-%EC%97%AC%EA%B6%8C-%EC%B6%94%EA%B2%A9/</link><pubDate>Thu, 27 Jan 2022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A%A8%EB%9E%98-%EC%97%AC%EA%B6%8C-%EC%B6%94%EA%B2%A9/</guid><description>&lt;p&gt;진흙이라면 모를까, 모래에 남은 발자국은 얼마가지 않아서 사라진다. 미카는 발자국이 모래 둔덕을 모두 오르자 더는 발자국을 추격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미카는 몸을 숙여 발치의 모래를 한웅큼 집어들었다. 주먹에 힘을 주자 모래알갱이들이 부스스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내리고, 모래 둔덕을 이동시키는 사막의 바람이 모래알갱이들을 멀리 흩뿌렸다. 대개의 모래알들은 다시 미카의 앞으로 떨어지지만 일부는 더 멀리 떨어졌고, 또 먼지나 다름 없는 크기의 것들은 멀리 날려갔다. 저 모래알들은 며칠 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모래 둔덕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lt;br&gt;&#10;미카의 뒤에 서 있던 뷔에른이 말했다.&lt;br&gt;&#10;더는 쫓을 수 없을 겁니다. 포기하죠.&lt;br&gt;&#10;미카가 말했다.&lt;br&gt;&#10;이 사막 너머에 무엇이 있지?&lt;br&gt;&#10;자미른 공국이 있습니다.&lt;br&gt;&#10;공국과 협조를 해야겠군.&lt;br&gt;&#10;뷔에른이 질문했다.&lt;br&gt;&#10;그 여자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lt;br&gt;&#10;그건 모르지. 하지만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잖나. 이 사막을 지나면 여권 없이도 공국에 들어설 수 있을테니까.&lt;br&gt;&#10;국경을 지키는 부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lt;br&gt;&#10;그네들이 사막을 건너는 모든 것들로부터 지킬 수는 없겠지.&lt;br&gt;&#10;미카의 머릿속으로 자미른 공국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lt;br&gt;&#10;자미른은 서편으로 이동하고 있다지. 수도도 옮겼다고.&lt;br&gt;&#10;예.&lt;br&gt;&#10;뷔에른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lt;br&gt;&#10;사막의 모래가 국경을 침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lt;br&gt;&#10;그것 봐. 공국은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있지.&lt;br&gt;&#10;뷔에른이 질문했다.&lt;br&gt;&#10;그 여자가 사막에 비견 된다고 생각하십니까?&lt;br&gt;&#10;미카가 가로저었다.&lt;br&gt;&#10;아니.&lt;br&gt;&#10;미카가 말했다.&lt;br&gt;&#10;그 여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사막의 모래알갱이 아니겠나. 우선은 돌아가지.&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하얀색 내과 좀비</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5%98%EC%96%80%EC%83%89-%EB%82%B4%EA%B3%BC-%EC%A2%80%EB%B9%84/</link><pubDate>Tue, 18 Jan 2022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5%98%EC%96%80%EC%83%89-%EB%82%B4%EA%B3%BC-%EC%A2%80%EB%B9%84/</guid><description>&lt;p&gt;좀비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좀비에 대항하기 위한 제대로 된 도구들이 발명되면서 좀비는 일반인들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커다란 이지창은 좀비에게 물리지 않으면서 좀비를 넘어트리거나 묶어둘 수 있는 도구였다.&lt;br&gt;&#10;다만 그렇게 잡은 좀비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라 할 수 있었다. 불로 태우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지만 이내 그것이 좀비로 인해 붕괴된 인프라에서 너무 소비적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좀비에게서도 쓸모를 찾아야만 했다.&lt;br&gt;&#10;좀비에게 운동 기능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치가 있지 않았다. 좀비는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았다. 좀비는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리가 아니라 기어서라도, 길 수 없다면 몸을 꿈틀대면서도 나아가지만 그런 방편으로는 일관된 기술적 방법론을 적용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내구도도 너무 약했다.&lt;br&gt;&#10;하지만 한 내과의사가 좀비의 쓸모를 찾아냈다.&lt;br&gt;&#10;좀비는 죽은 상태이지만 음식을 먹고 소화한다. 그말인 즉 내장기관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내장기관의 주인은 죽은 상태다. 그 말인 즉, 내장기관을 주인에게서 떼어낸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그 기능을 제대로 해낸다는 말이었다.&lt;br&gt;&#10;물론 좀비의 내장이라는 것은 백색의 뿌옇고 멀건한, 창백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속부터 썩어가고 있으므로 그 모양과 실제 정도가 과히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적당량의 알코올이 포함되면 위험한 수준의 세균과 박테리아를 처리할 수 있었고, 그 내장의 쓸모에서 그런 부분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lt;br&gt;&#10;이를테면 산을 분비해내는 좀비의 위장은 그대로 잘려진 뒤 펼쳐져 쓰레기처리장 바닥에 넓게 깔렸다. 이 강력한 산성 물질 제작 공장은 자산가 거주구의 쓰레기들을 남김없이 녹이고, 덩달아 자산가들이 공동체에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기타 부산물들; 이를테면 쓸모를 다 한 애완동물이나 정부, 자산가 거주구를 호시탐탐 노리는 기자들의 흔적도 손 쉽게 녹여냈다.&lt;br&gt;&#10;좀비 대장은 훌륭한 수분 흡수 장치로, 같은 부피의 스펀지보다도 세 배는 많은 양의 물을 저장했다. 물론 이 물은 차후에 식용수로 쓸 수 있지만 그 물은 충분히 소독되는데다, 좀비 내장을 이용하는 자산가들은 딱히 마실 일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사건 사고 갤러리</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82%AC%EA%B1%B4-%EC%82%AC%EA%B3%A0-%EA%B0%A4%EB%9F%AC%EB%A6%AC/</link><pubDate>Fri, 14 Jan 2022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82%AC%EA%B1%B4-%EC%82%AC%EA%B3%A0-%EA%B0%A4%EB%9F%AC%EB%A6%AC/</guid><description>&lt;p&gt;웃긴 미술관 이름이었다. &amp;lsquo;사건 사고 갤러리&amp;rsquo;&lt;br&gt;&#10;&amp;ldquo;이거 사사갤 말하는 거 맞지?&amp;rdquo;&lt;br&gt;&#10;&amp;ldquo;사사갤?&amp;rdquo;&lt;br&gt;&#10;내 말에 주안이 되물었다.&lt;br&gt;&#10;내가 설명했다.&lt;br&gt;&#10;&amp;ldquo;와우라는 게임이 있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 게임은 많은 사람이 같이 하는 게임이야. 그런데 게임이라고해도 법이라는 게 꼭 지켜지진 않거든. 그래서 개인이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커뮤니티가 있었던 거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사사갤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그걸 고발해봤자 무슨 쓸모가 있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 글을 본 다른 사람들이.&amp;rdquo;&lt;br&gt;&#10;&amp;ldquo;원시 부족사회 비슷한 거네.&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amp;rdquo;&lt;br&gt;&#10;나와 주안은 미술관 명패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lt;br&gt;&#10;하지만 우스운 미술관 이름과 달리 미술관 내부는 평범했다. 전시품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흰 가벽을 두고 그때그때 조명을 달리할 수 있도록 위쪽은 마감이 허술했다. 인더스트리얼이라는 이름의 인테리어 양식이었다.&lt;br&gt;&#10;무엇보다도 미술관에는 제대로 된 미술품이 없는 것 같았다.&lt;br&gt;&#10;&amp;ldquo;들어올 수 있는 것 보면 개장은 한 것 같은데.&amp;rdquo;&lt;br&gt;&#10;&amp;ldquo;하지만 직원이 없잖아. 다시 나갈까?&amp;rdquo;&lt;br&gt;&#10;&amp;ldquo;글쎄.&amp;rdquo;&lt;br&gt;&#10;주안은 뭔가 아쉬운듯 미로같은 미술관 가벽 사이를 지났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lt;br&gt;&#10;코너를 돌자 의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lt;br&gt;&#10;바닥에 붉게 흩뿌려진 피였다.&lt;br&gt;&#10;바닥 또한 옅은 회색의 마블링이 들어간 백색 대리석이었기에 그 피는 선명하기만 했다.&lt;br&gt;&#10;나와 주안은 그 앞으로 걸어갔다.&lt;br&gt;&#10;&amp;ldquo;전시품이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아마도?&amp;rdquo;&lt;br&gt;&#10;나는 답하면서 전시품을 설명하는 명패가 놓여있는지 찾아보았다.&lt;br&gt;&#10;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 너머로 작은 핏물들이 튀어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 작은 핏물 몇 개를 밟은 상태였다. 전시품이라면 전시품을 훼손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 피를 밟지 않고는 복도를 지날 수 없었다.&lt;br&gt;&#10;주안이 핏자국 사이를 조심조심 걸으며 말했다.&lt;br&gt;&#10;&amp;ldquo;행위 예술 같은 거였나봐.&amp;rdquo;&lt;br&gt;&#10;&amp;ldquo;앞에서 아직 진행중일지도 모르지.&amp;rdquo;&lt;br&gt;&#10;나와 주안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제3측으로</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0%9C3%EC%B8%A1%EC%9C%BC%EB%A1%9C/</link><pubDate>Thu, 12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0%9C3%EC%B8%A1%EC%9C%BC%EB%A1%9C/</guid><description>&lt;p&gt;너는 오늘 새벽에도 잠을 설쳤다. 꿈은 파편적이었고 불완전했고 흔들렸으며 기억에 거의 남지 않았다. 너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앞섬을 ■측 손으로 감아쥐고 그 아래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두어시간의 짧은 수면 이후 침대에서 밤을 지새운 너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우측 다리를 먼저 뻗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행히 오른다리와 오른팔의 보조기는 이제 학습을 완전히 끝내어 불편함이 없었지만, 너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으스스하게 생각되었다. 너는 몸의 우반편(右半片)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가 느끼고 직접 움직이는 ■측과 달리 너의 몸을 지탱하는 나머지 우측은 허상으로 밖에 받아들여졌다.&lt;br&gt;&#10;너는 약속 시간에 맞춰 오브라이언 교수를 찾아갔다. 너의 상담자이자 주치의인 오브라이언은 사고 이후 지금까지 너의 편측무시(片側無視)와 강박주의, 그리고 환각에 대한 상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브라이언은 언제나처럼 너에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시계와 집, 꽃을 따라그리도록 했고, 너는 보이는 그대로 그려냈다고 생각했지만, 오브라이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좌절감을 느꼈다. 이를테면 너는 시계를 따라그릴 때 분명 너에게 보이는 ■측의 숫자를 적어 내렸다. 분명 그 뒤 시계에 우측에 오는 숫자, 2와 1, 이어 2, 3, 4, 5를 써넣어야 했지만, 너는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 잠시 주저하였으나 손상된 우반구 측두-두정엽과 망상체 병변에 의해 끝내 그려내지 못했다. 다소간 너도 느끼지 못한 채 우측 손을 움찔 거린 것은 우반편 보조기의 학습 능력 때문이었다.&lt;br&gt;&#10;오브라이언 교수가 말했다.&lt;br&gt;&#10;&amp;ldquo;트레이닝은 하고 있습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측에서 그…&amp;rdquo;&lt;br&gt;&#10;&amp;ldquo;우측이요.&amp;rdquo;&lt;br&gt;&#10;&amp;ldquo;예. 그… 측.&amp;rdquo;&lt;br&gt;&#10;&amp;ldquo;음, 좋습니다. 방법을 바꾸죠. ■측을 제1측이라고 부르고 우측을 제2측이라고 부릅시다. 어때요?&amp;rdquo;&lt;br&gt;&#10;&amp;ldquo;제1측에서 제2측. 예. 부르기가 한결 편하네요. 아, 그래서 트레이닝 말이죠. 제1측에서 제2측에서 야구공을 주고 받는 일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보조기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예… 다소 섬뜩하긴 합니다만.&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습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예.&amp;rdquo;&lt;br&gt;&#10;너는 오브라이언 교수가 과연 너를 이해할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설명했다.&lt;br&gt;&#10;&amp;ldquo;그러니까 제가 제1측의 손에 공을 쥐고 있다가 제2측으로 공을 던지면, 제 시야에서 공은 사라져버립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그때 저의 제2측 손으로 공을 쥐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죠. 그러다가 문득, 당연히 그럴 때가 되었다고 싶을 때, 공이 던져져 제1측 손에 떨어집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공이 떨어져서 그걸 잡지못한다면 조금은 덜 섬뜩할 겁니다. 갑자기 물건이 툭하고 떨어지는 건, 저에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공 주고받기 트레이닝은 마땅한 합의가 되어있는 것처럼 굴기 때문에 으스스하게 느껴집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마치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가 공을 쥐어주는 것처럼?&amp;rdquo;&lt;br&gt;&#10;&amp;ldquo;예.&amp;rdquo;&lt;br&gt;&#10;오브라이언 교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는 교수를 이해시켰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지만, 교수의 다음 말에서 공포를 느낀다.&lt;br&gt;&#10;&amp;ldquo;하지만 트레이닝의 성과는 있습니다. 보조기의 패턴이 어느 정도 일치되어 일상 생활에 큰 불편이 없겠지만, 목표로 하시는 엔지니어 업무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좀더 정교한 작업 능력이 필요할 겁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계속 트레이닝을 하라는 거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섬뜩함이 생활에 지장을 줍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약을 늘릴 수 있을까요?&amp;rdquo;&lt;br&gt;&#10;오브라이언 교수는 가로젓는다.&lt;br&gt;&#10;&amp;ldquo;이미 드릴 수 있는 최대 용량입니다. 약도 바꿔볼 수 있는만큼 바꿨고, 신약은 좀더 기다려야 됩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방법이 없군요, 그럼.&amp;rdquo;&lt;br&gt;&#10;&amp;ldquo;일기는 어떻습니까?&amp;rdquo;&lt;br&gt;&#10;너는 잠깐 시선을 피한다.&lt;br&gt;&#10;&amp;ldquo;아직 쓰고 있지 않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꼭 저한테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자기 고백은 바일 씨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알겠습니다.&amp;rdquo;&lt;br&gt;&#10;오브라이언 교수는 너를 신용하지 않는 것 같기도, 믿는 것 같기도 하다.&lt;br&gt;&#10;&amp;ldquo;아직도 꿈을 꿉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예. 이야기 해볼까요?&amp;rdquo;&lt;br&gt;&#10;오브라이언 교수는 별다른 기대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조난, 고장나고 밀폐된 왕복선, 일흔 여덟 명의 승객, 외계 기생생물 쿨리, 쿨리에 감염된 사내, 부족한 식량, 이교도, 퍼지는 쿨리, 식인, 피의 제단, 사교도, 파멸, 그리고 구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제1측. 기억나지 않는 왕복선의 제2측에서 벌어난 일들에 대해. 완성되지 않고 파편화된 사건에 대하여.&lt;br&gt;&#10;&amp;ldquo;…좋습니다. 예의 왕복선 사건에 조사관 찬은 별다른 연락이 없다고 합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조사는 막바지고 기록된 장비를 모두 확인 했다고 합니다. 새로줄 수 있는 정보는 없다고 하더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직도 쿨리가 걱정 됩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amp;rdquo;&lt;br&gt;&#10;&amp;ldquo;이미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검사는 모두 끝냈습니다. 바일 씨 몸에는 쿨리가 없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선생님… 아시다시피…&amp;rdquo;&lt;br&gt;&#10;&amp;ldquo;예. 알고 있습니다. 외계생물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쿨리가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죠. 덕분에 쿨리의 장기의태 논문도 봤고, 솔직히 이번에 처음 말씀드리지만 학회도 한 번 참가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더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개인적인 흥미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쿨리 아이러니 라는 개념도 있더군요. 알고 계십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예.&amp;rdquo;&lt;br&gt;&#10;&amp;ldquo;완전의태된 쿨리가 완전히 해당 조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 그것은 더이상 쿨리가 아니게 되죠.&amp;rdquo;&lt;br&gt;&#10;너는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한 말을 마음 속으로 웅얼거린다. 그게 쿨리의 무서움이죠. 쿨리가 뇌 의태를 마칠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이 쿨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겁니다. 바로 저처럼. 저는 구조 당하기 직전 분명 제단에 묶여 있었고 코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구조원은 제 코 안쪽에서 선명하게 파고든 상처가 있다고했고, 그것은 도구를 통해 날카로운 것이 헤집었으며, 사교도의 도구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쿨리를 집어넣기 위한 통로였을 겁니다.&lt;br&gt;&#10;하지만 너는 그 모든 말을 하지 않는다.&lt;br&gt;&#10;너를 안심시키려는 오브라이언의 말에 어색하게 웃고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상담을 끝낸 너는 자리에서 일어난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앙겔루시움 B동 펜트하우스</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5%99%EA%B2%94%EB%A3%A8%EC%8B%9C%EC%9B%80-b%EB%8F%99-%ED%8E%9C%ED%8A%B8%ED%95%98%EC%9A%B0%EC%8A%A4/</link><pubDate>Wed, 11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5%99%EA%B2%94%EB%A3%A8%EC%8B%9C%EC%9B%80-b%EB%8F%99-%ED%8E%9C%ED%8A%B8%ED%95%98%EC%9A%B0%EC%8A%A4/</guid><description>&lt;p&gt;영선 앙겔루시움은 50층 주상복합 아파트로, 5층까지는 상가, 나머지는 A동과 B동으로 나뉘어진 주거 공간으로 362세대였다. A와 B 두 동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앙겔루시움에 사는 이들은 도시의 많은 이들과는 달리 좀더 선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사태가 확대되기 전에 도망가거나, 아니면 사태가 확대 되더라도 이 고층 아파트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줄 거라고 믿거나. 아니면 그냥 집값이 너무 비싸서 죽어서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집안을 들여다보면 끝까지 남아있다 죽어있던 이들이 곧잘 있었다.&lt;br&gt;&#10;이를테면 세대주 이영찬의 집에는 세 사람이 살았다. 이영찬과 그 가족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수도는 최근까지도 연결 되어 있었으니 담을 수 있는 그릇마다 물이 차 있긴 했지만, 음식이 없었다. 4인용 식탁 위에 있는 사골용 냄비에는 갈색빛이 나는 퉁퉁 불은 무언가가 있었는데, 꺼내서 확인해보니 가죽벨트였다. 초기에 음식을 마련하는데 실패했던 것으로 보였다. 아내와 아이는 거실 소파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었고, 이영찬은 안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부패 정도를 보아선 이영찬은 아내와 아이가 죽은 뒤 죽은 것 같았다. 품에는 일기도 남아 있었는데, 마지막 잠에 들기 전에 쇠약사를 예견하고 있었다. 초기 내용은 절망적이었지만 날이 지날수록 사색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고 허기에 대한 갈망 앞에 놓인 자신을 성찰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었다.&lt;br&gt;&#10;물론 이영찬 같은 사람만 있지는 않았다. 세대주 서영태 같은 사람도 있었다. 서영태는 &amp;lsquo;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amp;rsquo; 준비가 된 사람으로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가구를 뜯어 차곡차곡 쌓아놓은 바리케이트를 넘어가느라 시간을 꽤나 보내야했다. 아직 뜯지도 않은 2리터 물 여섯 개 들이가 내 머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작은 방 하나는 창고로 여섯 칸 앵글로 보존식이 쌓여 있었다. 베란다는 생활감이 가득했다. 가스가 초기에 끊겼지만 비축된 가스통은 물론 기름도 몇 통 있었다. 가스버너 옆으로는 요리에 사용한 후라이팬과 냄비에 찌든 때와 기름이 묻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서영태는 마지막까지 배불리 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베란다가 마주하고 있는 거실에는 서영태와 아내 여민지, 그리고 세 남매의 목이 모빌처럼 매달려 있었다. 맞이인 서민하가 열두 살이었고 막내인 서라윤이 여섯 살이었다. 서영태의 안방 책상 위에는 수면유도제 레돌민이 까여 있었는데 손을 묶은 것이 서영태 뿐인데다, 알약이 까인 갯수로 보아선 세 아이와 여민지가 먹고 서영태가 남은 이들의 목을 걸고 난 뒤 스스로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영태와 그 가족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풍요로운 가운데 비축된 물과 식량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영태의 안방에는 서핑보드가 몇 개나 있었고, 지하주차장에 짚차와 캠핑카가 있었고, 함께 찍은 많은 사진들 속에서 가족은 웃고 있었다.&lt;br&gt;&#10;그리고 차수진 같은 사람도 있었다.&lt;br&gt;&#10;차수진의 집이 마지막이었다. B동 펜트하우스로 마지막 층 전체를 집을 사용하는데다 옥상 정원을 혼자서 사용하고 있었다. 앙겔루시움 같은 이름을 가진 아파트의 펜트하우스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세대주인 차수진의 열 일곱으로 나와 나이가 같다는 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차수진의 집에는 생활감이 거의 없었다. 차수진은 방이 열 둘, 화장실이 다섯 개나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소지품은 극히 적었다. 교과서와 문제지들, 스마트폰, 네 벌의 교복과 드레스룸의 옷걸이 하나 정도에 모두 걸리는 사복. 가구는 거의 없었고 가전제품과 부엌은 작은 쪽을 사용하는 것 같았고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다. 나는 차수진이 현명하게도 아파트에 남지 않고 도망간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차수진이 미련했다는 것은 아니다. 차수진은 이영찬이나 서영태 보다 더 저항적인 사람이었다. 단지 그 상대가 아버지였을 뿐. 차수진의 일기를 보았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차수진을 찾기 위해 세 번이나 헬리콥터를 보냈고 그 헬리콥터는 이 옥상에 내려앉았다. 군인이 두 번, 직속 팀이 한 번 이 펜트하우스를 둘러보았고 그녀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렇게나 꽁꽁 숨었으니 차수진을 찾을 수 있을리 없었다. 나는 완전히 여위어 죽은 차수진을 일기와 함께 환기구에서 발견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달로</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B%AC%EB%A1%9C/</link><pubDate>Tue, 10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B%AC%EB%A1%9C/</guid><description>&lt;p&gt;모두가 달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lt;br&gt;&#10;들플과 벌레 같은 미물부터 산군들까지.&lt;br&gt;&#10;땅을 딛고 사는 것들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창왕(蒼王)들은 비행을 접고 높은 바위산 위에 걸터 앉는다. 그저 두려운 눈으로 달이 오는 걸 본다.&lt;br&gt;&#10;별잡이들은 이번 달이 가장 가까울 것이라 예견하였다.&lt;br&gt;&#10;그 말은 사실이었다.&lt;br&gt;&#10;지금까지 달은 하늘의 3할을 가릴 정도였지만 오는 달은 이미 4할을 넘어서고 있었다.&lt;br&gt;&#10;바람이 달을 향해 솟구쳤고, 벌레들이 휘말려 올랐다.&lt;br&gt;&#10;치솟아 오른 흙먼지와 낙엽, 벌레들은 이윽고 우리가 있는 맞이산을 지나쳐 계속해서 올라갔다.&lt;br&gt;&#10;희미하고 거대한 기둥이 우리 땅과 달로 이어지고 있었다.&lt;br&gt;&#10;와송은 넙적한 바위에 앉아 웃었다.&lt;br&gt;&#10;&amp;ldquo;저 해충들이 벌 받는 걸 봐라.&amp;rdquo;&lt;br&gt;&#10;&amp;ldquo;정화가 시작되었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준비는?&amp;rdquo;&lt;br&gt;&#10;&amp;ldquo;완벽합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못난놈.&amp;rdquo;&lt;br&gt;&#10;그 말에 와송의 아들 와후가 의아하게 물었다.&lt;br&gt;&#10;&amp;ldquo;왜 그러십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달님에게 인간의 완벽에 성에 찰 것 같으냐? 완벽은 쓸모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라. 원념만이 달님에게 닿는다.&amp;rdquo;&lt;br&gt;&#10;&amp;ldquo;아. 죄송합니다.&amp;rdquo;&lt;br&gt;&#10;와후는 금새 꾸벅 숙인다. 웃어른을 존경하는 청년이다.&lt;br&gt;&#10;와송이 묻는다.&lt;br&gt;&#10;&amp;ldquo;최선을 다했느냐?&amp;rdquo;&lt;br&gt;&#10;&amp;ldquo;최선을 다했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능히 닿겠구나.&amp;rdquo;&lt;br&gt;&#10;&amp;ldquo;달님만이 아시겠지요.&amp;rdquo;&lt;br&gt;&#10;그 말에 와송이 빙긋 웃는다. 와후는 예의를 알 뿐만 아니라 배우는 것도 빠르다. 확실히 달에 도전할 자격을 갖추었다. &amp;lsquo;여행자&amp;rsquo;답다.&lt;br&gt;&#10;달이 더 커지고 있다.&lt;br&gt;&#10;다른 부족들은 별잡이들의 말을 듣고 여행자를 여럿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lt;br&gt;&#10;우리는 예년과 같은 둘이었다.&lt;br&gt;&#10;나와 와후.&lt;br&gt;&#10;둘 다 여행자가 될 시험을 통과했다.&lt;br&gt;&#10;달은 더 가까워졌다.&lt;br&gt;&#10;이미 하늘을 가득히 메워서, 달이 얼마나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지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lt;br&gt;&#10;보이는 것만이 전부도 아니었다.&lt;br&gt;&#10;모두 달이 가까워짐에 따라 공유하는 감각이 있었다.&lt;br&gt;&#10;경신(傾身).&lt;br&gt;&#10;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우리의 몸과 영혼이 이미 달에게 빼앗기고 있었다.&lt;br&gt;&#10;성질이 급한 뿔치 부족은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lt;br&gt;&#10;본래라면 제 정강이만큼 밖에 못뛰는, 집채만한 부락타가 제 키를 훌쩍 뛰어넘어 솟아오른다. 고삐가 풀려 신이 난 육고기같다.&lt;br&gt;&#10;와후는 또 웃는다.&lt;br&gt;&#10;&amp;ldquo;멍청한 놈들. 신났군. 저러다 다리가 부러지면 마지막 도약을 어찌하려고. …너흰 제단 위로 올라가 마지막 정비를 시작해라.&amp;rdquo;&lt;br&gt;&#10;나와 와후는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지금까지는 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제단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이제 나와 와후 뿐이다.&lt;br&gt;&#10;맞이산 정상에서 다시 제단 위로.&lt;br&gt;&#10;허리 높이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지만 오르는 것은 수월하다.&lt;br&gt;&#10;점점 더 쉬워진다.&lt;br&gt;&#10;어찌나 쉬운지, 달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지막 세 단은 단번에 뛰어 넘는다.&lt;br&gt;&#10;잘못하면 제단을 넘어설 뻔하지만, 와후가 내 허리를 잡아챈다.&lt;br&gt;&#10;&amp;ldquo;괜찮습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고마워.&amp;rdquo;&lt;br&gt;&#10;제단 위에서 마지막 정비를 마친다.&lt;br&gt;&#10;모두 계획대로다.&lt;br&gt;&#10;준비는 끝났다.&lt;br&gt;&#10;우리는 와송의 신호만을 기다린다.&lt;br&gt;&#10;와송은 창왕들의 깃털을 엮어 만든 깃발을 손에 쥐고 있다.&lt;br&gt;&#10;우리는 저 깃발이 손에 오르는 것만 기다린다.&lt;br&gt;&#10;누군가 외친다.&lt;br&gt;&#10;&amp;ldquo;뿔치 오릅니다!&amp;rdquo;&lt;br&gt;&#10;그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옮겨진다.&lt;br&gt;&#10;뿔치 부족의 염원을 담은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lt;br&gt;&#10;&amp;ldquo;뿔치! 달로!&amp;rdquo;&lt;br&gt;&#10;&amp;ldquo;달로!&amp;rdquo;&lt;br&gt;&#10;&amp;ldquo;솟아라!&amp;rdquo;&lt;br&gt;&#10;&amp;ldquo;닿아라!&amp;rdquo;&lt;br&gt;&#10;제단 위에는 거대하게 솟은 원통이 있다.&lt;br&gt;&#10;그 원통 끝에 부락타가 올라간다.&lt;br&gt;&#10;원통 아래에는 거대한 심지가 있고, 뿔치의 부족장이 불꽃을 붙인다.&lt;br&gt;&#10;제단 위에서 와후가 외친다.&lt;br&gt;&#10;&amp;ldquo;부락타!&amp;rdquo;&lt;br&gt;&#10;들리지 않을 거릴텐데도, 부락타가 흔드는 손이 보인 것 같다.&lt;br&gt;&#10;&amp;ldquo;달에서 보자!&amp;rdquo;&lt;br&gt;&#10;부락타고 있던 거대한 원통, 달을 향해 가는 기둥 끝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lt;br&gt;&#10;뿔치의 제단은 달로 갈 때마다 파손된다.&lt;br&gt;&#10;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상처를 남겼다.&lt;br&gt;&#10;그 누구보다도 빨리, 원기둥이 솟아오른다.&lt;br&gt;&#10;우리의 시야를 지나, 달을 향해간다.&lt;br&gt;&#10;부락타는 시야에서 곧 사라진다.&lt;br&gt;&#10;달을 향한 것은 틀림없으나 달에 도달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lt;br&gt;&#10;도달했더라도, 그 시간 동안 부락타는 달이 허용되지 않는 압력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lt;br&gt;&#10;뿔치 부족은 연연하지 않는다. 여행자는 떠났다. 다음 여행자를 떠나보내야 할 때다.&lt;br&gt;&#10;와후가 말한다.&lt;br&gt;&#10;&amp;ldquo;이번에 뿔치는 열 개를 준비 했다던데.&amp;rdquo;&lt;br&gt;&#10;&amp;ldquo;그만한 여력이 있나?&amp;rdquo;&lt;br&gt;&#10;&amp;ldquo;쥐어짜냈겠지. 별잡이들이 우리 생에 달님이 제일 가까워진다고 했으니까. 이번 여행을 끝내면 뿔치는 당분간은 달로 여행자를 보내지 못할거야.&amp;rdquo;&lt;br&gt;&#10;나는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가볍게 제단에서 튕겨져 올라본다.&lt;br&gt;&#10;이미 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다.&lt;br&gt;&#10;나의 존재가 남아있는지 어떤지 의아스럽다.&lt;br&gt;&#10;와송이 제단 아래에서 외쳤다.&lt;br&gt;&#10;&amp;ldquo;아직 이르다!&amp;rdquo;&lt;br&gt;&#10;나는 알겠단 뜻으로 팔을 흔든다.&lt;br&gt;&#10;다음은 고래 부족이다.&lt;br&gt;&#10;뿔치와 같이 화약을 쓰지만 그들은 직접 여행자를 쏘아보내지 않는다.&lt;br&gt;&#10;고래 부족은 포구를 달로 향하고 폭력적으로 쏘아댄다.&lt;br&gt;&#10;하지만 쏘아내는 것은 대포알이 아닌 거대한 돛이다.&lt;br&gt;&#10;돛의 끝에는 가볍고 튼튼한 벌레실로 짠 사다리가 짜여있다.&lt;br&gt;&#10;돛은 금새 시야를 지나쳐서 달로 나아가지만, 사다리가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는 알 수 없다.&lt;br&gt;&#10;사다리가 달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면, 사다리를 오르던 이들은 모두 땅으로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래 부족에게 언제나 감내하던 일이었다.&lt;br&gt;&#10;&amp;ldquo;저 욕심 때문에 달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을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맞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달에서도 이쪽으로 돛을 던저 이어줄 수 있다면…&amp;rdquo;&lt;br&gt;&#10;&amp;ldquo;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달로 가야하지.&amp;rdquo;&lt;br&gt;&#10;&amp;ldquo;우리가 갈겁니다.&amp;rdquo;&lt;br&gt;&#10;와송이 외친다.&lt;br&gt;&#10;&amp;ldquo;준비해라!&amp;rdquo;&lt;br&gt;&#10;우리는 그렇게 한다.&lt;br&gt;&#10;뿔치는 폭죽.&lt;br&gt;&#10;고래는 사다리.&lt;br&gt;&#10;우리는 날개다.&lt;br&gt;&#10;와송이 외친다.&lt;br&gt;&#10;&amp;ldquo;지금!&amp;rdquo;&lt;br&gt;&#10;우리는 연습한대로 바닥을 밀어찬다.&lt;br&gt;&#10;몇 번째인지 모를 뿔치 부족의 원기둥과 고래 부족의 사다리가 솟아오르고, 우리는 그 사이로 뛰어든다.&lt;br&gt;&#10;우리는 날개를 조작한다.&lt;br&gt;&#10;와송은 완벽한 기술자다. 제대로 작동한다.&lt;br&gt;&#10;인간은 창왕 흉내를 낼 수 없지만 달맞이 날만큼은 다르다.&lt;br&gt;&#10;유일하게 창왕이 될 수 있는 날이다.&lt;br&gt;&#10;날개를 퍼득이며 창왕 흉내를 낸다.&lt;br&gt;&#10;달을 속인다.&lt;br&gt;&#10;우리를 앞서 갔던 기둥들과 돛을 지나친다.&lt;br&gt;&#10;땅으로부터 불어와 달로 가는 바람이 우리의 염원과 같다.&lt;br&gt;&#10;맞이산이 조막만하게 보이고, 공기가 차가워진다.&lt;br&gt;&#10;호흡이 가빠진다.&lt;br&gt;&#10;우리의 땅이 달과 같이 둥근다는 걸 안다.&lt;br&gt;&#10;와후의 머리에 서리가 끼는 걸 본다.&lt;br&gt;&#10;내 머리칼이 깨어지며 나도 같다는 걸 알게 된다.&lt;br&gt;&#10;우리는 두 손을 붙잡는다.&lt;br&gt;&#10;우리 땅과 달의 가운데, 그 언저리까지 왔다.&lt;br&gt;&#10;&amp;ldquo;부족해.&amp;rdquo;&lt;br&gt;&#10;&amp;ldquo;아직 모릅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알 수 있어. 달님이 멀어진다.&amp;rdquo;&lt;br&gt;&#10;와송은 초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lt;br&gt;&#10;&amp;ldquo;당신이 더 가볍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서?&amp;rdquo;&lt;br&gt;&#10;&amp;ldquo;당신이 가야만 합니다.&amp;rdquo;&lt;br&gt;&#10;나는 내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amp;ldquo;내가 가야해.&amp;rdquo;&lt;br&gt;&#10;&amp;ldquo;돕겠습니다. 발을 당기십시오.&amp;rdquo;&lt;br&gt;&#10;나는 와송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lt;br&gt;&#10;달맞이를 할 때마다 와송과 연습한 적이 있었다.&lt;br&gt;&#10;우리는 서로의 발을 겹친다.&lt;br&gt;&#10;나는 달을 보고, 와송은 땅을 본다.&lt;br&gt;&#10;나는 와송을 잠깐 내려다본다.&lt;br&gt;&#10;&amp;ldquo;기다리고 있을게.&amp;rdquo;&lt;br&gt;&#10;와송이 웃는다.&lt;br&gt;&#10;그는 내 발을 밀어찬다.&lt;br&gt;&#10;동시에 나도 솟구쳐 오른다.&lt;br&gt;&#10;아니, 나는 눈을 깜빡인다.&lt;br&gt;&#10;나는 존재를 되찾고 있었다. 무게가 돌아오고 있었다.&lt;br&gt;&#10;그리고 그것은 내 땅의 것이 아닌 달의 것이었다.&lt;br&gt;&#10;달은 내가 거절할 새도 없이 나를 허락하고 있었다.&lt;br&gt;&#10;눈물이 새어나왔다.&lt;br&gt;&#10;저기, 우리 먼 선조들이 기다리는 저 초록의 땅으로.&lt;br&gt;&#10;나는 돌아간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김군의 임무</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9%80%EA%B5%B0%EC%9D%98-%EC%9E%84%EB%AC%B4/</link><pubDate>Mon, 09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9%80%EA%B5%B0%EC%9D%98-%EC%9E%84%EB%AC%B4/</guid><description>&lt;p&gt;그 니콘 DSLR 카메라는 캄브리아기 지층에서 발견 되었다.&lt;br&gt;&#10;그러니까 삼엽충이 바다에 버글거리던 지층에서 발견 되었다는 말인데, 실제로 해당 시대의 사진도 한 장 찍혀 있었다.&lt;br&gt;&#10;발견한 것은 고생물학자 숀 스미스 교수였다. 불행히도 요원 김군은 오파츠 수거 임무를 맡고 있었고 언제나 절차대로 수행해야 했다. 그래도 김군은 나름의 선심을 썼다. 고생물학자 숀 스미스의 기억을 지우기 전에 그 사진(시야각을 가득 채운 삼엽충 무리)을 한 번 보여주었고 그는 정신을 차린 뒤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물론 숀 스미스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늘 자신을 괴롭혀 오는 안구 건조증 탓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lt;br&gt;&#10;김군은 카메라와 함께 해당 자리에 있어야할 다른 무언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메라의 원래 소유자는 해당 지층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튼 김군은 이제 남은 유일한 단서인 카메라를들여다볼 방법 밖에 없었으므로, 그렇게 했다.&lt;br&gt;&#10;마지막 사진은 앞서 숀 스미스와 함께 보았던 버글버글한 삼엽충무리였고, 그 다음 사진은 기대도 하지 않았던 행성 표면 사진이었다. 김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초적인 상식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해당 행성 표면은 수성도, 금성도, 화성도 아니었고 태양계 내의 다른 단단한 위성도 아니었으며 행성에서 퇴출 된 그 명왕성도 아니었다.&lt;br&gt;&#10;사진은 금속질 표면으로 번들거렸고 그 때문에 니콘 DSLR 카메라와 그것을 찍는 누군가의 모습도 일부 비추어보였고, 그 위로는 두 개의 청색 태양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덮쳐지는 모습으로 사납게 찍혀 있었다. 그 외의 별들이 찍혀 있으므로 힌트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군의 천문지식으로는 어려웠다.&lt;br&gt;&#10;김군은 가장 가까운 전문가들인 21세기의 NASA에 디밀어봤지만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결과만 얻었다. 그래도 전문가들인 그들은 성심성의 답변해주길, 표면의 매끈한 정도로 보아 중성자별의 이미지일 거란 이야기를 얻었다. 김군이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lt;br&gt;&#10;때문에 김군은 두 번째로 가까운 전문가, &amp;lsquo;꿈 꾸는 자&amp;rsquo; 나카노 후미나리를 찾아갔다. 나카노는 일본의 SF작가로 자신의 작가적 능력이 많은 독서와 공부, 그리고 조금의 재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순수한 작가였다. 데뷔 단권 라이트노벨의 판매량은 5만부로 인기 있는 작품이었지만 이후 작품에서 고배를 마셔야했고 3년 차를 지나는 지금은 세 작품을 내리 저조한 판매량으로 다음 작품을 계약할 용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김군은 나카노를 이해했다. 그녀의 재능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lt;br&gt;&#10;하지만 김군은 딱히 나카노 후미나리의 작가적 성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나 간섭은 규정 위반이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녀의 데뷔작을 서점에서 구매하고 그녀가 작업하는 카페에서 만나 팬임을 밝히고 사인을 받으며 카메라에 담긴 두 번째 사진을 보여주었다.&lt;br&gt;&#10;나카노 후미나리는 거의 눈을 깜빡이다가 김군의 얼굴을 몇 번 들여다보았고 어디서 가져온 그림인지 물었다. 김군은 적당히 인터넷에서 발견했던 사진이라며 혹시 작품이랑 관련있냐고 물었는데, 나카노는 고개를 끄덕였다.&lt;br&gt;&#10;&amp;ldquo;예전에 습작을 인터넷에 올린적이 있는데 누가 그걸 가지고 팬분이 그려주셨나봐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군요. 어떤 소설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amp;rdquo;&lt;br&gt;&#10;&amp;ldquo;옛날 글이라 부끄러운데.&amp;rdquo;&lt;br&gt;&#10;그렇게 말해도 나카노는 &amp;lsquo;자신이 짰다고 생각하는 SF설정&amp;rsquo;을 줄줄 풀어서 설명했다. 김군은 그 내용을 외워두곤 사진은 나카노에게 준 다음 카페에서 나왔다. 김군이 다음으로 향한 장소는 안드로메다 은하단 팔끝에 위치한, 쌍성을 끼고 있는 중성자별이었다.&lt;br&gt;&#10;다행히 좌표는 나카노가 말해준 것과 틀림이 없었다. 꿈꾸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관측 되지 않은 우주의 지식이 구분 되지 않는 이들로 별의 아이로 불린다. 김군은 그들의 슬픈 운명을 그리면서 중성자별의 표면을 천천히 걸었다.&lt;br&gt;&#10;중성자별에서 뭉개지지 않기 위해선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물리적 고유성(固有性)이 요구 되었지만 김군은 요원으로서 갖춰야할 정도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표면이 미끄럽긴했지만 김군은 스케이트도 곧잘 탔다.&lt;br&gt;&#10;하지만 중성자별에도 김군이 찾는 사진사는 찾기 어려웠다. 김군은 하는 수 없이 다음 사진을 보기로 했다. 김군의 생각에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이 분실물의 주인의 의도대로 되고 있었으니까. 모든 &amp;lsquo;작전&amp;rsquo;은 각 평행세계의 운명은 물론 모든 우주를 도미노처럼 넘어트릴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바늘 위에 세워진 바늘처럼 위태로웠다. 세계의 기반이 초끈이론이라면, 거의 모든 이론은 다음 순간 끈들이 풀려버리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lt;br&gt;&#10;다음 사진을 봤을 때 김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사체가 김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군은 사진기를 꼬나보고 있었고, 장소는 김군 자신의 방이었다. 김군은 혹시 사진이 더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그 다음 사진은 김군의 가슴에 칼이 박혀 있는 사진, 다음은 쓰러지는 사진, 다음은 피를 흘리는 사진, 다음은 눈동자가 풀리는 사진, 다음은 피가 말라붙은 사진, 다음은 몸이 부푸는 사진, 다음은 구더기가 꼬이는 사진, 다음은… 김군은 마지막 사진에서 뼈가 되다 못해 완전히 삭아 황폐해진 집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lt;br&gt;&#10;김군은 이번 건을 조정국에 별건으로 넘기기로 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로봇청소기가 되었다</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1%9C%EB%B4%87%EC%B2%AD%EC%86%8C%EA%B8%B0%EA%B0%80-%EB%90%98%EC%97%88%EB%8B%A4/</link><pubDate>Sat, 07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1%9C%EB%B4%87%EC%B2%AD%EC%86%8C%EA%B8%B0%EA%B0%80-%EB%90%98%EC%97%88%EB%8B%A4/</guid><description>&lt;p&gt;아진은 죄를 짓고 로봇청소기가 되었다.&lt;br&gt;&#10;아진이 유폐 행성 알토에서 처음 만난 친구인 키위는 아진을 위로하며 로봇청소기 정도면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lt;br&gt;&#10;&amp;ldquo;우선은,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게 제일 크지. 공기청정기나 전자렌지 같은 게 되어보라고. 답답해서 어쩔 거야?&amp;rdquo;&lt;br&gt;&#10;아진은 며칠 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음성출력기를 달고 난 뒤에야 겨우 키위에게 대꾸할 수 있었다.&lt;br&gt;&#10;&amp;ldquo;하지만 빌어먹을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 나중에 돈 벌어서 달면 되지.&amp;rdquo;&lt;br&gt;&#10;&amp;ldquo;자네도 돈 벌어서 단 건가?&amp;rdquo;&lt;br&gt;&#10;&amp;ldquo;맞아.&amp;rdquo;&lt;br&gt;&#10;키위는 특별히 &amp;lsquo;무언가&amp;rsquo;라고 부르기 힘든 기계였다.&lt;br&gt;&#10;동그란 동체에 두 개의 다리가 달려 있었고, 정면에는 분명 발칸포로 보이는 포구도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키위로 보여서 그렇게 불렸지만, 원래 무슨 기계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lt;br&gt;&#10;&amp;ldquo;난 여기 왔을 때 컴퓨터였어.&amp;rdquo;&lt;br&gt;&#10;&amp;ldquo;컴퓨터?&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어떻게 돈을 벌지?&amp;rdquo;&lt;br&gt;&#10;아진은 로봇청소기인 자신에 대해 늘상 투덜거렸다. 하지만 키위의 말대로 일하기 좋은 몸인 것은 사실이었다.&lt;br&gt;&#10;둥글고 넙적한 몸체에 무언가를 얹으면 물건을 배달할 수 있는데다 속도도 제법 나온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완만한 경사 정도는 이동할 수 있어서, 유폐 행성에 제대로 정착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쯤에는 &amp;lsquo;여기서 로봇청소기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amp;rsquo; 하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쑥 내밀어지곤 했다.&lt;br&gt;&#10;키위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컴퓨터들은 주로 계산 외주를 맞지.&amp;rdquo;&lt;br&gt;&#10;&amp;ldquo;뭐야, 썩 괜찮은데? 그걸로 돈 벌어서 나중에 팔다리 하나씩 붙이고. 자네처럼 하면 되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하지만 문제는 알토 같은 유폐 행성에 맞겨지는 일감은 죄다 싸구려인데다, 컴퓨터가 너무 많아. 유폐 행성에 직접적으로 돌아가는 경제 생활을 해야 크레딧 벌기가 수월한데, 그런 식으로 돈을 버는 건 인내심이 필요하지.&amp;rdquo;&lt;br&gt;&#10;&amp;ldquo;자넨 여기 몇 년이나 있었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230년.&amp;rdquo;&lt;br&gt;&#10;&amp;ldquo;저런. 물어봐서 미안하군.&amp;rdquo;&lt;br&gt;&#10;&amp;ldquo;미안할 것 까지야. 아직 300년 남았어.&amp;rdquo;&lt;br&gt;&#10;키위 정도면 알토에서 잔뼈가 굵은 로봇인데다, &amp;lsquo;치안조정부 3팀 팀장&amp;rsquo;이라는 그럴듯한 직함도 있었다.&lt;br&gt;&#10;&amp;ldquo;공식 직함인가?&amp;rdquo;&lt;br&gt;&#10;&amp;ldquo;&amp;lsquo;공식?&amp;rsquo; 그건 아니야. 폐허의 주인인 잡동사니 칸다가 나한테 일을 맡긴 셈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칸다?&amp;rdquo;&lt;br&gt;&#10;&amp;ldquo;1천년 동안 이 땅에 있었던 장기복역수지.&amp;rdquo;&lt;br&gt;&#10;&amp;ldquo;이런.&amp;rdquo;&lt;br&gt;&#10;&amp;ldquo;칸다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몇 백년 단위 도시 재생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 일들을 벌이고 있는 걸 보면… 다들 예측하기론 아마 비슷한 시간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더군. 괜찮으면 나중에 인사를 시켜주지. 좋은 일을 소개 받을지도 몰라.&amp;rdquo;&lt;br&gt;&#10;&amp;ldquo;고맙군. 그런데 흠, &amp;lsquo;위&amp;rsquo;에선 신경쓰지 않나?&amp;rdquo;&lt;br&gt;&#10;로봇청소기인 아진은 별다른 동작을 할 수 없었지만, 키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lt;br&gt;&#10;하늘에는 교도선 한 척이 느릿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만들다만 것 같은 정크머신들과 공산품임이 분명한 원시적인 구조의 고대 기계들과 달리 유선형의 제대로 된 기계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lt;br&gt;&#10;이 행성의 모두가 모두가 저 배를 타고 떠나는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lt;br&gt;&#10;키위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교도관들은 거의 손을 대는 일이 없어. 몇 가지 예외 사례를 제외하면 장기복역수들이 만드는 질서를 두고보고만 있지. 장기복역수들은 모범수가 되고 싶어하거든.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교도관들은 힘 있는 장기복역수들에게 몰래 접근해서 형량을 줄여주는 제안을 해준다나 봐.&amp;rdquo;&lt;br&gt;&#10;&amp;ldquo;예외 사례는 뭔데?&amp;rdquo;&lt;br&gt;&#10;&amp;ldquo;그리 많지는 않은데, 교도관들이 불편해할만한 과학 기술을 추구하면 관심을 좀 받겠지. 하지만 그리 걱정할 건 없어. 희토류는 교도관들한테 넘겨야하는 불법 자원인데, 이게 장기복역수들이 교도관들한테 잘 보이려고 비싸게 사들이거든. 그걸로 뭘 해보겠단 놈들 보다는 그냥 넘겨주고 좋은 몸으로 개조하길 바라는 친구들이 많지.&amp;rdquo;&lt;br&gt;&#10;&amp;ldquo;관심이 가는 걸.&amp;rdquo;&lt;br&gt;&#10;&amp;ldquo;자네도 여기가 살만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amp;rdquo;&lt;br&gt;&#10;아진이 키위에게 속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연결하는 자</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B0%EA%B2%B0%ED%95%98%EB%8A%94-%EC%9E%90/</link><pubDate>Fri, 06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B0%EA%B2%B0%ED%95%98%EB%8A%94-%EC%9E%90/</guid><description>&lt;p&gt;그것은 자신이 언제 스스로 의식을 가지기 시작해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것에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태초의 바다와 함께 태어났다고 믿었고, 실제로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대양의 왕으로 군림하였다.&lt;br&gt;&#10;그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처함을 느낀 것은, 자신을 가로막는 &amp;lsquo;지표&amp;rsquo;가 나타났을 때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막아서는 무언가를 본 적이 없었던 그것은 황망하였다. 그 지표를 타고 올라가자 건조하고 삭막한 &amp;lsquo;허공&amp;rsquo;이 나타났고, 놀랍게도 지표는 허공에 노출되어 있었다.&lt;br&gt;&#10;그것은 당연히 그곳이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생각했다.&lt;br&gt;&#10;놀라운 사건이었지만 드넓은 대양에서 일부에 불과했고 그것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에는.&lt;br&gt;&#10;하지만 그것이 조작할 수 없는 대양의 아래, 심해 깊은 곳에서, 지각은 움직이고 있었고 내재된 열들을 뿜어냈고, 약동하는 대지는 솟아오르기 시작했다.&lt;br&gt;&#10;그것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lt;br&gt;&#10;세상이 뒤바뀌고 있었다.&lt;br&gt;&#10;바다가 좁아지고, 얕아지고 있었다.&lt;br&gt;&#10;하지만 그것은 잠시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불안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lt;br&gt;&#10;마른 땅이 세상의 중심에 놓이자, 먼 바다의 친척들이 비늘을 갈라지게 만들고 시커멓게 태우는 태양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lt;br&gt;&#10;오래전에 적응할 능력을 잃은 그것은 먼 바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lt;br&gt;&#10;&amp;lsquo;저건 허튼 짓이야. 모두 말라 비틀어지고 있잖아.&amp;rsquo;&lt;br&gt;&#10;생을 버리는 미련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lt;br&gt;&#10;하지만 붉은 여왕을 뒤쫓는 진화로의 의지를 불태우는 최초의 탐험가들은 그것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lt;br&gt;&#10;&amp;lsquo;그럼 도전해보라지.&amp;rsquo;&lt;br&gt;&#10;그것은 가파른 산맥을 움켜쥐어 무너트려 길을 닦고, 먼 친척들이 익어갈 때면 다리를 휘저어 바닷물을 밀어 적셨다.&lt;br&gt;&#10;그것에게는 소일거리에 불과했고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lt;br&gt;&#10;하지만 옛 친척들이 얕은 바다와 지표를 오가고, 뻘 아래에서 잠들고, 이내 그곳에서 새끼를 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지모의 사냥</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7%80%EB%AA%A8%EC%9D%98-%EC%82%AC%EB%83%A5/</link><pubDate>Thu, 05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7%80%EB%AA%A8%EC%9D%98-%EC%82%AC%EB%83%A5/</guid><description>&lt;p&gt;&amp;ldquo;도련님, 편지가 왔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누구에게서?&amp;rdquo;&lt;br&gt;&#10;&amp;ldquo;익명입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익명이라고.&amp;rdquo;&lt;br&gt;&#10;지모는 자신에게 익명으로 수신을 보낼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다.&lt;br&gt;&#10;&amp;ldquo;한 번 보지.&amp;rdquo;&lt;br&gt;&#10;그 말에 하인 디가 지모에게 편지지를 건넸다.&lt;br&gt;&#10;지모는 앞뒤를 훑어보았다.&lt;br&gt;&#10;밀봉 되어 있지만 특별할 것 없는 매끈하다.&lt;br&gt;&#10;&amp;ldquo;이게 전부인가?&amp;rdquo;&lt;br&gt;&#10;&amp;ldquo;예.&amp;rdquo;&lt;br&gt;&#10;&amp;ldquo;누가 전해왔는지는 못 봤고?&amp;rdquo;&lt;br&gt;&#10;&amp;ldquo;문틀에 꽂혀 있기에.&amp;rdquo;&lt;br&gt;&#10;&amp;ldquo;자네 건 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설마요. 전 편지 올 곳이 없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 나라고 딱히 올 곳이 있는 건 아닌데.&amp;rdquo;&lt;br&gt;&#10;&amp;ldquo;오디테 경일지도요. 그분은 이런 장난 좋아하시지 않습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아무튼 확인해보지. 들어가서 쉬게.&amp;rdquo;&lt;br&gt;&#10;디가 돌아가자 지모는 황동 편지칼로 편지지를 뜯었다.&lt;br&gt;&#10;안에는 메모 하나만이 들어있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증오의 코</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6%9D%EC%98%A4%EC%9D%98-%EC%BD%94/</link><pubDate>Wed, 04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6%9D%EC%98%A4%EC%9D%98-%EC%BD%94/</guid><description>&lt;p&gt;&amp;ldquo;&amp;lsquo;오를라&amp;rsquo;들이 도시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있어.&amp;rdquo;&lt;br&gt;&#10;남자의 말에 여자가 반문한다.&lt;br&gt;&#10;&amp;ldquo;그게 진짜야?&amp;rdquo;&lt;br&gt;&#10;&amp;ldquo;진짜냐고 물어도… 모르지 우린.&amp;rdquo;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amp;ldquo;오를라라고. 시각 왜곡 피부를 체내 전지와 결합해 영구적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이렇게 큰 도시에서 옆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당장 우리 뒤에 있을지도 모르지.&amp;rdquo;&lt;br&gt;&#10;&amp;ldquo;왜 왔다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얼마전에…&amp;rdquo; 사내는 단 둘만인 바인데도 눈치를 살핀다. &amp;ldquo;총독 각하의 애첩이 죽었잖나?&amp;rdquo;&lt;br&gt;&#10;&amp;ldquo;아, 그 고추 큰 흰둥이? 맨날 아랫도리 두툼하게 드러내고 다니고. 근데 걔가 뭐 대단한 애였나? 언더월드 출신 랩퍼였다고 들었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아, 걔가 중요한 건 아니야. 중요한 건 걔한테 총독이 오를라를 두 놈이나 붙여놨었더군.&amp;rdquo;&lt;br&gt;&#10;&amp;ldquo;미친. …아니지. 그런데 그 흰둥이는 왜 죽었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문제인 거지. 그 흰둥이를 지키던 오를라 두 놈도 죽어서 발견 된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거짓말.&amp;rdquo;&lt;br&gt;&#10;&amp;ldquo;이 두 눈으로 직접 봤지.&amp;rdquo;&lt;br&gt;&#10;&amp;ldquo;세상에. 머리에 남아있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럴리가. 관리감독관들이 내 머리에서 지워버렸지. 하지만 그걸 봤던 당시의 충격은 메타 데이터로 남아있어.&amp;rdquo;&lt;br&gt;&#10;&amp;ldquo;위험 한 거 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아냐. 놈들이 깜빡했을 뿐이지. 나는 나름 연구 인력이라고. 언더 애들마냥 북북 지우면 곤란하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한 번 보자고.&amp;rdquo;&lt;br&gt;&#10;여자가 남자의 브릿지를 당겨 자기 브릿지에 꽂아넣는다.&lt;br&gt;&#10;&amp;ldquo;오… 굉장한데. 도대체 오를라들은 어떻게 생겼었기에…&amp;rdquo;&lt;br&gt;&#10;&amp;ldquo;아무튼 오를라의 진짜 생김새는 기밀 중의 기물이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데 오를라가 어떻게 죽지? 폭탄 같은 걸 터트린 건가?&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야. 원시적인 도구였어. 내 기억에 생긴 모습 자체가 남아있진 않지만… 내가 볼 때는 분명 찢어지고 짓뭉게졌다는 그런 인상이 남아 있거든.&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남자는 무심하게 연결된 브릿지가 은근히 불쾌했는지 뽑아낸다.&lt;br&gt;&#10;&amp;ldquo;메타 데이터를 분석해봤더니 붉은색으로 찰흙 덩어리를 엉켜둔 것과 비슷한 인상이더군. 물론 훨씬 더… 감정적 동요가 덜하지만.&amp;rdquo;&lt;br&gt;&#10;&amp;ldquo;흥미로운걸. 그걸 조사했단 말이야? 아무튼 오를라들도 사실은 살덩이들이란 말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아마 그렇겠지? 게다가…&amp;rdquo;&lt;br&gt;&#10;&amp;ldquo;게다가?&amp;rdquo;&lt;br&gt;&#10;사내는 고민에 빠진 것 같다.&lt;br&gt;&#10;&amp;ldquo;이것 참. 나 오늘 위험한 이야기를 좀 많이 하는 것 같은데.&amp;rdquo;&lt;br&gt;&#10;&amp;ldquo;뭐 어때. 자네랑 나 뿐인데.&amp;rdquo;&lt;br&gt;&#10;&amp;ldquo;바텐더가 있잖은가?&amp;rdquo;&lt;br&gt;&#10;&amp;ldquo;깡통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깡통?&amp;rdquo;&lt;br&gt;&#10;&amp;ldquo;약인공지능. 마인드가 없지.&amp;rdquo;&lt;br&gt;&#10;&amp;ldquo;아아. 저장장치는?&amp;rdquo;&lt;br&gt;&#10;&amp;ldquo;나 &amp;lsquo;찌짐이&amp;rsquo; 있어. 나갈 때 살짝 손만 봐주면 돼.&amp;rdquo;&lt;br&gt;&#10;여자는 주머니에서 매끈하게 생긴, 하지만 치명적으로 보이는 두 개의 앞니가 튀어나온 단말기를 꺼내 보여준다.&lt;br&gt;&#10;&amp;ldquo;그런 걸 들고다니나?&amp;rdquo;&lt;br&gt;&#10;&amp;ldquo;뭐 어때? 이렇게 흔적 지우고 다니면서 총독 끄나풀들이 안 붙는 게 중요하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 맞는 말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게다가 오를라가 둘이나 죽어서, 다른 오를라들을 도시로 들였다니. …아무튼 더 아는 건 없나? 방금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amp;rdquo;&lt;br&gt;&#10;남자는 잔을 들고 잠시 침묵한다.&lt;br&gt;&#10;&amp;ldquo;음, 글쎄.&amp;rdquo; 자신이 술에 취해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다. &amp;ldquo;…아. 아무튼 그놈의 정체에 대한 웹의 소문 정도 기억나는군.&amp;rdquo;&lt;br&gt;&#10;&amp;ldquo;그놈?&amp;rdquo;&lt;br&gt;&#10;&amp;ldquo;총독 애첩과 오를라 둘을 죽인 놈 말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아아, 그렇지. 도대체 놈은 뭔가? 오를라를 죽일 수 있다고? 제국 내에 그런 능력을 가진 놈들은… 거의 없을텐데. 아슈트리에의 기사들? 아니면 오를라들을 컨트롤 하는 데몬? 연합의 단죄자들?&amp;rdquo;&lt;br&gt;&#10;&amp;ldquo;없지. 그네들도 오를라와 일 대 일로 비교하긴 아쉬워. 오를라는 가시광은 물론이고 자외선 적외선 싹다 차단하면서 열차폐까지 완벽하니까. 연합에선 정말 존재하는지 조차 의문이라지 않나? 제국의 특수공작부대를 그렇게 부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지만 제국이 반란군 없이 유지되는 이유가 다 오를라 덕 아니겠나? 보이지 않는 눈들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지 않게 일을 처리하니까.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놈은? 놈은 어떻게 오를라 같은 걸 죽인 거지?&amp;rdquo;&lt;br&gt;&#10;&amp;ldquo;소문이야. 소문이지만… &amp;lsquo;되찾은 오를라&amp;rsquo;라고 불린다더군.&amp;rdquo;&lt;br&gt;&#10;&amp;ldquo;무슨 말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오를라가 본래 인간이란 이야긴 들어봤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단 말은 하던데. 하지만 생긴걸 모르니 알 수가 있나?&amp;rdquo;&lt;br&gt;&#10;&amp;ldquo;아무튼 온갖 개조와 투약으로 뇌를 박살을 내놓는데도, 이론적으로 의식이 남아있거나 되돌아올 가능성이 존재한다더군. 오를라는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럼 그 기본적인 구조까지 바꿀 수는 없단 거야. 아직까지 존재했다고 알려진 적은 없지만, 만약 존재하게 된다면 자신을 오를라로 만든 제국과 오를라 그 자체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놈이 오를라의 숙적이 될 거라고 말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흥미롭군. 하지만 그건 이유는 설명해도 방법을 설명 못하지 않나?&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amp;rdquo;&lt;br&gt;&#10;남자는 또 아까처럼 입을 닫는다.&lt;br&gt;&#10;고민이 많아지는 질문인듯 하다.&lt;br&gt;&#10;느닷없이, 남자가 코를 킁킁 거린다.&lt;br&gt;&#10;&amp;ldquo;왜 그러나?&amp;rdquo;&lt;br&gt;&#10;&amp;ldquo;그 저…&amp;rdquo;&lt;br&gt;&#10;남자는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lt;br&gt;&#10;&amp;ldquo;무슨 일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무슨… 향기가 나지 않나?&amp;rdquo;&lt;br&gt;&#10;&amp;ldquo;뭐? 나는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냄새가 아니라 향기야. 분명 맡으면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고.&amp;rdquo;&lt;br&gt;&#10;&amp;ldquo;술에 절어서 코가 어떻게 됐나보군. 그 향기가 뭐 어떤데 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이 향기 분명…&amp;rdquo;&lt;br&gt;&#10;&amp;ldquo;분명?&amp;rdquo;&lt;br&gt;&#10;남자가 긴장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lt;br&gt;&#10;남자는 텅빈 바 내부를 황급히 이리저리 돌아본다.&lt;br&gt;&#10;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듯 하다.&lt;br&gt;&#10;&amp;ldquo;오를라에게서 나던 향기야.&amp;rdquo;&lt;br&gt;&#10;&amp;ldquo;오를라의 향기?&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 …술을 좀 많이 마셨는지도 모르겠군. 이,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amp;rdquo;&lt;br&gt;&#10;&amp;ldquo;왜 말을 하다말아?&amp;rdquo;&lt;br&gt;&#10;여자가 남자의 손목을 붙잡는다.&lt;br&gt;&#10;남자가 거칠게 떼어낸다.&lt;br&gt;&#10;여자는 놀란 눈이었다가 다시 사근사근하게 군다.&lt;br&gt;&#10;&amp;ldquo;알겠어. 갈 거면 가. 하지만 괜찮으면 내가 좋은 술 하나 살까 하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음…&amp;rdquo;&lt;br&gt;&#10;남자는 다소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자리에 앉는다.&lt;br&gt;&#10;여자가 바텐더를 부르고 술잔이 채워진다.&lt;br&gt;&#10;여자가 말한다.&lt;br&gt;&#10;&amp;ldquo;그래서, 오를라에게서 향기가 난다고?&amp;rdquo;&lt;br&gt;&#10;&amp;ldquo;&amp;lsquo;되찾은 오를라&amp;rsquo;는 이론적으로만 존재하지. 그런데 오를라끼리도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는 문제가 있고.&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서?&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데 이 이론 자체는 엄청 오래 되었단 말이지. 심지어 오를라라는 게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해. 생체 전지는 독특한 구조 화합물로 만들어지는데 이걸 만들때 다른 호르몬이 독특한 &amp;lsquo;향&amp;rsquo;을 만들어 낸다는군. 그래서 첫 오를라 연구에 참여했던 유전학자 하나가 자신에게 의뢰 오는 크리스퍼 차일드의 유전 정보에 그 향을 맡을 수 있도록 조작을 했다고 해.&amp;rdquo;&lt;br&gt;&#10;&amp;ldquo;아아. 그럼 그 크리스퍼 차일드의 유전자는 우리 제국의 유전자 풀에 잠겨들었고?&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아주아주아주… 낮은 확률로, 그 크리스퍼 차일드의 자손 중에 누군가 오를라로 변하게 되면…&amp;rdquo;&lt;br&gt;&#10;&amp;ldquo;예의 오를라 사냥꾼, 이른바 &amp;lsquo;증오의 코&amp;rsquo;가 되는 거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정말이라면, 오를라는 그 자체로 자신의 숙적을 타고 난 셈이군 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맞아. 이렇게 단단한 제국도 사실 그 기반이 완벽하진 않다는 말이지.&amp;rdquo;&lt;br&gt;&#10;여자는 술잔에 입을 가져갔다가, 나긋하게 말한다.&lt;br&gt;&#10;&amp;ldquo;그런데 그 향기, 아직도 나나?&amp;rdquo;&lt;br&gt;&#10;&amp;ldquo;응? 그런데?&amp;rdquo;&lt;br&gt;&#10;여자가 웃는다.&lt;br&gt;&#10;&amp;ldquo;그래. 너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거든. …붙잡아라.&amp;rdquo;&lt;br&gt;&#10;그 말에 남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lt;br&gt;&#10;보이지 않지만 꽈악하고 졸리는 몸체.&lt;br&gt;&#10;남자가 벌벌 떨며 비명을 지른다.&lt;br&gt;&#10;&amp;ldquo;컥! 오를라…!&amp;rdquo;&lt;br&gt;&#10;&amp;ldquo;아, 빌어먹을 이 &amp;lsquo;향기&amp;rsquo;라는 건 데이터에 남질 않는단 말이야. 인간 후각이란 게 대단할 게 없으니 정보값으로 인상적으로 남지 않는 모양이지. 그래서 나 같은 몸이 일일이 너 같은 걸 찾아다녀야 한단 말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너, 넌 도대체…?&amp;rdquo;&lt;br&gt;&#10;&amp;ldquo;아, 니 친구를 찾고 있나? 유감이군.&amp;rdquo;&lt;br&gt;&#10;여자의 머리 뚜껑이 열린다.&lt;br&gt;&#10;안에 또아리틀고 있던, 무족영원을 닮은 민둥하고 길쭉한 무언가가 몸을 들어올린다.&lt;br&gt;&#10;남자가 눈을 부릅뜬다.&lt;br&gt;&#10;&amp;ldquo;…데몬!&amp;rdquo;&lt;br&gt;&#10;&amp;ldquo;하, 몸좀 옮겨 다니기로서니, 사람을 악마라고 부르고 다니니.&amp;rdquo;&lt;br&gt;&#10;데몬은 여자 머리 안에서 미끄러져나와 남자의 머리에 맞붙는다.&lt;br&gt;&#10;데몬에 붙어있던 작은 촉수들이 칼날로 형상변환하며 남자의 머리를 외과수술해서 산채로 따버린다.&lt;br&gt;&#10;&amp;ldquo;친구처럼 조사에 협조 좀 하라고.&amp;rdquo;&lt;br&gt;&#10;남자의 비명이 터져나오지만, 그리 길지는 않다.&lt;br&gt;&#10;남자는 산채로 뇌를 해부당한다.&lt;br&gt;&#10;남자는 의식을 잃은 듯 보이다가, 데몬이 천천히 머리통 안에 자리를 잡자 눈동자게 제 빛을 찾는다.&lt;br&gt;&#10;남자는 이마에 흐르는 피와 뇌수를 가볍게 닦아낸다.&lt;br&gt;&#10;&amp;ldquo;별 건 없군. 다 말했어. 하지만 &amp;lsquo;냄새&amp;rsquo;를 맡았다는 건 돌연변이 유전자가 퍼지기 시작했단 말이군. 오를라, 이놈의 데이터를 검색해서 관련된 유전적 지인들을 모두 찾아 죽여라. 나는 이것도 처리하고 저 깡통도 처리하고… 오를라?&amp;rdquo;&lt;br&gt;&#10;나는 깡통이라고 불리는 바텐더 로봇을 밀치고 바를 넘는다.&lt;br&gt;&#10;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지 느껴지지도 않지만, 진득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오를라에게 달려든다.&lt;br&gt;&#10;반면에, 놈은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lt;br&gt;&#10;놈에겐 코가 없으니까.&lt;br&gt;&#10;오를라를 박살 내는데는 3초면 충분하다.&lt;br&gt;&#10;붉은 찰흙처럼 금새 비참해진다.&lt;br&gt;&#10;데몬은 엉뚱한 곳을 바라본다.&lt;br&gt;&#10;데몬은 머리통을 슬쩍 따고 꽁무니를 뺄 준비를 한다.&lt;br&gt;&#10;&amp;ldquo;넌… 너는… 오를라다. 명령을 들어야 해.&amp;rdquo;&lt;br&gt;&#10;그 말은 틀렸다.&lt;br&gt;&#10;나는 오를라가 아니다.&lt;br&gt;&#10;나는 되찾은 오를라, 오를라 사냥꾼, 증오의 코.&lt;br&gt;&#10;오를라 사냥만으로 내 존재를 증명한다.&lt;br&gt;&#10;기회를 엿보던 데몬이 남자의 머리에서 튕겨져 나간다.&lt;br&gt;&#10;나는 그대로 붙잡아 반으로 찢어죽인다.&lt;br&gt;&#10;데몬은 다소 꿈틀거린다.&lt;br&gt;&#10;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완전히 뭉게둔다.&lt;br&gt;&#10;데몬에게서는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는다.&lt;br&gt;&#10;풋풋한 악취.&lt;br&gt;&#10;더이상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lt;br&gt;&#10;체내 기관들이 사냥으로 잠시 지저분해진 표피를 정리한다.&lt;br&gt;&#10;나는 비존재를 수복한다.&lt;br&gt;&#10;바를 나선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낭랑 가죽</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2%AD%EB%9E%91-%EA%B0%80%EC%A3%BD/</link><pubDate>Tue, 03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2%AD%EB%9E%91-%EA%B0%80%EC%A3%BD/</guid><description>&lt;p&gt;코가 바닥에 닿을듯, 바짝 고개를 숙인 여자가 눈 덮인 산을 오른다.&lt;br&gt;&#10;오르는 길목도 짐승들이 오르는 길인지라, 행동이 궁금하여 가까운 가지에 앉았다.&lt;br&gt;&#10;&amp;ldquo;뭐하는 거요?&amp;rdquo;&lt;br&gt;&#10;&amp;ldquo;뭐냐 너는.&amp;rdquo;&lt;br&gt;&#10;여자는 고개도 들지 않고 눈알만 씰룩 올려 말했다.&lt;br&gt;&#10;&amp;ldquo;새님이로구나. 난 바쁘다. 벌레나 잡으러 가거라.&amp;rdquo;&lt;br&gt;&#10;&amp;ldquo;오늘은 이미 배를 모두 채웠구려.&amp;rdquo;&lt;br&gt;&#10;&amp;ldquo;에이, 심심한게로군.&amp;rdquo;&lt;br&gt;&#10;여자는 입을 비죽내밀고 제 할일을 계속한다.&lt;br&gt;&#10;&amp;ldquo;심마니요?&amp;rdquo;&lt;br&gt;&#10;&amp;ldquo;내 행낭을 봐라.&amp;rdquo;&lt;br&gt;&#10;&amp;ldquo;달랑거리는군. 텅 비었어. 풀냄새도 안나구.&amp;rdquo;&lt;br&gt;&#10;나는 의아해졌다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그럼 땅꾼이오?&amp;rdquo;&lt;br&gt;&#10;&amp;ldquo;내 행낭을 보래도.&amp;rdquo;&lt;br&gt;&#10;&amp;ldquo;비늘 냄새도 안나지만, 종일 허탕을 쳤을지도 모르잖수.&amp;rdquo;&lt;br&gt;&#10;&amp;ldquo;흠…&amp;rdquo;&lt;br&gt;&#10;나는 여자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lt;br&gt;&#10;&amp;ldquo;혹시 새잡이요?&amp;rdquo;&lt;br&gt;&#10;이제야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lt;br&gt;&#10;&amp;ldquo;허어, 왜 그리 생각하느냐?&amp;rdquo;&lt;br&gt;&#10;&amp;ldquo;우리 새들은 호기심이 많지. 그러고 고개를 숙이고 암것도 안한다, 관심가지지 마러라, 이러면 또 관심이 가지. 새잡이들이 그런 수를 쓴다고 또 어디서 들었수.&amp;rdquo;&lt;br&gt;&#10;&amp;ldquo;넌 머리가 좋구나?&amp;rdquo;&lt;br&gt;&#10;&amp;ldquo;칭찬 고맙구려.&amp;rdquo;&lt;br&gt;&#10;여자는 가로저었다.&lt;br&gt;&#10;&amp;ldquo;아니, 아무튼 나는 새잡이도 아니다. 새잡이라면 내 허리에 칼이 아니라 활을 차고 다니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사냥꾼이구려. 아니지, 사냥꾼인데 왜 활은 차지 않는담.&amp;rdquo;&lt;br&gt;&#10;&amp;ldquo;사냥꾼은 맞다. 활로 잡을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amp;rdquo;&lt;br&gt;&#10;&amp;ldquo;어떤 사냥감이 사냥꾼을 보고 도망가지 않는단 말이요?&amp;rdquo;&lt;br&gt;&#10;&amp;ldquo;간혹 멧돼지가 달려들고 곰이나 호랑이는 여간하면 달려들지 않더냐?&lt;br&gt;&#10;&amp;ldquo;그럼 잡으려는 게 곰이나 호랑이요? 그럼 창을 들지 그러우.&amp;rdquo;&lt;br&gt;&#10;&amp;ldquo;곰과 호랑이는 아니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이지.&amp;rdquo;&lt;br&gt;&#10;여자는 다시 바닥에 코를 붙였다.&lt;br&gt;&#10;또 말이 없다.&lt;br&gt;&#10;&amp;ldquo;도대체 뭘 쫓는 거요?&amp;rdquo;&lt;br&gt;&#10;&amp;ldquo;내 숙적의 발자국.&amp;rdquo;&lt;br&gt;&#10;&amp;ldquo;오…&amp;rdquo;&lt;br&gt;&#10;여자는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lt;br&gt;&#10;나는 앉고 있던 가지를 옮긴다.&lt;br&gt;&#10;&amp;ldquo;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amp;rdquo;&lt;br&gt;&#10;&amp;ldquo;사냥을 갔다가 기이한 괴물을 찾았다. 사람 같기도 허고, 늑대 같기도 했지. 굉장히 사납더군.&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서? 어찌했수?&amp;rdquo;&lt;br&gt;&#10;&amp;ldquo;죽였다. 털이 실해 보여서.&amp;rdquo;&lt;br&gt;&#10;&amp;ldquo;값은 좀 받았나?&amp;rdquo;&lt;br&gt;&#10;여자는 콧바람을 냈다.&lt;br&gt;&#10;&amp;ldquo;봇짐장수한테 말하니 한푼 주긴 커녕 되려 액운을 떼줄테니 돈을 내놓으라더군. 그건 낭랑(郎狼) 가죽이라고. 자기는 서녘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가지고만 있어도 원념으로 저주를 받는다더군. 그래서 자기가 잘 아는 큰 스님한테 가져다줄테니 돈을 내놓으라고 구슬리는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허어. 사기꾼이로구려.&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 장사치들은 다 그렇지. 그래서 놈 코피를 내주었지. 그제야 줄행랑을 치더군.&amp;rdquo;&lt;br&gt;&#10;여자는 하하 웃었다가, 다시 표정이 굳었다.&lt;br&gt;&#10;&amp;ldquo;왜 그러시우?&amp;rdquo;&lt;br&gt;&#10;&amp;ldquo;근데 봇짐장수 말이 사실이긴 하더군.&amp;rdquo;&lt;br&gt;&#10;&amp;ldquo;액운이 붙었소?&amp;rdquo;&lt;br&gt;&#10;&amp;ldquo;정확히는 액운이라기 보단… 놈도 짐승이라지만 짝이 있었던 모양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낭랑의 짝지 말이우?&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여자는 울분에 찬듯 이를 간다.&lt;br&gt;&#10;커다란 송곳니가 드러난다.&lt;br&gt;&#10;&amp;ldquo;아마 낭랑 가죽을 가지고 있었던 게 탈이었나. 아마 그걸 보고 집을 찾아온 모양이지. 일어나보니 낭랑 가죽도 사라졌고.&amp;rdquo;&lt;br&gt;&#10;&amp;ldquo;놈이 찾아온 거요?&amp;rdquo;&lt;br&gt;&#10;&amp;ldquo;찾아오다마다.&amp;rdquo;&lt;br&gt;&#10;여자는 주먹을 불끈 쥔다.&lt;br&gt;&#10;&amp;ldquo;놈은 내 지아비를 찢어죽였으니, 내 어찌 복수하지 않고 숨 쉬고 살랴?&amp;rdquo;&lt;br&gt;&#10;여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가 앉은 나무를 친다.&lt;br&gt;&#10;나는 날고, 여자는 마른 나무에서 떨어지는 눈을 다소 뒤집어 쓴다.&lt;br&gt;&#10;&amp;ldquo;당신은 어디에 있었기에?&amp;rdquo;&lt;br&gt;&#10;&amp;ldquo;나는 자고 있었지.&amp;rdquo;&lt;br&gt;&#10;&amp;ldquo;바로 옆에서 말이우?&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모르고 있었수?&amp;rdquo;&lt;br&gt;&#10;&amp;ldquo;몰랐지. 놈이 노린 것이 그것일테니.&amp;rdquo;&lt;br&gt;&#10;여자는 회백색 머리털에서 눈을 툴툴 털어낸다.&lt;br&gt;&#10;&amp;ldquo;반쯤은 사람을 닮았으니 사람처럼 생각한게지. 너도 짝 잃은 슬픔을 겪어보라고.&amp;rdquo;&lt;br&gt;&#10;&amp;ldquo;이해가 되는구려.&amp;rdquo;&lt;br&gt;&#10;&amp;ldquo;이해? 너도 주제에 금수라고 금수편을 든단 말이냐?&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 그렇지 않수? 일을 먼저 저지른 건 그대고…&amp;rdquo;&lt;br&gt;&#10;&amp;ldquo;망할놈!&amp;rdquo;&lt;br&gt;&#10;여자가 돌을 집어 던진다.&lt;br&gt;&#10;아슬아슬하게 날개죽지 아래로 스친다.&lt;br&gt;&#10;나는 높이 난다.&lt;br&gt;&#10;여자는 씩씩거리다가 분이 풀린듯 다시 발자국을 찾기 시작한다.&lt;br&gt;&#10;나는 높은 풍경 위에서 산을 내려다본다.&lt;br&gt;&#10;여러 발자국들을 발견한다.&lt;br&gt;&#10;&amp;ldquo;그래서 이 산을 뒤지고 있는 거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 낭랑 발자국을 여기서 찾았으니, 놈은 분명 가까운 곳에 있다. 조만간 찾을 수 있겠지.&amp;rdquo;&lt;br&gt;&#10;나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lt;br&gt;&#10;다시 나뭇가지에 앉는다.&lt;br&gt;&#10;&amp;ldquo;혹여나…&amp;rdquo;&lt;br&gt;&#10;&amp;ldquo;왜?&amp;rdquo;&lt;br&gt;&#10;&amp;ldquo;뒤 좀 돌아볼 생각은 없수?&amp;rdquo;&lt;br&gt;&#10;&amp;ldquo;아서라. 이제 새놀음에 뺏길 시간은 없다. 훠이훠이.&amp;rdquo;&lt;br&gt;&#10;여자는 손사레를 치고 이제 네 발로 바닥을 짚는다.&lt;br&gt;&#10;이제 여자는 짐승처럼 보인다.&lt;br&gt;&#10;늑대 같기도, 인간 같기도한.&lt;br&gt;&#10;커다란 근육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수풀 사이로 전날 온 눈 위의 미세한 발자국을 찾는다.&lt;br&gt;&#10;그러다 큰 흔적을 발견한듯 여자는 고개를 넘어간다.&lt;br&gt;&#10;나는 여자 대신 뒤를 돌아본다.&lt;br&gt;&#10;여자가 네 발로 남긴 발자국들을.&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호텔 림보</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8%B8%ED%85%94-%EB%A6%BC%EB%B3%B4/</link><pubDate>Mon, 02 Mar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8%B8%ED%85%94-%EB%A6%BC%EB%B3%B4/</guid><description>&lt;p&gt;우주의 끝엔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lt;br&gt;&#10;이 구조물은 극도로 복잡한 태엽장치처럼 보이며, 매끈하게 회전하는 황금 반구와 그 내부를 드러내는 나머지 반구로 나뉘어 볼 수 있다.드러나는 반구 안으로 보이는 수 억 개의 톱니바퀴들은 반복되는 프랙탈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끝 없이 뿜어내는 빛과 열 때문에 일정 해상도 이상의 관측이 불가능했다. 우주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저 먼 과거에서 온 이들은 톱니바퀴와 톱니바퀴 사이로 구조물이 숨기고 있는 내밀한 무언가가 존재하리란 확신이 있었지만,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lt;br&gt;&#10;그 누구도 이 구조물보다 더 멀리가진 못했다.&lt;br&gt;&#10;일반적으로, 우주의 끝으로 가고 싶어하는 이들이 보고싶어 하는 것은 열죽음의 세계다.&lt;br&gt;&#10;완벽한 평형과 절대영도.&lt;br&gt;&#10;세상에 자신만이 남았다는 고독.&lt;br&gt;&#10;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주는 끝나고 자신만이 남았다는 도취를 느끼기 위해서인 것이다.&lt;br&gt;&#10;아무도 저 스스로 회전하는 빛과 열을 내는 구조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못한다.&lt;br&gt;&#10;그래서 어떤 이들은 구조물을 박살내기 위해 달려든다.&lt;br&gt;&#10;제로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제일 멍청한 놈들이지.&amp;rdquo;&lt;br&gt;&#10;그 말대로다.&lt;br&gt;&#10;그 구조물을 제대로 관측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다.&lt;br&gt;&#10;연역적인 논리로 따져봤을 때, 구조물이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 구조물은 직접적인 도전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lt;br&gt;&#10;구조물은 파괴되지 않는다.&lt;br&gt;&#10;초광속항행자들이 그네들이 응당 겪어야 하는 생략된 시간을, 구조물은 모두 인내하고 있었다.&lt;br&gt;&#10;그리고 여간 머리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면 며칠만 기다려도 구조물을 공전하고 있는 데브리띠와 인공 행성들, 그리고 가끔은 부나방처럼 그대로 화난 듯 들이박는 인내심을 잃은 초광속항행자들의 우주선이 구조물에게 들이박히는 걸 볼 수 있다.&lt;br&gt;&#10;구조물은 단단하다.&lt;br&gt;&#10;그래서 어떤 이들은 구조물과 시합을 한다.&lt;br&gt;&#10;사실 그 결과는 이 시점에선 알 수 없다.&lt;br&gt;&#10;하지만 계산을 잘 할 줄 안다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lt;br&gt;&#10;알포가 말했다.&lt;br&gt;&#10;&amp;ldquo;두 번째로 멍청한 놈들이죠.&amp;rdquo;&lt;br&gt;&#10;이미 구조물이 등장하는 &amp;lsquo;우주의 끝&amp;rsquo;에 도달한다면 얻을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이 우주의 끝에 도달하는 초광속항행자들은 큰 변수 없이 일정하며, 그들과 그들이 가져온 우주선 잔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 갈 수 있는 우주의 끝도 제한적이다. 자신들이 살아온 우주 가득히 빛나는 별들과 끝 없이 탐사 할 수 있을 것 같은 행성계는 더는 없는 것이다.&lt;br&gt;&#10;호텔 림보의 유명한 골드보드에도 그 수식이 적혀 있다. 복잡한 수학기호지만 해석하자면 이렇다.&lt;br&gt;&#10;&amp;lsquo;미련한 놈들아, 여기가 끝이다.&amp;rsquo;&lt;br&gt;&#10;그리고 번역자에 따라서 횟수가 다르긴 하지만 그 옆에는 해당 골드보드가 몇 번이나 반감기가 지나 방사선 붕괴로 흩어졌다가 다시 옮겨 적혔는지도 조각되어 있다.&lt;br&gt;&#10;구조물은 부술 수 없다.&lt;br&gt;&#10;구조물을 넘을 수 없다.&lt;br&gt;&#10;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다.&lt;br&gt;&#10;포기하는 것.&lt;br&gt;&#10;한계를 인정한 이들은 우주의 끝에 도달해 구조물의 안정적인 공전 궤도를 돌면서 여생을 어떻게 할지 가름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생을 마감한다. 이들은 고운 이들이다. 적어도 남한테 폐를 끼치진 않으니까.&lt;br&gt;&#10;하지만 어떤 이들은 우주의 끝에서 돌아가지도, 더 가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한다.&lt;br&gt;&#10;화가 쌓인다.&lt;br&gt;&#10;답답하다.&lt;br&gt;&#10;유흥을 즐기고 싶다.&lt;br&gt;&#10;젠장, 그런데 여긴 우주의 끝이다!&lt;br&gt;&#10;아무것도 없다!&lt;br&gt;&#10;아니, 사실 그렇지는 않다.&lt;br&gt;&#10;그런 놈들이 모여서 미적대는 곳이 우주의 끝에는 있었다.&lt;br&gt;&#10;호텔 림보였다.&lt;br&gt;&#10;거의 완벽하게 구성된 약인공지능, 그러니까 마인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계일 뿐인, 하지만 세계의 끝에서 가질 수 있는 저위차원 기술 과학에서는 마인드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지배인이 운영하는 호텔이 있었다.&lt;br&gt;&#10;내가 말한다.&lt;br&gt;&#10;&amp;ldquo;세 번째로 멍청한 놈들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 우린 멍청하지 않아.&amp;rdquo; 제로가 반박한다. &amp;ldquo;우린 몸을 던져 터지지도 않고, 자만에 빠져 목숨을 건 항행을 하지도 않지. 우린 살아남았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목표는 아니었을텐데.&amp;rdquo;&lt;br&gt;&#10;&amp;ldquo;어, 난 여기까지 온 걸로 충분해. 저건 &amp;lsquo;시계&amp;rsquo;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게 생각하나?&amp;rdquo;&lt;br&gt;&#10;&amp;ldquo;물론.&amp;rdquo;&lt;br&gt;&#10;관점의 차이였다.&lt;br&gt;&#10;이야기를 듣자하니 제로는 범죄자였는데, 그가 범한 범죄는 그 사회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며, 그는 그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lt;br&gt;&#10;그에게는 글자 그대로 천문학적인 단위의 수감 형벌이 내려졌다.&lt;br&gt;&#10;문제가 있다면 그 사회는 문명이 꽤 발달 되어 있었으면서 다소 고지식했다는 점이다.&lt;br&gt;&#10;제로는 강제로 초광속항행선을 타고 그가 받아야할 형벌만큼 쏘아졌다. 과거의 원시 우주로 쏘아져 대은하단의 회전을 우습게 보일 거대한 고리를 그린 뒤에야, 그는 이곳에 왔다.&lt;br&gt;&#10;구조물은 제로에게 자유의 근거였다.&lt;br&gt;&#10;&amp;ldquo;당신 같은 사람에겐 그렇겠죠.&amp;rdquo; 알포가 재반박했다. &amp;ldquo;그 사람들은 세상의 끝을 보라고 보냈는데, 환대해줄 호텔 지배인과 술친구들이 있을 줄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저게 시계가 아니면, 넌 뭐라고 생각하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냥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저건 &amp;lsquo;영구기관&amp;rsquo;이라고요.&amp;rdquo;&lt;br&gt;&#10;제로는 콧김을 뿜었다.&lt;br&gt;&#10;저위차원에서 초광속항해는 가능하지만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lt;br&gt;&#10;그렇게 알려져 있다.&lt;br&gt;&#10;&amp;ldquo;호텔의 골드보드 안 보여?&amp;rdquo;&lt;br&gt;&#10;&amp;ldquo;골드보드에도 관측하지 못한 내적 &amp;lsquo;신비&amp;rsquo;가 존재한다고 적혀 있죠.&amp;rdquo;&lt;br&gt;&#10;&amp;ldquo;친구, 봤어? 얘 방금 &amp;lsquo;신비&amp;rsquo;라고 했다. 과학자 어디갔나.&amp;rdquo;&lt;br&gt;&#10;&amp;ldquo;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과학입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지. 모르면 무식한 거지.&amp;rdquo;&lt;br&gt;&#10;나는 실소했다.&lt;br&gt;&#10;그리고 알포의 표정을 보고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lt;br&gt;&#10;알포는 학자였고, 자신의 연구 논문을 완성시킬 목적으로 우주의 끝을 보러 왔다. 그런 인간이다. 조심해야한다.&lt;br&gt;&#10;다행히 알포는 크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lt;br&gt;&#10;&amp;ldquo;그럼, 탐정 씨는 어떻게 생각하죠?&amp;rdquo;&lt;br&gt;&#10;&amp;ldquo;뭐?&amp;rdquo;&lt;br&gt;&#10;&amp;ldquo;구조물이요.&amp;rdquo;&lt;br&gt;&#10;&amp;ldquo;글쎄. 음… 그 뭐랄까… 난 영구기관이라고 까지 생각하진 않는데 시계처럼 단순한 목적은 아닌 것 같고… 난 사실 별 관심 없어. 나는 우주의 끝을 보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찾으러 온 거라고.&amp;rdquo;&lt;br&gt;&#10;&amp;ldquo;그 직업 정신은 칭찬드립니다마는.&amp;rdquo;&lt;br&gt;&#10;&amp;ldquo;칭찬 받고 싶진 않은데.&amp;rdquo;&lt;br&gt;&#10;내가 투덜거리자 바텐더이자 지배인이자 호텔 림보 그 자체가 입을 열었다.&lt;br&gt;&#10;&amp;ldquo;등대.&amp;rdquo;&lt;br&gt;&#10;&amp;ldquo;등대?&amp;rdquo;&lt;br&gt;&#10;&amp;ldquo;저것은 등대다. 등대를 모르나?&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 알아. 뭐, 빛을 내니까 그렇게 볼 수 있긴 하겠군.&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다. 빛은 인도한다. 마른 곳으로.&amp;rdquo;&lt;br&gt;&#10;나와 알포는 잠깐 눈빛을 맞춘다.&lt;br&gt;&#10;알포가 말한다.&lt;br&gt;&#10;&amp;ldquo;흥미로운 시각이군요. 그러니까 저건 누군가 단순한 호의로 세계의 끝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둔 거란 말이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호의? 의도는 모른다. 하지만 마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한 장치는 맞다.&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 공허하고 아무 것도 없는, 얼어붙은 우주는 진 곳이지. 우주의 끝으로 저 이정표를 꽂아놓아서 사람들을 이쪽으로 끌어당겼군. 이유는 모르지만.&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가? &amp;lsquo;너&amp;rsquo;라면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amp;rdquo;&lt;br&gt;&#10;아리송한 말에 다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침묵한다. 제로가 제 술잔을 몇 번 더 홀짝인다.&lt;br&gt;&#10;우리는 잠시 호텔 림보의 바 전면창 밖으로 보이는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구조물은 구름(이제는 기억 속에서도 희미한)이 흐르는 속도로 움직인다. 스쳐가듯 보면 정지한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움직이고 있다.&lt;br&gt;&#10;바텐더가 말했다.&lt;br&gt;&#10;&amp;ldquo;누군가 왔군.&amp;rdquo;&lt;br&gt;&#10;고개를 돌리자 전면창 구석 도킹 시스템에 우주선 하나가 다가온다.&lt;br&gt;&#10;어딘가 낯익은 우주선이다.&lt;br&gt;&#10;제로가 술잔을 올리며 말했다.&lt;br&gt;&#10;&amp;ldquo;기다리던 그 사람이길 바라지.&amp;rdquo;&lt;br&gt;&#10;나는 잔을 마주쳤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엑실의 아이</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91%EC%8B%A4%EC%9D%98-%EC%95%84%EC%9D%B4/</link><pubDate>Fri, 28 Feb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91%EC%8B%A4%EC%9D%98-%EC%95%84%EC%9D%B4/</guid><description>&lt;p&gt;아이 하나가 오카를 가리켰다.&lt;br&gt;&#10;&amp;ldquo;저기 도롱뇽 지나간다.&amp;rdquo;&lt;br&gt;&#10;오카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lt;br&gt;&#10;엑실 콜로니 출신은 만만하게 보인다.&lt;br&gt;&#10;키가 작고, 앳된 외모로 보인다.&lt;br&gt;&#10;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줄이기 위해 마른데다가 근육량은 적다. 유전적으로 결함 요소를 배제 했지만 대부분은, 대단절 시대의 고대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 머리와 피부는 모두 희다.&lt;br&gt;&#10;다른 인간종들은 볼품없다고 하기도 하지만, 엑실의 아이들은 이런 자신의 외견을 모두 귀히 여긴다.&lt;br&gt;&#10;어머니들의 지식과 기술로 만들어진, 생존을 위한 효율의 결과.&lt;br&gt;&#10;차가운 우주를 상대로 생을 거듭해나가기 위한 억척스런 몸.&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기계와 번역기</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8%B0%EA%B3%84%EC%99%80-%EB%B2%88%EC%97%AD%EA%B8%B0/</link><pubDate>Mon, 24 Feb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8%B0%EA%B3%84%EC%99%80-%EB%B2%88%EC%97%AD%EA%B8%B0/</guid><description>&lt;p&gt;&amp;ldquo;박사님, 뭐하세요?&amp;rdquo;&lt;br&gt;&#10;&amp;ldquo;목소리를 듣고 있다네.&amp;rdquo;&lt;br&gt;&#10;&amp;ldquo;목소리라 하면, 목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지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지.&amp;rdquo;&lt;br&gt;&#10;&amp;ldquo;하지만 거긴 버스 바닥이잖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맞는 말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청진기를 대고 계시긴 하지만.&amp;rdquo;&lt;br&gt;&#10;&amp;ldquo;또 양은…&amp;rdquo;&lt;br&gt;&#10;박사님은 입고 있던 실험의를 툭툭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lt;br&gt;&#10;&amp;ldquo;편협한 지식 체계에 갇혀있군.&amp;rdquo;&lt;br&gt;&#10;&amp;ldquo;또 시작인가.&amp;rdquo;&lt;br&gt;&#10;&amp;ldquo;마음의 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amp;rdquo;&lt;br&gt;&#10;나는 무슨 말이냐는듯 멀뚱하게 박사님을 바라보았다.&lt;br&gt;&#10;박사님은 묘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입을 열었다.&lt;br&gt;&#10;&amp;ldquo;…아무튼, 만물-유기학적인 관점에서 의지 있는 소리를 내는 모든 기관은 &amp;lsquo;목&amp;rsquo;이라고 할 수 있다네.&amp;rdquo;&lt;br&gt;&#10;&amp;ldquo;만물-유기학이라고요? 가이아 이론이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비슷하지. 세상은 사실 무기물과 유기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 상호작용하는 유기물이란 말이야. 실제로 그렇지. 그리고 유기물들은 소리를 내는데, 그 말은 무기물도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이고. 그게 목이지. 그리고 그 목을 통해서 튀어나오는 소리는 결국 &amp;lsquo;말&amp;rsquo;이라고 할 수 있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결국 버스가 말을 한다고 말씀하고 싶은 거죠?&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다네.&amp;rdquo;&lt;br&gt;&#10;나는 박사님과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lt;br&gt;&#10;마침 버스가 다음 정거장에 설 것이란 안내가 나왔다.&lt;br&gt;&#10;&amp;ldquo;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요.&amp;rdquo;&lt;br&gt;&#10;당연히 박사님은 날 붙잡았다.&lt;br&gt;&#10;&amp;ldquo;아니 어딜 가나. 양이 호텔 예약을 다했는데. 내 서류 정리는 누가 도와주고.&amp;rdquo;&lt;br&gt;&#10;&amp;ldquo;죄송하지만 박사님의 품격은 모르겠지만 제 품격은 좀 챙겨야겠는데요.&amp;rdquo;&lt;br&gt;&#10;&amp;ldquo;맡은 바 소임을 하는 사람은 멋지지 않은가? 이건 과학이라네. 나는 과학자고.&amp;rdquo;&lt;br&gt;&#10;&amp;ldquo;바닥에 청진기 대면서 히죽히죽 웃어대는 사람은 그냥 이상한처럼 보인다는 건 유감이긴한데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 그래. 내 설명이 부족했군. 이리 앉아보게.&amp;rdquo;&lt;br&gt;&#10;박사님은 다시 바닥에 앉아서 내게 손짓했다.&lt;br&gt;&#10;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버스는 정거장에 서지 앉아서 내릴 타이밍을 놓쳤다.&lt;br&gt;&#10;나는 자리에 앉았다.&lt;br&gt;&#10;박사님이 말했다.&lt;br&gt;&#10;&amp;ldquo;이건 분명 평범한 청진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라네.&amp;rdquo;&lt;br&gt;&#10;&amp;ldquo;아닌가요.&amp;rdquo;&lt;br&gt;&#10;&amp;ldquo;만물-유기학에 근거한 번역기지.&amp;rdquo;&lt;br&gt;&#10;&amp;ldquo;번역기.&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다네. 이걸 착용하고 버스 바닥에 대어보게.&amp;rdquo;&lt;br&gt;&#10;나는 미심쩍어하면서 그 말대로했다.&lt;br&gt;&#10;어차피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무릎을 더럽혔으니.&lt;br&gt;&#10;놀랍게도 번역기라고 불리는 청진기를 착용하고 그 끝을 바닥에 대자 &amp;lsquo;목소리&amp;rsquo;가 들려왔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도망친 머리</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F%84%EB%A7%9D%EC%B9%9C-%EB%A8%B8%EB%A6%AC/</link><pubDate>Tue, 18 Feb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F%84%EB%A7%9D%EC%B9%9C-%EB%A8%B8%EB%A6%AC/</guid><description>&lt;p&gt;#장르_코드_전력_시체&lt;/p&gt;&#10;&lt;p&gt;경찰에게서 연락을 받은 건 나였다.&lt;br&gt;&#10;&amp;ldquo;야미, 서장님이 자문관을 찾고 있어.&amp;rdquo;&lt;br&gt;&#10;&amp;ldquo;거절해.&amp;rdquo;&lt;br&gt;&#10;&amp;ldquo;무슨 사건인지 듣지도 않았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높은 확률로 루비의 연구원일 거야. 아마 실종되거나 납치 되었겠지. 아마 경쟁업체에서 스카웃하기 위해서일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스카웃하기 위해서 납치를 한다고?&amp;rdquo;&lt;br&gt;&#10;내가 되묻자, 벨벳 소파 위에서 나체로 와인을 마시던 야미는 어깨를 으쓱했다.&lt;br&gt;&#10;&amp;ldquo;넌 정말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는구나.&amp;rdquo;&lt;br&gt;&#10;&amp;ldquo;알려줘.&amp;rdquo;&lt;br&gt;&#10;&amp;ldquo;연구원들은 기업에 유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경우가 흔해. 21세기처럼 돈이나 유흥으로 꼬시려고 들어도 쓸모가 없지. 기업 마크, 아니 사명만 들어도 애사심으로 심장이 뛰고 최고경영자를 보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걸. 그러니 경쟁 기업에서 세뇌를 하거나 호르몬 요법으로 강제적인 행동수정을 해서 자기 기업에 들어오라고 &amp;lsquo;설득&amp;rsquo;해야 되는 거야. 설득이 끝나면 납치 된 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나온 거라고 하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도 되는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안 될게 뭐야? 법 체계가 존속하기 위해선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해. 외부의 기술적인 수단으로 뇌를 조물딱거린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amp;lsquo;사라졌다&amp;rsquo;고 말할 수 없어. 아무튼… 연구원에겐 별 일은 없을 거야. 어느 회사라고 해도 절대적인 체계인 노동법을 어길 수는 테니, 그 연구원에겐 아마 별 일 없을 걸. 더 좋은 처우를 받을지도 모르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데 그건 어떻게 안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루비 자회사인 루비랩의 주가가 흔들리고 있어. 이번에 즉시 동결 기술을 통한 신제품을 준비중이고 내부 평가가 괜찮았는데도 말이야.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겼단 말이고, 제일 흔한 건 연구원 스카웃이지. 이 정보는 어디서 샜을 거야.&amp;rdquo;&lt;br&gt;&#10;나는 야미를 잠깐 본 다음 다시 경찰과 이야기했다.&lt;br&gt;&#10;야미의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lt;br&gt;&#10;&amp;ldquo;루비 연구원은 맞췄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데?&amp;rdquo;&lt;br&gt;&#10;&amp;ldquo;납치 된 게 아니라, 살해 당했다고 해.&amp;rdquo;&lt;br&gt;&#10;&amp;ldquo;납치가 아니라 살해. 흥미로운걸. 살인은 범법인데.&amp;rdquo;&lt;br&gt;&#10;납치도 범법이지만.&lt;br&gt;&#10;&amp;ldquo;어쩔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당장 간다고 전해.&amp;rdquo;&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종말의 개 2고</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2%85%EB%A7%90%EC%9D%98-%EA%B0%9C-2%EA%B3%A0/</link><pubDate>Wed, 24 Apr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2%85%EB%A7%90%EC%9D%98-%EA%B0%9C-2%EA%B3%A0/</guid><description>&lt;p&gt;사내는 사흘째 걷고 있었다.&lt;br&gt;&#10;이따금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거나, 호젓한 도시의 외곽에서 마음을 찌르는 어떤 곡조가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감고 멈춰서긴 했다. 하지만 사내는 허튼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다시 걸어갔다. 사내는 자신이 도시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lt;br&gt;&#10;개는 먼발치에서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lt;br&gt;&#10;개는 덩치가 크고 금빛털을 두르고 있었다. 다리의 굽은 털들이 거뭇해지긴 했어도 사내가 제대로 털을 빗겨주지도 못한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개에게서는 여전히 윤이 났다. 전보다 체중이 줄기는 했지만 개는 좋은 코를 가지고 있었고 거리에서 먹을만한 것을 찾아내고 먹으면 탈이 날 것을 가려낼 재주가 있었다. 개는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잘 적응했다.&lt;br&gt;&#10;요 며칠 사내의 강행군은 개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제 만난 친절한 모녀는 개에게 힘이 되었다.&lt;br&gt;&#10;모녀는 살아있었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막 지났을 뿐인 소시지와 신선한 물이 든 물통도 가지고 있었다. 개는 갈증에 익숙해졌지만, 모녀는 전혀 무례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경계심을 접고 목을 축였다.&lt;br&gt;&#10;개가 소시지와 물을 먹는 동안 모녀는 개를 쓰다듬기도 하고 자신들이 방금 붙인 서로 다른 두 이름으로 개를 부르기도 했다.&lt;br&gt;&#10;갈래?&lt;br&gt;&#10;우리랑 같이 갈래?&lt;br&gt;&#10;하지만 앞발을 슬쩍 쥐는 부드러운 손길에 개는 부정의 뜻을 전했다. 적당히 힘을 주어 손안에서 앞발을 빼낸 것이다. 멀리 멀뚱히 서 있던 사내가 다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는 우선 사내의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고 고개를 돌려 눈으로 확인했다. 개는 사내를 따라갔다.&lt;br&gt;&#10;모녀가 뒤에서 부르자 개는 힐끗 한 번 돌아보았다. 자신은 모녀를 따라가지 않겠지만, 모녀가 자신을 따라오는 건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녀는 개를 따라가지 않았고, 먼발치에서 개가 사내를 따르는 것을 보았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위스키 봉봉</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C%84%EC%8A%A4%ED%82%A4-%EB%B4%89%EB%B4%89/</link><pubDate>Wed, 01 Mar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C%84%EC%8A%A4%ED%82%A4-%EB%B4%89%EB%B4%89/</guid><description>&lt;p&gt;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거기 제 자린데요?&amp;rdquo;&lt;br&gt;&#10;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여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lt;br&gt;&#10;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뭐해요? 빨리 표 확인해봐요.&amp;rdquo;&lt;br&gt;&#10;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기차표를 확인하고 앉은 자리를 확인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lt;br&gt;&#10;&amp;ldquo;옆자리였네요.&amp;rdquo;&lt;br&gt;&#10;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로 옮겼다.&lt;br&gt;&#10;여자는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방금까지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lt;br&gt;&#10;남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lt;br&gt;&#10;이번 표적이 바로 이 여자였다.&lt;br&gt;&#10;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여자를 미행을 할 생각이었는데, 우연찮게 그 여자의 자리에 앉았던 모양이다. 바로 얼굴이 팔려버렸으니 앞으로의 미행은 힘들듯 싶었다.&lt;br&gt;&#10;&amp;ldquo;이거 먹을래요?&amp;rdquo;&lt;br&gt;&#10;창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위스키 봉봉 하나를 들고 말했다.&lt;br&gt;&#10;남자는 멈칫했다 위스키 봉봉을 받아들었다. 혹시 이 여자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눈썰미로 슥 훑어도 위스키 봉봉의 포장지에 별 이상은 없었다. 여자가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눈치를 슬쩍 봤다가 위스키 봉봉을 까먹었다.&lt;br&gt;&#10;달콤했다.&lt;br&gt;&#10;깜짝 놀랄만큼.&lt;br&gt;&#10;남자의 표정이 펴지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lt;br&gt;&#10;&amp;ldquo;제가 말이 좀 심했죠? 옆자리 정도는 착각할 수도 있는데.&amp;rdquo;&lt;br&gt;&#10;남자는 그제서야 달콤한 맛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건 깨달았다. 엉겁결에 받은 초콜렛이 몇 년만에 먹는 것인지. 남자는 초콜렛을 천천히 녹여 이와 이 사이, 혓바닥 아래, 잇몸 속으로 스미게 두었다.&lt;br&gt;&#10;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계속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신경이 예민해진 거 같아요. 방금도 기차에 오르기 전에 소매치기 하나가 제 가방을 들고 가려고 했거든요. 역무원이 금방 잡아줘서 다행이지. 아, 근데 어디까지 가세요?&amp;rdquo;&lt;br&gt;&#10;말이 많군.&lt;br&gt;&#10;남자는 하는 수 없이 기차의 종착역을 말했다. 그녀는 연고지는 불명이었고 어디로 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lt;br&gt;&#10;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우와! 저랑 같은 곳에 가시네요.&amp;rdquo;&lt;br&gt;&#10;그건 의외였다. 종착역은 관광 도시 하나가 있지만 도망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이기에 좋은 곳이지. 기뻐한다면 남자가 기뻐해야했다.&lt;br&gt;&#10;남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무슨일로 가시죠?&amp;rdquo;&lt;br&gt;&#10;&amp;ldquo;관광이죠. 그 도시에 뭐가 있겠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성수기가 아닌데.&amp;rdquo;&lt;br&gt;&#10;&amp;ldquo;혼자 가는 여행에 그런 거 따지겠어요? 그럼 그쪽은?&amp;rdquo;&lt;br&gt;&#10;&amp;ldquo;저는 일 때문에.&amp;rdquo;&lt;br&gt;&#10;&amp;ldquo;관광업에 종사 하시나보죠?&amp;rdquo;&lt;br&gt;&#10;&amp;ldquo;아, 뭐… 그렇죠. 잡지에 기행문 써요.&amp;rdquo;&lt;br&gt;&#10;&amp;ldquo;오, 정말요? 그럼 여러군데 가보셨겠네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amp;rdquo;&lt;br&gt;&#10;남자는 잠깐 침묵했다.&lt;br&gt;&#10;남자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특별한 장소가 떠올랐다.&lt;br&gt;&#10;남자는 기억을 천천히 되살리며 말했다.&lt;br&gt;&#10;&amp;ldquo;남쪽 섬 중에, 대단한 건 아닌데. 별로 크지는 않아요. 마을 사람들도 몇 명 없어서, 배 타고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곳이 있어요. 그래도 주변에 낚시 가는 사람이 많아서 배 잡는 게 어렵지는 않은데. 아무튼 봄에 가면 섬 전체에 철쭉 꽃이 흐드러지게 펴요.&amp;rdquo;&lt;br&gt;&#10;&amp;ldquo;흐드러지게? 말 되게 이쁘게 하신다. 계속 해줘요.&amp;rdquo;&lt;br&gt;&#10;&amp;ldquo;가만히 서 있으면 바람결 따라서 향기가 코를 찌르는데, 저 너머에서는 파도가 넘실대는 거죠. 그러고 있으면, 뭐라고 해야지?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느낌? 아, 혹시 꽃알레르기 있어요? 알레르기 있으면 안 되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없어요, 저. 꽃 좋아해요.&amp;rdquo;&lt;br&gt;&#10;향수 냄새가 났다. 그는 그 향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조직원 하나가 그에게 자료라고 쥐어준 서류 뭉치에는 여자가 자주 쓰는 향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선호하는 옷가지는 무엇인지, 자주 가는 식당은 어디인지, 모두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 향수의 이름 또한 외고 있었다.&lt;br&gt;&#10;남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향기가 좋네요.&amp;rdquo;&lt;br&gt;&#10;&amp;ldquo;뭐가요? 향수요? 그쵸? 저 이것만 써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 향수 이름이 뭐에요?&amp;rdquo;&lt;br&gt;&#10;여자는 웃으면서 향수의 이름과 그 향수를 광고한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향수를 만드는 브랜드와 그 브랜드에서 만든 남자에게 어울릴법한 향수를 추천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여자가 부른 그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넣었다.&lt;br&gt;&#10;&amp;ldquo;와, 수첩 쓰시네요. 로맨틱하다. 요즘은 메모도 다 폰으로 하잖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무래도 이게 더 익숙해서요.&amp;rdquo;&lt;br&gt;&#10;일 때문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지워도 스마트폰에 기록이 남더라고요. 찢어서 태우는 게 훨씬 깔끔해요. 남자는 말들을 내려앉혔다.&lt;br&gt;&#10;하지 말아야 말들 때문에 입술이 마르자 남자는 말을 돌렸다.&lt;br&gt;&#10;&amp;ldquo;그런데 안 좋은 일들이 있었다고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네. 뭐 따지기 시작하면 한 둘이 아닌데, 제일 큰 건 일 그만 둔 거 아닐까.&amp;rdquo;&lt;br&gt;&#10;&amp;ldquo;해고 당한 거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뇨. 프리랜서라고 해야되나? 뭐 대충 그런건데 클라이언트랑 마찰이 좀 있어서. 자세히 말하긴 좀 그런데… 제가 일하는 업계가 많이 좁아서, 트러블 생기면 말짱 황이거든요. 아 이제 뭐 먹고 살아야하나 몰라.&amp;rdquo;&lt;br&gt;&#10;여자는 푸념을 했지만 입에 금방 미소가 돌아왔다.&lt;br&gt;&#10;&amp;ldquo;그래서 이 여행도 그냥 나 자신에게 주는 위로 선물이랄까, 새시작하기 전에 찬 바람 좀 쐬야지 싶어서 가는 거에요. 야! 신난다!&amp;rdquo;&lt;br&gt;&#10;자영업이 아니라 프리랜서인가. 남자는 으쓱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lt;br&gt;&#10;서리받은 논들 사이로 둥글게 말아놓은 짚더미들이 듬성듬성 놓여져 있었다. 봄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lt;br&gt;&#10;암중에,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젊은 무당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높으신 분들 사이로 알음알음하여 소문이 퍼지고 남자의 조직에도 그 이야기가 닿았다. 남자는 점이며 사주팔자며 믿지 않았지만 무당의 말을 믿고 투자해서 큰 수익을 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쯤해서 무당을 멀리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생겨났다.&lt;br&gt;&#10;하지만 조직의 보스는 그렇지 않았다. 이 맹랑한 무당은 큰 투자를 계획하는 조직의 보스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했고, 결과적으로 조직은 보스의 투자 실패로 크게 휘청거렸다. 무당의 말에 넘어간건 보스만이 아니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듯 무당은 자신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홀렸다. 각계각층에서 흘러나온 돈들이 무당의 말과 함께 모두 증발해버렸다. 무당이 모종의 작전 세력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얼마가지 않아서 밝혀졌다.&lt;br&gt;&#10;&amp;ldquo;이거 봐요.&amp;rdquo;&lt;br&gt;&#10;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남자의 볼을 찔렀다. 순간 남자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그게 여자의 검지손가락이란 걸 알아차렸다.&lt;br&gt;&#10;남자가 무뚝뚝하게 볼이 밀려난 그대로 있자 여자가 검지를 떼곤 키득거리며 웃었다.&lt;br&gt;&#10;남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뭐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화났어요?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일 생각 좀 했어요. 그쪽은 이제 뭐 할려고요?&amp;rdquo;&lt;br&gt;&#10;&amp;ldquo;글쎄요. 뭘 해야 좋을까. 거기 일 괜찮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뇨. 페이는 좋은데 업무 환경이 좀. 주말도 못쉬고.&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가. 벌어 놓은게 있어서 제가 돈은 좀 있거든요? 차라리 가게나 하나 차릴까요?&amp;rdquo;&lt;br&gt;&#10;&amp;ldquo;치킨집 같은 거?&amp;rdquo;&lt;br&gt;&#10;&amp;ldquo;안 돼. 그건 내 최후의 보루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되게 많은가봐요. 돈 좀 있나봐.&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요. 늙은 깡패새끼들 등쳐먹었더니 배가 다 부르네. 이 캐리어 있죠? 이거 5만원짜리로 가득 채운 거에요. 바닥엔 금괴가 열장이나 깔려있고요. 아까 소매치기랍시고 이거 채어 가려다가 나자빠지는데, 얼마나 웃긴지. 그래도 조마조마하긴 했어.&amp;rdquo;&lt;br&gt;&#10;남자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순간 기차가 터널로 들어섰고 반사되는 상으로 옆 자리의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위스키 봉봉을 까먹고 있었다.&lt;br&gt;&#10;남자가 돌아보자 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걱정하지 마요. 아까 준 초콜렛에 아무 것도 안 넣었으니까. 나 그래도 먹는걸로는 장난 안 치거든. 그리고 괜히 급하게 굴지 마요.&amp;rdquo; 여자는 남자의 볼을 찔렀던 검지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amp;ldquo;나도 한 번 봐준 거니까. 초콜렛 하나 더 먹을래요?&amp;rdquo;&lt;br&gt;&#10;남자는 아까전 찔렸던 볼을 한 번 부볐다가 위스키 봉봉을 받았다. 달콤함이 질리지 않았다.&lt;br&gt;&#10;남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어떻게 알았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솔직히, 그냥 한 번 찍어봤어요. 몇 명 타지도 않는 기차에 체격 건장한 젊은 남자면 의심해볼만 하긴 하죠. 누가 겨울에 거길가. 어차피 이 기차에 당신 한 사람만 탔을 거 같지도 않고. 모르죠. 이 기차 탄 사람 전부가 내 목 따가는 임무를 받았을지도요.&amp;rdquo;&lt;br&gt;&#10;&amp;ldquo;이제 어떡할거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까 말했잖아요. 마지막 여행이라고. 내키는대로 일 보셔도 저는 할말 없는데, 그래도 저 지금 아양 떠는 거니까 좀더 봐줄 수 있죠?&amp;rdquo;&lt;br&gt;&#10;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여자의 말대로 기차에는 두 사람이 더 타고 있었고, 아침 소매치기는 여자의 가방에 도청기와 위치추적기를 설치했다. 여자가 가방에 넣어둔 돈 보다 숨겨둔 돈이 훨씬 많을건 분명했으니까 그 행방을 알아야했다.&lt;br&gt;&#10;여자가 위스키 봉봉의 포장지를 구기며 말했다.&lt;br&gt;&#10;&amp;ldquo;조금만 더 깔끔하게 했으면 되는데. 아깝다 아까워. 아, 근데 걔는 벌써 죽었죠? 희재.&amp;rdquo;&lt;br&gt;&#10;&amp;ldquo;누구?&amp;rdquo;&lt;br&gt;&#10;&amp;ldquo;있잖아요. 키 작고 컴퓨터 잘 하던 애.&amp;rdquo;&lt;br&gt;&#10;&amp;ldquo;아.&amp;rdquo;&lt;br&gt;&#10;&amp;ldquo;걔 되게 귀여웠는데. 다 들통나니까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이 &amp;lsquo;언니만큼은 꼭 지켜줄게요!&amp;rsquo; 막 이러고. 영화 참 많이 봤어. 아무튼 걔 죽었죠?&amp;rdquo;&lt;br&gt;&#10;&amp;ldquo;네. 아마도요.&amp;rdquo;&lt;br&gt;&#10;&amp;ldquo;아 불쌍하다. 사실 내가 하자고 꼬드긴건데. 머리도 똑똑하고 엄청 착한 애였는데 너무 미안하다.&amp;rdquo;&lt;br&gt;&#10;터널에서 빠져나오자 쏟아지는 역광에 남자는 인상을 썼다. 여자는 또 위스키 봉봉을 까먹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입에 막 들어가려는 그것을 낚아챘다.&lt;br&gt;&#10;남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취했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럴리가요.&amp;rdquo;&lt;br&gt;&#10;여자가 입을 열자 진득한 초콜렛 향과 옅은 알코올 냄새가 뒤섞였다. 남자는 제 입에 위스키 봉봉을 털어넣고 말했다.&lt;br&gt;&#10;&amp;ldquo;그만 먹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왜요?&amp;rdquo;&lt;br&gt;&#10;&amp;ldquo;….&amp;rdquo;&lt;br&gt;&#10;&amp;ldquo;이거 가지곤 안 취해요.&amp;rdquo;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도청기를 발견하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amp;ldquo;…하긴 뭐. 더 먹으면 당뇨 걸리겠다.&amp;rdquo;&lt;br&gt;&#10;남자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뒤, 빠르게 휘갈겨 쓰면서 말했다.&lt;br&gt;&#10;&amp;ldquo;아무튼 마지막 정거장까진 가죠. 저희도 그게 더 편하니까.&amp;rdquo;&lt;br&gt;&#10;남자가 수첩을 들어 보여주자 여자가 눈으로 그걸 읽었다.&lt;br&gt;&#10;&amp;lsquo;이번 정거장에서 내림. 조용히 준비.&amp;rsquo;&lt;br&gt;&#10;기차가 감속하기 시작하자 남자는 여자에게 일어서라 손짓했다. 둘 모두 일어난 뒤 남자가 나이프로 도청기와 위치추적기를 도려냈다. 남자가 도청기와 휴대폰을 의자 위에 놔두자 여자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음악이나 들을까요?&amp;rdquo;&lt;br&gt;&#10;남자는 인상을 쓰고 기차칸의 앞뒤를 살폈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두 사람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남자를 보조해주는 역할이었다. 남자를 의심했다면 이미 움직였겠지.&lt;br&gt;&#10;기차가 정차했다.&lt;br&gt;&#10;남자는 가슴팍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lt;br&gt;&#10;둘은 승강장 기둥 뒤에 앉아 있다가 기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뒤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인상을 잔뜩 쓰고 마른 세수를 했다. 망했군.&lt;br&gt;&#10;여자가 자기 다리를 주무르며 남자를 쫒아왔다.&lt;br&gt;&#10;&amp;ldquo;아, 다리 저려. 왜 구해준거에요? 저한테 반했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반하기는요. 돈 때문에 눈 돌아간거지. 이제 대책 없는데 큰일났다 진짜.&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돈만 가져가면 되잖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더 있는 거 알거든요? 간도 커 진짜. 얼마나 해먹은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솔직히 반한 거 맞죠? 나 좀 예쁘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뭐래.&amp;rdquo;&lt;br&gt;&#10;남자는 홧김에 캐리어를 놔버리고 역 출구로 걸어갔다.&lt;br&gt;&#10;깜짝 놀란 여자가 힘겹게 캐리어를 끌고서 남자에게 다가갔다.&lt;br&gt;&#10;&amp;ldquo;아니, 돈 때문이라고 하시던 분이.&amp;rdquo;&lt;br&gt;&#10;&amp;ldquo;난 그 향수 별로에요.&amp;rdquo;&lt;br&gt;&#10;남자는 투덜거리곤 여자와 함께 캐리어 손잡이를 쥐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갇힌 사람 동호회 채팅방 로그</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0%87%ED%9E%8C-%EC%82%AC%EB%9E%8C-%EB%8F%99%ED%98%B8%ED%9A%8C-%EC%B1%84%ED%8C%85%EB%B0%A9-%EB%A1%9C%EA%B7%B8/</link><pubDate>Tue, 28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0%87%ED%9E%8C-%EC%82%AC%EB%9E%8C-%EB%8F%99%ED%98%B8%ED%9A%8C-%EC%B1%84%ED%8C%85%EB%B0%A9-%EB%A1%9C%EA%B7%B8/</guid><description>&lt;p&gt;갇힌 사람 동호회 채팅방 x월 y일&lt;/p&gt;&#10;&lt;p&gt;접속자 목록&lt;/p&gt;&#10;&lt;p&gt;네버홀릭&lt;br&gt;&#10;개말년^^&lt;br&gt;&#10;수갑☆&lt;br&gt;&#10;팔랑나비&lt;br&gt;&#10;소코반&lt;br&gt;&#10;오웬&lt;/p&gt;&#10;&lt;p&gt;-오웬 님이 접속하셨습니다. -&lt;/p&gt;&#10;&lt;p&gt;수갑☆: 안녕하세요!&lt;br&gt;&#10;개말년^^: ㅎㅇ&lt;br&gt;&#10;네버홀릭: 오웬 님 오셨네&lt;br&gt;&#10;오웬: 안녕하세요!&lt;br&gt;&#10;오웬: 오늘은 사람이많네요?&lt;br&gt;&#10;팔랑나비: 그러니까 이 카페 폐쇄되면 어떻게 되냐는 겁니다.&lt;br&gt;&#10;수갑☆: 그러게요. 소코반 님도 계시고.&lt;br&gt;&#10;오웬: 그렇네요 소코반 님 안녕하세요?&lt;br&gt;&#10;개말년^^: 어쩔 수 없는 거죠 군대가 몇 십 년 있는 것도 아니고;;;&lt;br&gt;&#10;소코반: ? 안녕&lt;br&gt;&#10;팔랑나비: 오웬님 ㅎ2&lt;br&gt;&#10;팔랑나비: 그래도 카페 탈퇴할 필요는;&lt;br&gt;&#10;오웬: 무슨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죠?&lt;br&gt;&#10;개말년^^: 이제 갇힌 사람도 아닌데 굳이 카페에 남는게 이상하잖아요&lt;br&gt;&#10;수갑☆: 아 말년 님 이제 군대 제대하신다고 하셔서&lt;br&gt;&#10;네버홀릭: 개말년 님 제대한대요&lt;br&gt;&#10;수갑☆: 요즘 카페 사람 자꾸 줄어드는데,&lt;br&gt;&#10;수갑☆: 사람이 적으면 카페 유지할 필요도 없다고&lt;br&gt;&#10;개말년^^: 여러분도 천년만년 갇혀살것도 아니잖아요? 안그래요?&lt;br&gt;&#10;수갑☆: 소코반 님이 말씀하셔서..&lt;br&gt;&#10;오웬: 헐 진짜에요? =ㅅ=)?&lt;br&gt;&#10;팔랑나비: &amp;hellip;.&lt;br&gt;&#10;오웬: 소코반님???&lt;br&gt;&#10;개말년^^: 안그래요?&lt;br&gt;&#10;개말년^^: 수갑님도 이제 곧 탈출계획 다 짜두셨다고 했죠?&lt;br&gt;&#10;소코반: 진짜임&lt;br&gt;&#10;수갑☆: 네..&lt;br&gt;&#10;개말년^^: 아니뭐 인연 닿으면 다른동호회에서 볼수도 있는거고&lt;br&gt;&#10;개말년^^: 솔직히 갇사동도 사람얼마 없고.. 계기도 생기고 해서 가려는건데&lt;br&gt;&#10;개말년^^: 그거 가지고 뭐라 그러시면 안되죠&lt;br&gt;&#10;팔랑나비: 그야 그렇지만&amp;hellip;.&lt;br&gt;&#10;개말년^^: 아 시간도 다됬고 저 가볼께요&lt;br&gt;&#10;수갑☆: 들어가세요&lt;br&gt;&#10;팔랑나비: ㅂㅂ..&lt;br&gt;&#10;소코반: 안녕&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겨울의 끝</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2%A8%EC%9A%B8%EC%9D%98-%EB%81%9D/</link><pubDate>Mon, 27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2%A8%EC%9A%B8%EC%9D%98-%EB%81%9D/</guid><description>&lt;p&gt;이제 인류는 암흑기를 벗어났다. 적도를 중심으로 걷히는 구름이 다시금 지구의 대류를 만들어내면서 기온은 날이 다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생물학자인 최교수는 &amp;lsquo;생물관&amp;rsquo;의 식물들을 밖으로 옮겨 심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물관의 식물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회의가 필요했다. 옮겨 심기엔 너무 인력이 많이 소모될겁니다. 지금부터 옮기기 시작해도 기온이 돌아오는 때까지 모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식물들을 옮기다가 많은 식물들이 상처를 입을겁니다. 누군가 가장 기발한 의견을 냈다. 그럼 생물관을 부수죠.&lt;br&gt;&#10;그러자 생물관의 지붕을 덜어내는 작업을 시작하는 날이 축제의 날로 예정되었다. 모두 축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우리 탐사대도 예정되어있던 탐사를 축제 이후로 미루었다. 탐사대장인 박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방사능 오염 복구 기술을 발견하고, 영구 동결된 기술을 확인하는 인류에 많은 기원을 했던 우리 탐사대도 슬슬 일거리가 없어지겠군. 옛날엔 잘 나갔는데 말이지.&lt;br&gt;&#10;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 숨겨진 과거의 유물들을 굳이 &amp;lsquo;탐사&amp;rsquo;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눈에 파묻혀 있던 건물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발견되는 자료량은 특이점을 넘어 우리에게 불필요할만큼 늘어날 것이라는게 탐사대원들의 객관적 평가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방주와의 교류였다. 그렇게되면 찾아다니는 것 보단 주어진 정보를 활용하는 일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탐사대원들은 그런 복잡한 심경에 빠져 뿔뿔이 흩어져 간만의 긴 휴식을 맛보았다.&lt;br&gt;&#10;선장이 나를 호출한 것은 축제가 다가오기 한 달 정도가 남을 무렵이었다. 기후학자인 이교수가 기온 상승률이 예상 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으므로 축제를 10일 정도 앞당겨야겠다는 발표에, 다들 환호성을 지른 학회가 끝난 직후였다.&lt;br&gt;&#10;선장은 정신감정결과가 사이코패스로 나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점을 방주 선장 투표 때 장점으로 내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모두가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이때, 자신과 같은 이성주의자가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했다. 축제가 한껏 다가온 이 시점에서도 그는 축제의 흥분 보다 걱정을 하고 있었다.&lt;br&gt;&#10;그녀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lt;br&gt;&#10;현군. 현군은 프림양과 친하지요?&lt;br&gt;&#10;예. 그렇습니다만. 프림을 발견해서 방주로 데려온 것도 접니다.&lt;br&gt;&#10;그래요. 방주는 가끔 조난자를 발견하기도 하죠. 하지만 가끔 조난자들은 그 배의 일원이 아니기에, 조심을 해야하기도 해요.&lt;br&gt;&#10;그런 이야기라면, 옛날 이야기 책에서나….&lt;br&gt;&#10;현군. 저는 비유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 말과 의도를 헷갈리지 말았으면 하거든요.&lt;br&gt;&#10;그러면서 그녀는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주었다.&lt;br&gt;&#10;이건 프림양과 관련된 비밀 경찰들 조사 자료에요. 의심 수준이라면 현군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겠죠. 법정에서 활용될 수 있는 확고한 증거이고, 그녀는 저 자료 만으로도 중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lt;br&gt;&#10;…무슨 말씀이신지.&lt;br&gt;&#10;이런 이야깁니다. 현군. 그녀는 과거 옛인류가 종의 멸망을 막을 목적으로 콜드 슬립한 인류 중에 한명이고, 우리네 사고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녀는 문명과 과학 기술에 큰 공포를 느끼죠. 그리고 우리가 해가 뜨는 볕으로 나가면 그 문명이,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파고드는 곰팡이처럼 지구를 다시금 좀먹을거라 생각해요.&lt;br&gt;&#10;선장님. 그녀에게 물론 그런 경향이 있는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lt;br&gt;&#10;예. 그녀는 그저 계획만 하고 있고, 우리 몰래, 현군의 ID카드로 불법적인 자료를 검색&amp;rsquo;만&amp;rsquo; 할 뿐이죠. 그녀는 자신의 말과 달리 과학 기술에 상당히 해박하고 그중에서도 위험한 학문에 전문적입니다.&lt;br&gt;&#10;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시장은 내게 몇 가지를 지시한 후, 되돌려보냈다. 마지막으로 선장이 한 말은 자신이 한 말과, 내가 한 말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갇혀진 방주 내의 혼란은 그 어떤 일 보다 위험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만을 곱씹었다.&lt;br&gt;&#10;프림은 머리가 희고 눈이 붉어지는 알비노증이 있었다. 체구가 작고 피부는 혈관이 또렷하게 보일정도로 투명해서,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면 인간같지 않았다. 요정같았다. 그녀는 쇠를 무서워하고 나무를 사랑했다. 차가움을 싫어하고 온기를 좋아해, 사람들에게 부벼대기 좋아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당시에는 곤혹스러운 일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자, 프림은 여전히 부벼대기를 좋아했지만 나는 곤혹스럽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lt;br&gt;&#10;일이 일어난 것은 축제 당일,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탐사대원들과 함께 축제에 참석할 예정이었고, 프림은 씨앗 옮기기 행사의 준비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탐사대원들에게 프림과 함께 있고 싶다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선장의 말은 지켜졌다. 하지만 내가 이동한 곳은 씨앗 보관실이 아닌 방주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핵 융합로였다.&lt;br&gt;&#10;그리고 프림은 그곳에 있었다.&lt;br&gt;&#10;가스 수류탄을 사용한건지 경비원들은 자리에 널부러져있고, 자신은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공기 정화 시스템이 이미 가스를 환기 시키고 있었기에, 무리없이 프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lt;br&gt;&#10;내 부름에 프림이 돌아봤다.&lt;br&gt;&#10;그녀가 말했다. 방독면 안의 음성울림판이 그녀의 목소리를 탁하게 했다.&lt;br&gt;&#10;현? …너무 늦었어.&lt;br&gt;&#10;날 기다리고 있던건 아니고?&lt;br&gt;&#10;행사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 뿐이야. 작업은 전부 다 끝났어. 현이 내 앞으로 오기전에 작업은 끝나. 단추 하나만 누르면 되거든.&lt;br&gt;&#10;실제로 현은 팔짱을 끼는 여유까지 보였다. 하지만 현은 그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lt;br&gt;&#10;그런데 현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지? 아니. 알 거 같아. …아니. 모르겠어.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늦게 나타날리 없을텐데. 선장이 실수한거야? 현이 실수한거야?&lt;br&gt;&#10;둘 다 실수하지 않았어. 프림. 왜 그러는거야?&lt;br&gt;&#10;말해도 모를거야. 하지만 겨울을 한 번 더 만들고나면 다들 이해해주겠지.&lt;br&gt;&#10;문명이 모든걸 파괴할거라고 생각해?&lt;br&gt;&#10;맞아.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부수고 태우다가 마지막에 가서 몽땅 부서진 것을 보겠지. 그러면 이제 자기 몸에 기름을 붓는거야. 그게 인류의 역사지.&lt;br&gt;&#10;니가 하려는 짓이 자기몸에 기름을 끼얹는 짓인데도?&lt;br&gt;&#10;알아. 그러고나면 적어도 다른 것들은 남길 수 있거든.&lt;br&gt;&#10;후회할거야.&lt;br&gt;&#10;적어도 지금은 아냐. 그리고 후회할 뇌도 없어지겠지. 다행스럽게도 우라늄이 내 계산 보다 많이 남아 있었어.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기뻐하다가 사라질거야. …아, 시간이 다 됐네.&lt;br&gt;&#10;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프림은 날 바라보다가, 천천히, 모니터쪽으로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와 프림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날 사랑하지 않아?&lt;br&gt;&#10;…비겁하게.&lt;br&gt;&#10;프림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돌아보지는 않았다.&lt;br&gt;&#10;프림. 날 사랑하지 않아?&lt;br&gt;&#10;사랑해.&lt;br&gt;&#10;니가 사랑하는 나는, 니가 그러길 바라지 않아.&lt;br&gt;&#10;…그럼 사과할게. 미안해.&lt;br&gt;&#10;나는 이해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멈출 수 있다면 그녀는 애초에 시도도 안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보다 더 큰, 명백한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그 대의를 흔들어야할 것이다.&lt;br&gt;&#10;그녀의 등에 대고 내가 말했다.&lt;br&gt;&#10;벚꽃 향기 맡아보고 싶지 않아?&lt;br&gt;&#10;프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꽃이었다. 하지만 생물관에 피는 꽃은 그 가짓수가 너무 적었다. 연구소는 더 많은 생물 DNA를 보관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꽃이 가져올 생물관 내의 생태계 불균형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곤충과 동물들이 옮기지 않은 꽃들은 그 발달 정도가 약해 금방 시들고 향도 나지 않았다. 수 십 세대에 걸쳐 그저 살아남기에 매진한 식물의 모습이었다. 겨울나기 동안 살아남기 위해. 봄을 기다리며. 그리고 이제 그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면 식물들은 진짜배기 꽃을 피울 것이다. 책에서만 읽던 향내가 진동하고 나비와 벌들이 노니는 진짜 생태계가 생겨날 것이다. 인공 조명이 아닌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lt;br&gt;&#10;프림은 나를 돌아보더니 방독면을 벗었다. 그녀는 이제 제 목소리로 말했다.&lt;br&gt;&#10;응. 현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건지 알겠어. 현이 그저 어떤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느껴져. 고마워. 하지만, 너무 늦었어. 안녕.&lt;br&gt;&#10;프림은 그와 동시에 몸을 돌렸고, 나는 힘껏 뛰쳐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목이 쉬었으므로, 그녀의 이름이나 부정의 말을 크게 외쳤던 것 같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그녀의 손가락 끝이 아닌, 그녀 등 뒤에 꽂힌 붉은 레이져 포인트였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눈사람 만들려고요</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8%88%EC%82%AC%EB%9E%8C-%EB%A7%8C%EB%93%A4%EB%A0%A4%EA%B3%A0%EC%9A%94/</link><pubDate>Mon, 27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88%88%EC%82%AC%EB%9E%8C-%EB%A7%8C%EB%93%A4%EB%A0%A4%EA%B3%A0%EC%9A%94/</guid><description>&lt;p&gt;길을 걷던 중이었다. 편의점에 들리기 위해 집 나와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때, 길을 얼마 나서지 않아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골목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눈덩이가 굴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눈덩이는 느린 속도였기 때문에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 사이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lt;br&gt;&#10;대략 직경 일 점 오 미터, 내 키보다 커보이는 눈덩이. 어디서부터 저걸 굴려온걸까? 그러고보면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었고, 집에서 나오기 전 까지만 해도 싸릿눈이 흩날렸다. 나는 눈이 그치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lt;br&gt;&#10;눈덩이가 내 옆을 지나가길 기다렸다. 일단 저 눈덩이가 지나가야 내가 편의점에 갈 수 있기 대문이다. 커다란 눈덩이는 굴리기도 힘든지 조금씩,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인내를 가지면서 누가 저 눈덩이를 굴리고 있을지 생각해봤다.&lt;br&gt;&#10;생각해보면 간밤에 쌓인 눈 때문에 통행이 힘드니 그걸 치우는 공무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런 폭설. 부족한 설비. 늘어나는 민원. 결국 눈치우는 기계(이름은 모른다)가 없거나, 뿌리는 가루(염 어쩌곤데 역시 모르겠다)도 부족하고, 그 흔한 모래 조차 없어서, 눈덩이를 굴려서 눈을 치운다는 무식한 방법을 택한건 아닐까.&lt;br&gt;&#10;아니면 철없는 꼬맹이들 짓 일지도 몰랐다. 이 동네에는 와아 하면서 함성을 지르며 골목 이곳저곳을 쏘 다니는 꼬마들이 다수 있었고, 어마어마한 행동을 서슴치않고 행하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비비탄 총으로 총싸움을 하면서 자기가 스나이퍼랍시고 전봇대 꼭대기에 오른 경우를 들 수 있다. 결국 못내려와서 일일구 불렀었지.&lt;br&gt;&#10;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눈덩이가 옆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외의 전개에 깜짝 놀랐다.&lt;br&gt;&#10;눈덩이를 굴리는건 어떤 아가씨였다. 옷은 세련되게 입었지만 외모는 앳되 보였다.&lt;br&gt;&#10;당황해서 길이 났는데도 선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아가씬 학교도 안 가고 왜 저러고 있는거지? 저거 굴리면 누가 돈 주나? 가서 물어볼까? 우물쭈물 하고 있을때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다. &amp;ldquo;안녕하세요?&amp;rdquo;&lt;br&gt;&#10;머리카락 몇 가닥이 흐른 땀 때문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숨을 쉴 때 마다 흰 김이 피었다.&lt;br&gt;&#10;&amp;ldquo;아, 네. 안녕하세요?&amp;rdquo;&lt;br&gt;&#10;떨떠름하게 되받았다. 아가씨는 생긋 웃더니 말했다.&lt;br&gt;&#10;&amp;ldquo;안 바쁘시면 좀 도와주실래요?&amp;rdquo;&lt;br&gt;&#10;뭘 돕는단 말인가?&lt;br&gt;&#10;나는 눈짓으로 눈덩이를 의문가득한 눈길로 가리켰고, 아가씨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황스러웠다.&lt;br&gt;&#10;눈덩일 굴리는건 민폐다. 통행에 방해가 된다. 특히나 이렇게 커다란 눈덩이는 더 그렇다. 아니. 보통 민폐가 아니지. 이 눈덩이가 구르는 동안 사람도 못다니고 차도 못다닌다. 이 골목 사이론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는게 다행스럽긴 하지만.&lt;br&gt;&#10;또 문제는 요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는게, 분명 어린이날을 즐길 나이는 물론 질풍노도의 시기까지 다 지난 청년이라는 것이다. 다 큰 남자여자 둘이서 나란히 눈덩이 굴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그러겠냔 말이다.&lt;br&gt;&#10;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나는 또 다시 우물쭈물 거렸다. 생각하는게 있다고 그걸 입으로 다 뱉을 수야 없다.&lt;br&gt;&#10;아가씨는 조금 난처해진 표정을 지었다. &amp;ldquo;제가 괜히 물었나봐요.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으니까.&amp;rdquo; 그러곤 다시 눈덩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잠깐만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amp;rdquo;&lt;br&gt;&#10;아가씬 뒤돌아봤다.&lt;br&gt;&#10;&amp;ldquo;도와드릴께요. 어디까지 가세요?&amp;rdquo;&lt;br&gt;&#10;&amp;ldquo;별로 안 멀어요. 이쪽 앞에 초등학교 있잖아요. 거기 운동장이요.&amp;rdquo;&lt;br&gt;&#10;정말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옆에서 눈덩이를 같이 밀기 시작했다.&lt;br&gt;&#10;그리고 스무 걸음 정도 걷고서 후회했다. 뭔놈의 눈덩이가 이렇게 무거운지 한번 밀때 마다 묵직함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이런 놈을 혼자서 굴리고 있었습니까?&lt;br&gt;&#10;새삼 대단하다는 눈길로 옆 자리의 아가씨를 바라봤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생글생글이었다. 그렇다보니 나 또한 힘들다는 기색을 낼수가 없었다. 같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덩일 밀었다.&lt;br&gt;&#10;초등학교 까지는 큰 도로가 나오지도 않고, 골목을 몇 번만 꺾으면 되는 거리였는데도 반도 채 가지 못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최근 몇 개월, 아니 최근 몇 년간의 노동 중에 제일 힘든 일이었다. 굴러가면서 계속 몸을 키운 눈덩이는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져서 한번 굴릴때 마다 용을 써야했다.&lt;br&gt;&#10;그리고 시련이 왔다. 사실은 본래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몸을 쓰느라 머리로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다. 아마 아가씨가 몰랐던건 이 동네 지리에 익숙치 못했던 탓인거 같고.&lt;br&gt;&#10;우리는 대략 사십 오도각의 오르막길에서 눈덩일 멈추고 말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 길을 올라야했다. 지금의 두 사람으로는 절대 무리였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오르막길 있다는걸, 하, 깜빡했네요.&amp;rdquo;&lt;br&gt;&#10;&amp;ldquo;후아, 그러게요.&amp;rdquo;&lt;br&gt;&#10;둘 다 숨이 차서는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우리는 눈덩이에 기대 숨을 골랐다.&lt;br&gt;&#10;잠시 땀을 닦아내고 있는데 아가씨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죄송해요. 여기까지 왔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에요. 뭘.&amp;rdquo;&lt;br&gt;&#10;잠시 정적. 내가 먼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아가씨가 다시 말했다.&lt;br&gt;&#10;&amp;ldquo;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amp;rdquo;&lt;br&gt;&#10;&amp;ldquo;눈사람이요. 이거 눈사람 몸통하려고 굴려온거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정말요? 왜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그, 어릴 때는 눈오면 마냥 좋잖아요. 친구들이랑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근데 어느 순간에 보면 눈 오면 걱정부터 하잖아요. 길 미끄럽겠구나. 눈 녹으면 질척질척하겠구나. 하고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죠.&amp;rdquo;&lt;br&gt;&#10;&amp;ldquo;처음에, 어릴 때는 몰랐죠. 어른들이 그런 소리하면. 눈이 오는데 걱정할게 뭐 있어요. 어른들은 왜 눈오면 왜 안나가 노는지 몰라. 이런 생각이나 하고. 근데 뭐랄까. 그런거 있잖아요. 어릴때는 딱 넘어지면 먼저 아프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아프기보다는 막 쪽팔리고 이러잖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에.&amp;rdquo;&lt;br&gt;&#10;&amp;ldquo;아, 이야길 어떻게 꺼냈더라.&amp;rdquo;&lt;br&gt;&#10;&amp;ldquo;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어른이요.&amp;rdquo;&lt;br&gt;&#10;&amp;ldquo;참. 고마워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됬거든요? 만 십 구세 이상이면 어른이잖아요. 생일도 지나고요. 그런데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까맣게 잊고 있다가…… 겨울이 되고 눈이 자꾸 내리잖아요. 그제야 생각이 난거죠. 어떻게하지, 자꾸 생각하다가 자꾸 미루다가는 절대로 못만들겠구나 싶어서 오전 수업 빼먹을거 결심하고 눈덩이 뭉쳐서 굴리기 시작했어요.&amp;rdquo;&lt;br&gt;&#10;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거 같았다. 이야길 듣고보니 나도 눈사람을 완성시키고픈 마음이 들었다. 충분히 쉬었으니까 다시 시도하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lt;br&gt;&#10;그런데 갑자기 &amp;ldquo;빠아아앙-&amp;rdquo;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돌아보니 승용차 한대가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은 사실은 지금 눈덩이가 서 있는 곳이 골목길이긴 해도 나름대로 네거리라는 것, 큰 길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라 차량통행이 잦다는 것이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일단 뒤로 굴려서 딴 길로 빼놓을까요?&amp;rdquo;&lt;br&gt;&#10;아가씨는 당황한듯 말했다. &amp;ldquo;예? 아, 네.&amp;rdquo;&lt;br&gt;&#10;하지만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네거리라는건 길이 네 방향이라는거고, 어디서든 차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새 우리는 빵빵 거리는 자동차, &amp;ldquo;길 가운데서 뭐하는거야!&amp;rdquo; 하는 택시기사의 고함, &amp;ldquo;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겠네!&amp;rdquo; 하는 동네 아저씨(해뜬지가 언젠데?)의 고함에 갇혀버렸다.&lt;br&gt;&#10;탈출구는 초등학교 뿐이었다.&lt;br&gt;&#10;무안해진 우리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우왕자왕했다. 구경꾼이 많아졌다. 문방구 할머니, 목욕갔다 오는 아줌마들, 농땡이 치는 고딩, 자다깬 담너머 아저씨, 약수터 다녀오는 할아버지…… 이래서 눈덩이 같은거 밀고 싶지 않았는데! 게다가 이렇게 커다란건! 방금 전의 결심이 무색하게 후회가 되었다.&lt;br&gt;&#10;나는 아가씨와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둘이 눈덩이를 밀어올리는 수 밖에 없다. 아니, 하다 못해 길에서 벗어나게만 붙잡고 있어도.&lt;br&gt;&#10;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눈덩이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전혀 나지 않았다. 간만의 노동으로 되려 몸이 풀려서 그런걸까. 아니면 엄마 말대로 형이 젖을 다 먹어버려서 나는 모유를 못먹고 자랐기 때문일까.&lt;br&gt;&#10;나 뿐만 아니라 아가씨도 얼굴을 오만상 찡그리며 눈덩이에 붙어 있었다. 온 몸이 눈덩이에 달라 붙어서는 끙끙댄다. 이제는 용을 쓰는게 아니라 악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차가 지나갈때 까지만 기다리자. 아니다. 그냥 이 눈덩일 부셔버리자. 차라리 그게 낫다. 정 눈사람 만들고 싶으면 그냥 작게 만들어도 될 거 아냐. 거의 포기에 가까운 마음이었다.&lt;br&gt;&#10;그리고 눈덩이가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다. 손에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멈춰선 사이 눈덩이는 손에서 벗어나 저절로 오르막을 올랐다. 어떤가 싶어 돌아봤다.&lt;br&gt;&#10;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옆으로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같이 눈을 밀고 있었다. 내 옆으로도 자가용에 타고 있던 아저씨가 눈을 밀고 있었다. 도와주는건가? 힘이 났다. 다시 눈덩이를 밀었다.&lt;br&gt;&#10;아가씨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아, 고맙습니다.&amp;rdquo;&lt;br&gt;&#10;&amp;ldquo;이게 올라가야 우리 차도 빠지지.&amp;rdquo;&lt;br&gt;&#10;눈덩이는 또 가벼워졌다. 농땡이 부리던 고딩이었다. 안면이 있다.&lt;br&gt;&#10;&amp;ldquo;아저씨, 끄응, 도대체 이 눈덩일 왜 밀고 있는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헉, 눈사람 만들려고 그런다, 왜?&amp;rdquo;&lt;br&gt;&#10;내가 대꾸하니 괜히 차에 타고 있던 아저씨 한 분이 &amp;ldquo;허, 참.&amp;rdquo; 하고 웃었다.&lt;br&gt;&#10;눈덩이는 다시 가벼워졌다. 타월과 로션, 때수건이 든 바구니를 어딘가 두고 온 아줌마들이었다.&lt;br&gt;&#10;&amp;ldquo;학생들은 도대체 이걸 왜 민데?&amp;rdquo;&lt;br&gt;&#10;택시 기사 아저씨가 우리 대신 대꾸했다.&lt;br&gt;&#10;&amp;ldquo;후우, 눈사람 만든답디다.&amp;rdquo;&lt;br&gt;&#10;&amp;ldquo;허, 참. 아침 부터 뭔 난리래.&amp;rdquo;&lt;br&gt;&#10;그리곤 런닝구 차림의 동네 아저씨도, 아줌마들 바구니 옆에 약수통 두고 온 할아버지도, 읏챠읏챠 소리를 내며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거의 오를 무렵엔 초등학교 운동장도 소란스러워졌다. 멀리서 눈덩이를 본 저학년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와 눈덩이를 둘러싼 것이다. 동네 악동들도 여럿 있었는데 자기네들도 밀어보겠다고 붙기 시작했다. 덕분에 가장 힘들어야할 오르막길 끄트머리에서 처음 밀어올릴때 흘렀던 땀이 식어버렸다.&lt;br&gt;&#10;초등학교는 높은 곳에 있어서 바람이 술술 불었다. 춥기보단 시원했다. 6년이나 다녔는데도 졸업하고 들릴 일이 없었던 초등학교에 생경한 느낌도 있었다.&lt;br&gt;&#10;누군가 어깨를 두드리기에 올려다보니 문방구 할머니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lt;br&gt;&#10;&amp;ldquo;이렇게 주셔도 되요?&amp;rdquo;&lt;br&gt;&#10;&amp;ldquo;겨울이라 팔리지도 않는데 뭘.&amp;rdquo;&lt;br&gt;&#10;&amp;ldquo;어이쿠, 고맙습니다.&amp;rdquo;&lt;br&gt;&#10;잠시 커다란 눈덩이를 바라봤다. 역시 저걸론 허전하다. 머리가 있어야한다. 눈 앞에 쌓인 눈을 뭉쳐서 주먹만하게 만들고, 발로 이리저리 굴려서 수박만하게 만들고, 손으로 살살살 굴리기 시작한다. 또 봤는지 &amp;ldquo;저기서 머리만든다!&amp;rdquo; 하고 꼬맹이들이 외쳐선 자기네가 굴리겠다고 운동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lt;br&gt;&#10;머리는 금새 만들어졌고, 학교 기물을 빌려서 커다란 빗자루 두개로 팔을 삼고, 얼굴은 나무 판자를 꽂아 만들었다. 대략 높이 사미터에 이르는 초거대 눈사람이었다.&lt;br&gt;&#10;&amp;ldquo;햐, 장관이네. 장관.&amp;rdquo;&lt;br&gt;&#10;&amp;ldquo;진짜 멋있네. 신문 나는거 아닌가 몰라.&amp;rdquo;&lt;br&gt;&#10;&amp;ldquo;올 겨울 내내 눈사람 보게 생겼네.&amp;rdquo;&lt;br&gt;&#10;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쭈쭈바를 빨았다. 나는 감동에 젖은 눈빛으로 눈사람을 보고 있는 아가씨 옆으로 다가갔다.&lt;br&gt;&#10;사실 궁금한 게 있었다.&lt;br&gt;&#10;&amp;ldquo;근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든거에요? 꼭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가 있나?&amp;rdquo;&lt;br&gt;&#10;아가씨가 팔을 펼쳐들며 말했다.&lt;br&gt;&#10;&amp;ldquo;이때까지 눈사람 못만든 거, 빚 갚는다 생각하고 크게 만들고 싶었어요.&amp;rdquo;&lt;br&gt;&#10;활짝 웃는 얼굴이 예뻐서 나도 마주웃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잊힌 꿈</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E%8A%ED%9E%8C-%EA%BF%88/</link><pubDate>Mon, 27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E%8A%ED%9E%8C-%EA%BF%88/</guid><description>&lt;p&gt;창 밖으로 새가 재잘거리는 아침.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비비니 눈물이 묻어나왔다. ─또? 잠긴 목에선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만 동그랗게 모인다. 힘겹게 눈을 뜨자 왼쪽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은 입가를 지나 떨어져내려 손등에 툭.&lt;/p&gt;&#10;&lt;p&gt;최근 들어 잠에서 깨어날 때 마다 눈물이 괴었다. 눈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걸까? 문제가 있다면 안과에 가봐야하겠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 정도는 그다지 큰 병일거 같지는 않았다.&lt;br&gt;&#10;&amp;ldquo;…고 생각하는데.&amp;rdquo;&lt;br&gt;&#10;친구에게 말했다.&lt;br&gt;&#10;친구는 잠시 있어보라며, 제목도 없고, 그저 맨들맨들한 갈색 가죽에 쌓인 커다란 책을 한 권 꺼냈다.&lt;br&gt;&#10;&amp;ldquo;그거 뭐야?&amp;rdquo;&lt;br&gt;&#10;&amp;ldquo;백과사전.&amp;rdquo;&lt;br&gt;&#10;친구가 책장을 후드득 넘기며 말했다.&lt;br&gt;&#10;&amp;ldquo;눈꼽이 끼거나 눈이 충혈되거나 하지는 않아?&amp;rdquo;&lt;br&gt;&#10;&amp;ldquo;안 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잠을 잘 못잔다거나.&amp;rdquo;&lt;br&gt;&#10;&amp;ldquo;전혀.&amp;rdquo;&lt;br&gt;&#10;&amp;ldquo;꿈은 어떤걸 꿨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갑자기 꿈 이야기가 왜 나와?&amp;rdquo;&lt;br&gt;&#10;&amp;ldquo;여기 책에 적혀있어. &amp;lsquo;잠에서 깨어 눈물이 흐를 때 3, 꿈을 꿨을 경우&amp;rsquo; 무슨 꿈을 꿨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몰라. 뭔가 꾸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그 책 도대체 무슨 책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백과사전이라니까. 아, 여기있군.&amp;rdquo;&lt;br&gt;&#10;&amp;ldquo;뭐가?&amp;rdquo;&lt;br&gt;&#10;친구는 날 무시하고 또박또박 사전을 읽어갔다.&lt;br&gt;&#10;&amp;ldquo;&amp;lsquo;위와 같은 신체적 이유 말고도 꿈 속에서 겪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꾼 꿈에 따라서 치료 방법이 다릅니다. 자신이 죽는 꿈을 꿨다면 1,3522 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꿈을 꿨다면 2,7223 페이지, 그 외에 꿈이라면 5,3742 페이지로 이동하세요.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른다면 9,3573 페이지로 이동해 꿈을 기억하는 방법을 참고하세요.&amp;rdquo;&lt;br&gt;&#10;&amp;ldquo;게임북?&amp;rdquo;&lt;br&gt;&#10;&amp;ldquo;백과사전이라니까 그러네. 넌 기억 안 난다 그랬지? 9,3573 페이지로 가야겠군.&amp;rdquo;&lt;br&gt;&#10;친구는 책장을 잔뜩 잡아 넘겼다.&lt;br&gt;&#10;&amp;ldquo;&amp;lsquo;꿈을 기억 하는 방법 첫 번째. 머리에 강한 충격을 줍니다. 2.5 킬로그램 이상의 질량을 가진 물체로 꿈을 기억하려는 사람의 머리를 성인 남성의 힘으로 강타하면 만 분의 일의 확률로 꿈이 기억납니다. 주의. 천 분의 일의 확률로 기억을 잃기도 합니다.&amp;rsquo; 해볼래?&amp;rdquo;&lt;br&gt;&#10;&amp;ldquo;거절.&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amp;lsquo;두 번째. 잠에서 깨자마자 희미한 꿈을 메모해두면 거기에서 꿈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amp;rsquo; 했어?&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amp;rdquo;&lt;br&gt;&#10;&amp;ldquo;&amp;lsquo;세 번째. 잊고 살다보면 기억 나기도 합니다.&amp;rsquo;&amp;rdquo;&lt;br&gt;&#10;&amp;ldquo;어쩐지 백과사전이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amp;rdquo;&lt;br&gt;&#10;&amp;ldquo;그럴 리가 있나. 하나 더 있어. &amp;lsquo;네 번째. 44,9213 페이지의 제조법을 따른 약물을 마셔보세요.&amp;rsquo;&amp;rdquo;&lt;br&gt;&#10;&amp;ldquo;잠깐. 그 책이 사십만 페이지 까지 있다고?&amp;rdquo;&lt;br&gt;&#10;친구는 히죽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lt;br&gt;&#10;&amp;ldquo;쯧쯧. 태클이 늦어. 그 소리는 일 만 페이지 넘길 때 이야기 했어야지.&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문제가 아니라…&amp;rdquo;&lt;br&gt;&#10;친구는 무시하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페이지를 넘기는 정도가 아니라 책 자체를 넘겼고, 책이 올려진 책상을 넘겼고, 사실은 책상이 아니라 책상이 놓여진 교실을 넘겼다. 아침 햇살이 비져 나오던 창문 밖으론 노란 별빛이 쏟아지고, 나무로 된 책걸상은 세련된 철제로, 녹색 칠판은 가상현실출력기로 바뀌어 있었다.&lt;br&gt;&#10;친구는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lt;br&gt;&#10;&amp;ldquo;&amp;lsquo;우라늄 4 작은 술, 반물질 2 큰 술, 암흑물질 2 작은 술, 암흑에너지 1/2 작은 술…&amp;rsquo;&amp;rdquo;&lt;br&gt;&#10;&amp;ldquo;구할 수 있겠냐!&amp;rdquo;&lt;br&gt;&#10;&amp;ldquo;&amp;rsquo;…가 구하기 힘들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로도 구할 수 있습니다. 잡초 한 포기, 이슬 한 방울, 흙 한 줌, 구름 한 조각, 햇빛 한 줄기, 봄비의 상쾌함, 36.5도의 체온, 보드라운 살결, 애정어린 시선, 따뜻한 포옹.&amp;rsquo;&amp;rdquo;&lt;br&gt;&#10;나는 눈을 깜빡였고, 친구는 &amp;ldquo;여기에선 못 구하겠네.&amp;rdquo; 말하곤 다시 교실을 뒤집었다.&lt;br&gt;&#10;이제 드넓은 들판에 나와 친구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때마침 계절은 봄이었고, 기억을 되살리는 약의 재료는 모두 모여 있었다. 친구는 나를 껴안았다.&lt;br&gt;&#10;친구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어때, 기억나?&amp;rdquo;&lt;br&gt;&#10;&amp;ldquo;응.&amp;rdquo;&lt;br&gt;&#10;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물을 닦았다.&lt;br&gt;&#10;이런 꿈이었기 때문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존은 맛있다</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1%B4%EC%9D%80-%EB%A7%9B%EC%9E%88%EB%8B%A4/</link><pubDate>Mon, 27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1%B4%EC%9D%80-%EB%A7%9B%EC%9E%88%EB%8B%A4/</guid><description>&lt;p&gt;리사는 예쁘다. 케인은 힘이 쎄다. ‘나’는 똑똑하다. 우리는 모두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존은 맛있었다.&lt;br&gt;&#10;누구나 금요일날 저녁에는 존의 허벅지살을 먹고 싶어한다. 심지어 존의 허벅지살은 ‘존A’도 좋아한다. 모두가 금요일날 저녁을 고대한다. 저녁 만찬에는 존의 허벅지살 스테이크와 존의 입술 튀김과, 존의 삶은 간이 올라온다.&lt;br&gt;&#10;우리는 일주일 내내 케인이 도축한 뒤 가공한 존을 먹어왔기 때문에 언제나 신선한 고기를 필요로했다. 하지만 먹고 싶은 만큼먹을 수는 없다. 모두가 ‘적정량’을 배정받아 먹어야만 한다. 적정량을 어기면 우리 네 사람은 모두 죽는다.&lt;br&gt;&#10;내 계산에 따르면, 우리가 적정량을 어기고 누군가 더 많이 먹거나 덜 먹게 된다면 균형이 깨진다. 예를 들어서 존A는 저녁 식사에서 가장 많은 음식을 먹는다. 존A가 적정량보다 덜 먹은 상태로 ‘복사기’에 들어간다면 우리가 다음에 먹는 존은 양이 적어진다.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 모두가 먹는 에너지가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lt;br&gt;&#10;우리는 각자의 임무가 있고, 그 일을 수행하는데는 에너지가 들어간다. 누군가 더 먹고 덜 먹을 수가 없다. 우리를 지배하는 케인 조차도 이 규칙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구에서 떠나올 때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이다.&lt;br&gt;&#10;우리는 최소한의 자원과, 최소한의 인원으로 지구에서 벗어나야했다. 우리의 균형을 지켜주는 것은 복사기다. 복사기는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졌고, 딱 존 한 사람만큼만 복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나는 복사기를 정비한다. 존은 음식이다. 리사는 전리품이다. 케인이 모두를 지배한다. 존이 모두의 것인 것과 달리, 리사는 오직 케인의 것이다. 리사는 케인의 권력을 증명한다.&lt;br&gt;&#10;언젠가 복사기로 들어가는 존A에게 나는 “괜찮냐”고 물었다. 존A는 5초 정도 생각하곤 괜찮다고 했다. 존A는 자신의 불행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아이큐가 낮게 설정되었다. 존A는 복사된 존에게서 어떠한 공감도 하지 못한다. 그럼 그는 불행하지 않은걸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케인이 존을 도살할때면 존의 비명은 언제나 길고 애처롭다. 존은 매번 살려달라고 말한다. 케인은 자신의 근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시간 존을 괴롭힌다. 주말 내도록 존은 죽지 않는다. 우리는 신선한 음식을 먹어야한다.&lt;br&gt;&#10;문제를 일으킨 것은 리사였다. 왜냐하면 리사는 딴 생각을 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케인은 주말마다 존을 도살하기 위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운동을 했고, 존A에겐 생각할 지능이 없었으며, 나는 다른 것들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우주선과 복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바빴다. 복사기는 우주선 외부로부터의 에너지를 대부분 소비하고 있었다. 우주는 텅 비어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나오곤 했고, 조금만 잘못 조절해도 우리 모두가 죽을 수 있었다.&lt;br&gt;&#10;그래서 그 누구도 리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리사는 존A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두꺼운 가죽과 비계덩어리를. 케인이 숟가락을 들 때마다 비웃는, 작은 뇌를 가진 존A를. 사랑이 아니고서야 존A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내 계산에 따르면 존A는 식욕과 비등한 욕구가 아니고서는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존A가 케인에게 화를 내는 순간은 식탁 위 뿐이다. 그리고 존A에게 식욕과 비등한 것은 성욕 뿐이다. 리사가 사랑을 느끼지 않고서야 존A와 할리가 없지 않은가?&lt;br&gt;&#10;내가 금요일 저녁을 앞두고 복사실 정기 정감을 마치고 밖으로 나올때, 느닷없이 존A가 나를 덮쳤다. 존A는 케인보다는 힘이 약하지만 나보다는 힘이 쎘다. 거대한 존A는 몸으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복사실 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A가 아니라 복사된 나였다. 복사실에는 네모난 스크린이 있었고, 갑판에 있는 나A가 보였다.&lt;br&gt;&#10;나A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존A와 리사가 규칙을 어겼다. 존A는 주어진 임무인 &amp;lsquo;음식&amp;rsquo;의 의무를 버리려고 했고, 리사 또한 케인의 &amp;lsquo;전리품&amp;rsquo;의 의무를 저버리고 존A를 움직이기 위해 그와 동침했다. 존A가 &amp;lsquo;나&amp;rsquo;를 밀어넣고 리사가 버튼을 눌렀지. 뒤늦게 케인이 두 사람을 제압했지만, 이미 복사기가 돌아가버렸고, 이번주 에너지가 바닥났다. 알다시피 우리는 일주일이나 굶을 수 없다. 때문에 예외적으로 규칙을 적용하기로 했다.&amp;rdquo;&lt;br&gt;&#10;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이미 균형은 깨졌다. 내가 둘이라면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도 있다. 내 임무는 우주선과 복사기를 관리하는 것이지 음식이 아니다. 더 맛있는 것은 존이다. 하지만 나A는 내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lt;br&gt;&#10;&amp;ldquo;절차는 알고 있겠지. 모두 균형을 위해서다.&amp;rdquo;&lt;br&gt;&#10;나A가 말을 마치자 복사실 문이 열린다. 케인이 칼을 들고 서있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허물어지다</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7%88%EB%AC%BC%EC%96%B4%EC%A7%80%EB%8B%A4/</link><pubDate>Mon, 27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7%88%EB%AC%BC%EC%96%B4%EC%A7%80%EB%8B%A4/</guid><description>&lt;p&gt;나는 손바닥 위에 올라온 붉은약 한 알을 내려다보았다. 붉고 반투명하다. 다시 희를 본다. 희에겐 불안하거나 초조해보이는 태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당함이나 뻔뻔함을 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한 약간의 긴장은, 언제나 희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나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희, 넌 그 이야기를 믿고 있어?&lt;br&gt;&#10;글쎄요. 믿는다기 보다, 어떻게 설명해드려야할지. …이를테면 이 약을 먹는다는건,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믿지 않는 일이죠.&lt;br&gt;&#10;새끼 손가락?&lt;br&gt;&#10;예. 분명 여기 있지만. 희는 왼손을 주먹 쥐고 새끼 손가락만 펴서 까딱였다. 이게 내 진짜 손가락이 아니라 가짜 손가락이라고 생각이 드는거죠. 분명 모양도 길이도 느낌도 똑같은데 아, 이건 정말 가짜인것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는 결론을 내버린거죠.&lt;br&gt;&#10;무슨 말이야.&lt;br&gt;&#10;…음. 믿지 않더라도 손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새끼 손가락을 사용하게 되버리잖아요? 의식하지 않아도 새끼 손가락은 분명 새끼 손가락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거죠. 믿지 않아도 사용해버릴 수 있달까.&lt;br&gt;&#10;잘 모르겠는걸.&lt;br&gt;&#10;드셔보시면 알 거에요.&lt;br&gt;&#10;하지만…&lt;br&gt;&#10;…마약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약은 달라요. 분명 사람을 중독시키는 성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한 알 뿐이라면, 몇 시간 쯤 지나면 자연스럽게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니까.&lt;br&gt;&#10;그럼 계속 약을 먹는 이유가 뭐야?&lt;br&gt;&#10;새끼 손가락을 믿고싶지 않아서죠.&lt;br&gt;&#10;나는 다시 약을 내려다보았다.&lt;br&gt;&#10;한 알 뿐이라면. 나는 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희는 무언가의 약에 취한 사람이라기엔 너무 총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에도 흐트러짐이 없고, 논리가 비약하는 점도 없다.&lt;br&gt;&#10;어쩌면 이 약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 이야기부터 너무 허무맹랑하다. 그렇다면 어떠한 환각을 보여주는 마약이는 생각이 들지만, 희가 마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믿기 힘들다. 평소의 희에게서는 마약을 하고 있다는 어떠한 징조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약에 대한 소문은 평범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너무 소란스러울 필요가 없는.&lt;br&gt;&#10;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약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혀끝에 닿는 감각이 쓰거나 하지는 않다. 어쩌면 달달하다고 할까. 동아리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한모금 마시자, 쉬운 일이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아무 일도 없는데.&lt;br&gt;&#10;어떻게 바로 효과가 나타나겠어요. 그래도 보통 한 시간이 지나기전에 효과가 나타난다고해요.&lt;br&gt;&#10;한 시간이라…. 한 시간 뒤라면 오후 수업이 시작될텐데.&lt;br&gt;&#10;상관없을거에요.&lt;br&gt;&#10;자신하는 표정이다. 나는 희를 믿기로 하고, 희를 돌려보냈다.&lt;br&gt;&#10;문득 너무 쉽게 희의 꼬임에 넘어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처럼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지독한 마약이라면 나도 이 마약에 중독되어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마약이 내 예측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 역시 이런 미신을 믿지 말라고 희에게 좋게 타이르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담 붉은약을 먹음으로써 어느 쪽이든 이 약이 다른 이들이 알게되는 일은 없어진 셈인가. 희는, 정말이지 똑똑한 아이다.&lt;br&gt;&#10;이내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시작되었다. 수업의 처음에는 약을 의식했지만, 머리가 어지럽거나 가슴이 들뜨는 것 같은 약기운은 없었다. 컨디션에 이상이 없자 수업에 집중했고, 어느새 5교시가 끝나 있었다. 나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lt;br&gt;&#10;떨떠름해진 느낌에 쉬는 시간을 틈타 희를 찾아갔다.&lt;br&gt;&#10;교실까지는 들어서지 않고, 교실 문간에서 다른 아이에게 부탁해 희를 불렀다. 희는 다소 의아하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lt;br&gt;&#10;희가 말했다.&lt;br&gt;&#10;선배님, 어쩐일로?&lt;br&gt;&#10;희. 내게 준 약이, 그 약 맞아? 혹시 잘못 준 것 아니야?&lt;br&gt;&#10;예?&lt;br&gt;&#10;…그 붉은약 말이야. 소원을 이뤄준다는 약. 점심시간에 줬던 그거.&lt;br&gt;&#10;아니, 무슨 말씀이신지.&lt;br&gt;&#10;희의 표정은 당황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개된 장소에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걸까. 하지만 우리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에겐 방과후에 동아리실에서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희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곤 교실로 돌아갔다.&lt;br&gt;&#10;하지만 희는 정말로 당황하고 있었다. 뭔가 눈치를 주거나 이야기를 하지말라는 제스쳐는 없었다. 나는 약간 불안해진 마음으로 나머지 수업을 받았다.&lt;br&gt;&#10;수업이 끝나는길로 동아리실로 걸음을 옮겼다. 동아리실은 별관 3층에 있어, 희의 반이 있는 3층에서 공중복도를 통해 곧장 갈 수 있었다. 희는 교실에 있지 않았으므로 동아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희를 보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lt;br&gt;&#10;아, 선배님. 희는 읽고 있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까 그 약 이야기는, 무슨 말이죠?&lt;br&gt;&#10;책의 제목은 벽오금학도였다. 어렸을적 선계에 들어갔다 머리가 희어진 아이가, 다시 선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내용이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희. 점심시간 때, 기억 안나?&lt;br&gt;&#10;글쎄요. 점심시간이라면, 동아리방에서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은 기억밖에 없는걸요.&lt;br&gt;&#10;맞아. 도시락을 까 먹다가 희는 잠깐 화장실로 갔지. 그리고 희 가방 안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들려와서 나는 가방을 열었어. 그리고 사탕함을 발견했고, 사탕을 하나 먹어볼까, 하다가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았지.&lt;br&gt;&#10;그리고 그 내용물이 &amp;lsquo;약&amp;rsquo;이었고요?&lt;br&gt;&#10;맞아. 기억나?&lt;br&gt;&#10;희는 미간을 좁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lt;br&gt;&#10;선배님,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친한 후배라도 그렇지, 가방을 그렇게 막 뒤지시는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그보다도. 게다가 아까부터 이상한 이야길 하시는데, 저는 아무런 약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선배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꿈이라도 꾸고 계신…, 선배님?&lt;br&gt;&#10;나는 희에게 다가갔다. 이제 희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아서 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lt;br&gt;&#10;나는 희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어.&lt;br&gt;&#10;장난이 아니에요.&lt;br&gt;&#10;약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게 겁났기 때문일까? 그래서 점심시간때부터 약을 깨끗하게 숨기고서, 이제는 뻔뻔하게 약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lt;br&gt;&#10;나는 말하면서 희의 고운 두 손목을 붙잡았다. 희가 손목을 빼려고 하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화가 난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희는 나와 눈을 맞추곤 말했다.&lt;br&gt;&#10;…선배님, 일단 진정하시는게. 저는 제 이야기를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직도 선배님이 왜 화를 내시는지 몰라요. 만약 제가 잘못한게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lt;br&gt;&#10;나는 이런 태도인데도 희는 공손하다. 내가 실수한걸까.&lt;br&gt;&#10;내가 붉은 약에 대해 추궁했을 때, 희는 그 약이 소문의 그 약이라고 말했어.&lt;br&gt;&#10;소문의 약이라면, 어떤 약을 말씀하시는지.&lt;br&gt;&#10;…먹으면 소원을 이루어진다는 약이야. 정말로 먹었다는 사람은 친구의 친구 밖에 없다는 그런 약. 그런 약을 희가 가지고 있었어. 나는 그 약을 다른 선생님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희는 그러지말아달라고 말했어. 몸에 해로운건 하나도 없다고. 그저 소원을 이루어줄 뿐이라고 말이야.&lt;br&gt;&#10;…그러고보니 선배님. 제가 선배님에게 그 약을 드렸다고 하지 않았나요?&lt;br&gt;&#10;맞아. 나는 그 약을 먹어보고 정말로 해로운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했어.&lt;br&gt;&#10;그래서, 소원은 이루어졌나요?&lt;br&gt;&#10;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lt;br&gt;&#10;희는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lt;br&gt;&#10;그럼 선배님이 화를 낼 부분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lt;br&gt;&#10;왜?&lt;br&gt;&#10;마약은 가짜로 밝혀졌으니, 제가 숨기든 아니든 아무 일도 아니게 되었잖아요.&lt;br&gt;&#10;희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희는 자연스레 손목을 빼서 주물렀다. 손은 피가 통하지 못해 희었고, 그 아래로 내가 붙잡은 손자국이 또렸했다. 그 부분에서라면 분명 내 태도는 잘못되었다. 하지만.&lt;br&gt;&#10;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사실이야.&lt;br&gt;&#10;…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그런 약에 대해서 몰라요.&lt;br&gt;&#10;희의 눈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졌다.&lt;br&gt;&#10;희가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lt;br&gt;&#10;만약,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한 사람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lt;br&gt;&#10;…괜찮아.&lt;br&gt;&#10;선배님이 약을 드셨다면, 그렇게 믿는건 약의 작용 때문 아닐까요.&lt;br&gt;&#10;약을 먹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데. 나는 중얼거렸지만 불필요한 말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도 약의 작용이라면. 멀쩡한 정신으로 깨어있다는 착각이라면. 희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lt;br&gt;&#10;결국 그 약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그 약은 정말 &amp;lsquo;소원을 이루어주는 약&amp;rsquo;일지도 몰라요.&lt;br&gt;&#10;정확히는 그런 환상을 보여주는 약이겠지만.&lt;br&gt;&#10;선배님의 소원은 무엇인가요?&lt;br&gt;&#10;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답이 특별히 비밀이라서가 아니었다. 약을 삼키며 특정한 소원을 기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뭔갈 바라면서 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된다. 나는 이 사실을 희에게 말했다.&lt;br&gt;&#10;희가 말했다.&lt;br&gt;&#10;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 약을 먹으면 아무 일도 없다, 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변화가 생겼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다면 선배님은 무언가를 바랐고, 그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모순된 상황과 기억이 나타나게 되었다, 라는 건 어떨까요?&lt;br&gt;&#10;내가 이런 복잡한 일들을 바랐다고?&lt;br&gt;&#10;그건 또 그렇네요. 희가 킥킥 웃었다. 선배님에겐 어울리지 않네요. 이 상황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선배님이 정말로 바란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지 몰라요. …선배님은 약이 아무 것도 아니길 바랐나요?&lt;br&gt;&#10;응.&lt;br&gt;&#10;약이 없어지길 바랐나요?&lt;br&gt;&#10;응. 약간은.&lt;br&gt;&#10;왜죠?&lt;br&gt;&#10;불필요한 질문 아냐? 그럼에도 나는 대답했다. 고작 별 것 아닌 약 때문에 소중한 후배와 내 신념을 저울질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lt;br&gt;&#10;고맙네요. 장난스럽지만 따스한 어투였다. 그렇지만 겨우 그런 바람들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건 의아한데요. 그런 바람이라면 환상 속에서 약이 없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런 기억간 모순이 생길게 아니라.&lt;br&gt;&#10;그것도 맞는 말이네.&lt;br&gt;&#10;…선배님은 저랑 다투고 싶었을까요?&lt;br&gt;&#10;뭐? 나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아냐. 그럴리가.&lt;br&gt;&#10;그럼 그 반대? 저랑 단 둘이 있고 싶었던걸까?&lt;br&gt;&#10;….&lt;br&gt;&#10;왜 대답을 못하시죠….&lt;br&gt;&#10;…하지만 애초에 이 동아리실은 늘 나와 희 전용이잖아.&lt;br&gt;&#10;그런식으로 말씀하시면 부끄럽거든요. 신입생을 받지 못하는 동아리라는 사실이.&lt;br&gt;&#10;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주 오랜만의 농담인 거 같았다.&lt;br&gt;&#10;하지만. 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무서운데요.&lt;br&gt;&#10;어째서?&lt;br&gt;&#10;현실은 소망이 결핍된 상태니까요.&lt;br&gt;&#10;나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amp;lsquo;어차피 한 알 뿐이라면, 몇 시간 쯤 지나면 자연스럽게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니까.&amp;rsquo;&lt;br&gt;&#10;나는 마른 입술을 물었다.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까. 희와 내가 갑자기 멀어지고, 함께 농담하고 웃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정말로 약이 일으킨 변화라면, 아주 약간의, 기억의 소소한 오류밖에 없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이 모호한 약이 그렇게 많은 변화를 초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lt;br&gt;&#10;내가 희를 부르자, 희가 대답했다.&lt;br&gt;&#10;예?&lt;br&gt;&#10;아니, 아무 것도 아냐.&lt;br&gt;&#10;그렇다. 바뀐 것이 없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lt;br&gt;&#10;희가 말했다.&lt;br&gt;&#10;괜찮으세요? 선생님?&lt;br&gt;&#10;응.&lt;br&gt;&#10;그 약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하실것인지. …드신 약은 어땠나요?&lt;br&gt;&#10;희는 초조해보이는 눈빛이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희. 어디까지가 환상이지?&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두 번째 총</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91%90-%EB%B2%88%EC%A7%B8-%EC%B4%9D/</link><pubDate>Sun, 26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91%90-%EB%B2%88%EC%A7%B8-%EC%B4%9D/</guid><description>&lt;p&gt;어디부터 볼까?&lt;br&gt;&#10;왼쪽의 눈부신 금발이 눈길을 끈다. 금발머리. 내 왼편에 선 것은 금발이 아름다운 여성이다. 나는 그녀를 안다. 우린 사랑했었다. 입을 맞추고, 함께 잠들고, 미래를 약속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옛날 일이다.&lt;br&gt;&#10;그리고 오른쪽. 낡은 바바리코트의 중년 남자. 뭐라고 부를까? 그의 직업은 형사다. 입으로 읊조려본다. 형사. 심심한 맛이 있지만 그냥 형사라 부르겠다. 그는 나를 잡기 위해 왔다.&lt;br&gt;&#10;나는 어떤가? 까치머리가 눈에 뜨일 것이다. 너절한 외관이지만 그럭저럭 봐줄만하다. 직업은? 소개하고 싶어도 적당한 이름이 없다. 내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lt;br&gt;&#10;나는 일을 잘 하는 편이었다. 내 총이 빠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총알을 쏘기 전에 &amp;lsquo;생각&amp;rsquo;한다. 생각은 총을 느리게 만든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lt;br&gt;&#10;하지만 너무 빠른 총은 잘못발사되곤 한다.&lt;br&gt;&#10;내 총알이 금발머리의 오빠를 꿰뚫었던 것도 그런 종류의 실수였다. 나는 방아쇠를 당긴 다음에야 사과를 했다. 금발머리는 용서하지 않았다. 이해한다. 나는 그가 금발머리의 또 다른 애인인줄 알았으니까.&lt;br&gt;&#10;금발머리는 당장에라도 날 쏘아죽이고 싶겠지만 그건 쉽지 않다. 그녀가 날 겨누는 순간 형사의 총구가 그녀를 향할 것이기에. 금발머리는 형사의 딸을 납치한 적 있다. 그리고 딸은 죽었다. 사고였다는 변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똑똑히 지켜봤으니 그 모든 일은 사실이다.&lt;br&gt;&#10;형사도 금발머리를 쏘고 싶겠지만, 움직이지 못한다. 내가 있으니까. 형사의 총구가 금발머리를 향할 때 내 총구도 형사를 향할 것이다. 난 잡히고 싶지 않다. 눈 앞의 살인자가 자비를 배운 적 없다는 사실을 형사는 잘 알고 있으리라.&lt;br&gt;&#10;셋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돈다. 총은 이미 쥐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면, 다른 이의 총이 날 겨눈다.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그려진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할 순간이다.&lt;br&gt;&#10;나는 총을 바닥에 던졌다.&lt;br&gt;&#10;번뜩이는 두 사람의 눈빛과 함께 금발머리와 형사의 총구가 빛났다. 동시에 들려온 두 발의 총성에 귀가 먹먹해진다. 쓰러진 건 형사. 승자는 금발머리. 금발머리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나를 봤다. 깜짝 놀란 그 표정이 날 기쁘게 했다.&lt;br&gt;&#10;이제 숨겨뒀던 두 번째 총으로 금발머리를 쏜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악보의 완성</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5%85%EB%B3%B4%EC%9D%98-%EC%99%84%EC%84%B1/</link><pubDate>Sun, 26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5%85%EB%B3%B4%EC%9D%98-%EC%99%84%EC%84%B1/</guid><description>&lt;p&gt;남자가 빈 악보를 펼치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lt;br&gt;&#10;남자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떠올린 첫번째 음표를 악보에 그렸다. 그러자 완전히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의 첫번째 물방울이 떨어져내렸다. 남자가 두번째 음표를 그리자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 한 줄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남자가 세번째 음표를 그리자 그 바람의 남자의 목덜미를 스쳤다. 남자는 머릿속의 음을 기호로 남기는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은 남자가 빈 악보의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만큼만 멈췄다.&lt;br&gt;&#10;하지만 눈이 내리는 날 남자는 악보를 쓰던 도중 창밖을 내다보고 말았다. 눈들은 하늘에 붙박혀서 그대로 있었고, 깜짝 놀란 남자는 악보를 내팽개치고 문 밖으로 나섰다. 눈송이들은 남자의 몸에 닿고 나서야 천천히 녹아내렸다. 남자는 흠뻑 젖으며 거리를 돌아다닌 다음에야 시간이 흐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남자는 가끔씩 악보 쓰기를 멈추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산책을 이어갔다.&lt;br&gt;&#10;남자는 그런 행동이 자신의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악보를 쓰다말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느라 남자의 음악은 자연스러움과 멀어졌다. 그것은 남자가 만든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악보를 보고 연주하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팔리지 않는 악보 때문에 주눅들었고 악보를 쓰다가 멈추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자연히 악보는 더 팔리지 않았고 남자는 점점 더 악보를 쓰는 시간을 줄였다.&lt;br&gt;&#10;어느 날 남자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악보를 쓰다가 멈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악보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의 커피에 액젓을 타는 장난을 치거나, 은행에서 돈을 훔친 다음 지갑에 넣을 수 있는만큼 넣고 나머지는 허공에 뿌렸다. 돈은 흩뿌려진 그대로 떠있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엔더</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94%EB%8D%94/</link><pubDate>Sun, 26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7%94%EB%8D%94/</guid><description>&lt;p&gt;저택은 아침부터 바빴다. 마을에 엔더가 올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주인님은 가병들을 체크하고 거친 용병들을 들이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장한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주인님은 엔더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엔더를 붙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야욕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엔더는 죗값을 치루지 않는 이들을 죽이고 정의를 바로세운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얼굴을 본적이 없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엔더 이야기가 죄 많은 이들의 죄책감 속에서 만들어낸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엔더가 정말로 있다는 걸 안다. 마을 사람들이야 뜬소문 밖에 모르지만 주인님 앞으로 오는 편지에는 뜬소문이 아닌, 엔더가 저지른 진짜 살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날아오곤 했다. 그러니까 &amp;lsquo;부고&amp;rsquo; 말이다. 어느날 누군가 죽었고, 그 주인님의 지인은 주인님이 속한 (악취미를 즐기는) 사교 클럽 사람이거나, 주인님의 잔인한 피를 이은 먼 친척이거나, 주인님의 취미활동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거나 했다. 가장 최근에 죽은 이는 먼 나라에서노예를 데려와 파는 노예상이었다. 주인님은 자신의 취미가 비천한 것들은 즐기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고상한 취미라고 말해왔지만, 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 안색이 안좋아지기 시작한걸 보면 자신의 악덕에 대해 분별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러날이 지나도 엔더는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밥을 축내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소문이 잦아지자 주인님은 용병의 숫자를 조금씩 줄였고, 곧 언제나처럼 가병만 남겨두었다. 그러는동안 마을의 소문도 잦아들었다. 주인님은 엔더를 붙잡지 못해서 아쉬워했지만 취미에 다시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한때의 악취미를 위해 죽은 노예 시체들을 청소하던 중 주인님과 그 악우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제아무리 엔더라 하더라도 날 상대하긴 두려웠나보지. 그 순간 나는 엔더가 누구이며, 왜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열두살 때 노예로 팔려왔던 내가, 얼굴이 못생겨 흥을 해친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내가, 수 많은 노예들에게 괜찮다고 아무일 없을 거라고, 주인님은 아주 선량한 분이라고 거짓말을 해왔던 내가, 주인님의 악행을 그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있었던 내가 바로 엔더였다. 그들이 가장 무방비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들에게 죄값을 치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두려움 안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도 나였다. 나는 빗자루를 놓고 칼을 집었다. 이제 나는 엔더가 될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잘린 머리의 쓸모</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E%98%EB%A6%B0-%EB%A8%B8%EB%A6%AC%EC%9D%98-%EC%93%B8%EB%AA%A8/</link><pubDate>Sun, 26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9E%98%EB%A6%B0-%EB%A8%B8%EB%A6%AC%EC%9D%98-%EC%93%B8%EB%AA%A8/</guid><description>&lt;p&gt;앞서 가던 1톤 트럭은 브레이크를 밟았고 시속 80km로 뒤따르던 준의 승용차는 그 꽁무니를 들이박았다. 트럭에 실려있는 자재들이 튕겨져 나왔고, 동시에 준이 탄 승용차의 앞좌석 에어백이 터졌다. 준은 반작용으로 몸이 앞으로 밀쳐졌고 안전띠가 걸리며 준의 갈비뼈를 압박했다. 준은 터져나온 에어백에 얼굴을 묻었다가 탄력 때문에 튕겨져 나갔다. 그때 트럭에 실려진 자재 중 철재 합판이 앞면 유리를 깨부수며 날아들어와 준의 목을 잘랐다. 합판은 뒷자석에 박혔고 준의 머리는 조수석으로 굴러떨어졌다.&lt;br&gt;&#10;그 순간 머리가 잘린 준은 고질병이었던 어깨 결림이 개운하게 나았다는 걸 알았다. 준의 머리는 잘린 혓바닥을 작게 빼물고 있었지만 준의 몸은 멀쩡했다. 준은 차문을 열고 안전띠를 풀고 밖으로 걸어나왔다.&lt;br&gt;&#10;트럭 운전사는 이미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lt;br&gt;&#10;괜찮아요?&lt;br&gt;&#10;준은 머리를 들지 않은 손을 절래절래 내저었다.&lt;br&gt;&#10;트럭 운전사는 준의 손동작을 괜찮다는 뜻으로 확인하고 트럭 꽁무니와 준의 승용차의 앞좌석을 확인하곤 보험사와 경찰에 차례대로 전화했다.&lt;br&gt;&#10;구급차요?&lt;br&gt;&#10;트럭 운전사가 준을 바라보자 준이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었다.&lt;br&gt;&#10;안 다치신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lt;br&gt;&#10;곧 보험회사와 경찰, 구급차가 차례대로 도착했고 준은 구급차에 올랐다. 준은 만류했지만 침대에 누워서 이동했다.&lt;br&gt;&#10;준의 머리는 구급대원 하나의 품에 있었고 눈이 풀리고 식어가고 있었다.&lt;br&gt;&#10;구급대원 하나가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lt;br&gt;&#10;예. 전체적으로 큰 이상은 없어보입니다. 환자 의식도 또렷하고요. 흉부 쪽에 통증이 있다고는 하는데 아마 안전벨트 압박 때문에. 네. 뭐, 머리가 떨어지긴 했는데. 이거야 뭐.&lt;br&gt;&#10;준이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다가와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lt;br&gt;&#10;가슴 사진 한 번 찍어보고요. 또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lt;br&gt;&#10;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준의 머리는 준의 발치에 놓여져 굳어 있었다. 준의 목 근육이 움찔거릴 뿐이었다.&lt;br&gt;&#10;준은 저녁이 되어서야 윤을 만날 수 있었다. 윤은 준이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흔쾌히 약속을 미뤄주었고 혹시나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찾아가겠다고도 해주었다. 하지만 준의 갈비뼈는 멀쩡했고 검사를 마치고 곧장 나올 수 있었다.&lt;br&gt;&#10;윤은 준을 보자마자 소리쳤다.&lt;br&gt;&#10;너 머리는?&lt;br&gt;&#10;준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쳐서 보여주었다.&lt;br&gt;&#10;사고가 나서 떨어졌어.&lt;br&gt;&#10;안 붙여도 괜찮아?&lt;br&gt;&#10;돈 들잖아.&lt;br&gt;&#10;그래도 너 어렸을 때부터 붙이고 있었잖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줄 알았는데.&lt;br&gt;&#10;그냥 집착이었던거지. 떨어져보니까 알겠더라고. 왜 다들 머리를 잘라버리는건지. 머리가 없으니까 생각도 명쾌하고, 잡다한 고민도 안하게 되는 거 같아. 거치적거리는 게 없으니 잘때도 편할테고.&lt;br&gt;&#10;그렇긴하지. 윤은 목 위의 휑하게 빈 공간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없는 게 편해. 그럼 너 머리는 어떻게 하려고?&lt;br&gt;&#10;뒷뜰에 토마토 심었는데 이참에 비료 대신 주려고.&lt;br&gt;&#10;야, 그거 아이디어 좋다. 나는 어렸을 때 그거 치운다고 고생했는데.&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황새잡이</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9%A9%EC%83%88%EC%9E%A1%EC%9D%B4/</link><pubDate>Sat, 25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99%A9%EC%83%88%EC%9E%A1%EC%9D%B4/</guid><description>&lt;p&gt;나는 요즘 황새를 잡고 있다. 황새잡이가 불법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특히나 동쪽에서 아이를 싸맨 보자기를 물고 있는 황새를 잡는건 특히나. 물론 나는 동쪽에서 날아오는 황새는 잡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잡아야할 황새, 그러니까 의뢰 받은 황새만을 사냥한다. 그도 그럴것이 요즘 황새들은 점점 더 교활하고 야비해져가고 있다. 창문을 부리로 비집어대고 두터운 장막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고 밤이고 낮이고 남녀 한쌍의 연인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남남도 여여도 아닌 남녀 한쌍을 찾아서. 그리고 발견했다 하면 피부색 머리색 눈색 잘 기억했다가 두 사람에게 적절한 아기를 동쪽에서 집어다가 보자기에 잘 싸서 물어다온다. 그토록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황새는 두 사람에게 준비할 시간도 없이 아기를 물어다주는 것이다. 황새 때문에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멀찍히 남인척 떨어져 지낸다는 이야기는 요즘엔 우스개도 아니다. 그래서 나같은 황새잡이가 있는 것이겠지. 나는 연인을 발견한 황새의 사진을 전송 받으면 주변 일대를 돌면서 황새를 기다리다가 쏘아죽이고 그 증거를 찍어 보내면 돈을 입금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단속이 심하지만 다행히 아기를 물고 있는 황새가 아니라면 황새잡이 자체는 그리 큰 죄가 아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부쩍 황새잡이를 지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황새잡이가 너무 잦아져서 이대로 계속 가다간 700년 뒤 황새 씨가 말라 더이상 아기를 물어다줄 새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날은 죽은 황새를 등에 몇마리나 메고 가는데 누가 등뒤에서 불렀다. 단속반인가 싶어 뜨끔했지만, 팔뚝에 완장을 차고 있는 황새잡이를 반대하는 자치단체 회원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꽤 긴 논쟁이 되었다. &amp;ldquo;이봐요, 황새잡이 씨. 세상에 황새가 다 죽어 아기를 아무도 물어다줄 수 없게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네?&amp;rdquo; 사실 나는 말이 궁했다. 나는 내가 잘못된 일을 하는게 아닐까하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말이나 하기로 했다. &amp;ldquo;우리가 동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amp;rdquo; &amp;ldquo;동쪽이요?&amp;rdquo; 그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말해놓고 보니 그럴듯하다 싶었다. &amp;ldquo;동쪽에선 아기들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요? 동쪽엔 뭐가 있죠?&amp;rdquo; 그는 얼떨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동쪽으로 갈 수 있었고, 우리가 했던 말들이 생각보다 본질을 잘 짚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쯤(그러니까 700년이나 앞당겨서) 황새는 멸종했고 우리에겐 황새가 단 한 마리도 필요하지 않았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거인</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1%B0%EC%9D%B8/</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1%B0%EC%9D%B8/</guid><description>&lt;p&gt;……결국 모임 장소는 우리 집으로 정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정이었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 집안을 정리해두기로 했다. (사실 집 안은 깨끗했지만 그들을 우리 집에 들이는 데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므로)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lt;br&gt;&#10;나는 투덜거리며 걸었고, 경비실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고, 우리 집의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lt;br&gt;&#10;열쇠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lt;br&gt;&#10;집안은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다.&lt;br&gt;&#10;해질녘이라 그런 것인지 희미한 오렌지 빛 말고는 집안에 빛이 없어 캄캄했다. 때문에 자그마한 빛에 의지하며 벽을 더듬으며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갔다. 거실 형광등의 스위치는 현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켤 수 있었다.&lt;br&gt;&#10;달칵. 소리가 나면서 형광등에 불이 깜빡깜빡 들어왔다. 하얀 빛이 방안을 덮었다.&lt;br&gt;&#10;다만 현관 복도에서 곧장 보이는 거실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나는 얼떨떨했다. &amp;lsquo;뭐지?&amp;rsquo;&lt;br&gt;&#10;무엇인지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멍청하게 선 사이에 머릿속에서 환상과 현실의 괴리는 빠르게 좁혀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이미 밝혀졌다.&lt;br&gt;&#10;거실에는 거대한 거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이 형광등을 가리고 있었고, 그리고 그 만큼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lt;br&gt;&#10;하지만 눈으로는 그것을 보고 있어도 머리로는 &amp;lsquo;이해&amp;rsquo;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잠깐의 외출 사이에, 거실에 거인이 웅크리고 있을거라 생각하겠는가. 거실에는 거인이 있다. 이제 막 밝혀진 형광등 때문에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 거대한 몸 때문에 그 넓은 거실이 비좁아 보일 정도의, 그런 거인.&lt;br&gt;&#10;거인은 웅크린 몸을 서서히 폈다. 마치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뒤돌아 뛰었다. 그리고 현관 복도로 바로 이어진 작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건 실수.&lt;br&gt;&#10;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현관문으로 뛰는 게 옳았다. 그리고 신발도 신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경비실로, 가까운 친구에게로 달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작은 방으로 뛰어들고 만 것이다. 순간적인 행동이었다.&lt;br&gt;&#10;작은 방으로 뛰어들자마자 문을 쿵 닫았다. 이것도 실수라고 생각한다.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면 거인의 주의를 끌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후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내가 말끝에 물음표나 달면서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고(&amp;ldquo;뭐지? 뭐야?&amp;rdquo;) 있을 때 작은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막고 있는 몸으로도 느껴왔다. 쾅쾅쾅. 둔중한 울림. 조금만 주의를 늦춰도 문에 달린 낡은 경첩은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도 경첩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lt;br&gt;&#10;다시 문이 두드려졌다. 쾅쾅쾅. 있는 힘껏 몸으로 막아서지만 이래서야 역부족이었다. 나는 작은 방을 두리번거렸다. 문을 막을 것이 필요했다.&lt;br&gt;&#10;책상이 보였지만, 너무 무거워보였다. 끌고 올 수는 있겠지만 그 사이에 거인이 문을 부수고 말 것이다. 침대도 있었지만, 책상과 같은 이유로 기각. 더 찾고 있으려니, 문득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목검이 보였다. 나는 팔을 뻗었다. 하지만 쉽사리 손이 닿지않았다. 곤란했다. 문에서 멀어지면 지금도 쾅쾅쾅 울리는 이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거대한 거인의 팔이 문을 부수고 날 붙잡을 것 같았다.&lt;br&gt;&#10;물론 이러고 있어도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헐거워진 경첩이 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쾅쾅쾅 후 잠깐의 틈을 이용해 잽싸게 목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목검을 방문과 바닥 사이에 끼워 넣었다. 잘 될까 싶었지만, 의외로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그리 오래갈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책상을 잡아끌기 시작했다.&lt;br&gt;&#10;하지만 책상은 생각 외로 무거웠다. 하는 수 없이 책과 서랍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시 책상을 끌었다. 이번엔 쉬이 끌려서 금방 문에 가져다 댈 수 있었다. 쾅쾅쾅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amp;ldquo;후우.&amp;rdquo;&lt;br&gt;&#10;한숨을 쉬고 보니 어질러진 방의 풍경이 있었다. 책상을 끄느라 바닥도 엉망이었다. 저건 또 언제 다 치우지? 새삼스럽게 걱정이 됐다.&lt;br&gt;&#10;하지만 문에서 쾅쾅쾅 소리가 다시 들리고 나서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lt;br&gt;&#10;방에는 창문이 있었다. 순간 화색이 돌았지만, 방범창 이라는 걸 기억해내곤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트 복도로 향한 창문이라 도둑이 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복도를 향해 소리라도 질러볼까 했지만 지금은 늦은 저녁이라 들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lt;br&gt;&#10;어쨌든 다른 수를 찾아야했다. 떠오르는 건 전화기였지만, 집 전화기는 큰 방에 있었고,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별로 쓸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탓이다.&lt;br&gt;&#10;다른 수를 생각했다. 쾅쾅쾅 소리가 요란했다.&lt;br&gt;&#10;문득 내던져진 서랍 사이에서 공업용 커터칼이 보였다. 그리고 거인의 크기도 생각했다. 만약 거인이 인간에서 몸만 부풀린 수준이라 해도 저런 작은 커터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몇 배는 되는데 피부는 또 얼마나 두꺼울 텐가. 그러고보니 장도리도 눈에 띄었다. 아마 서랍을 던질 때 공구가 들었던 서랍도 내팽겨진 모양이었다. 못을 뽑는 부분이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역시 희망은 없어보였다. 나는 다른 도구를 좀 더 찾았다. 나사, 못, 스패너, 송곳, 드라이버…… 불현듯 집 밖으로 도망칠 수 있을 법한 생각이 떠올랐다.&lt;br&gt;&#10;일단 문에 구멍을 내야했다. 아니, 구멍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장도리로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때리니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손잡이를 끼워넣는 주먹만한 구멍이 생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거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lt;br&gt;&#10;나는 구멍에 키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구멍에 방에서 뒹굴던 잡다한 쓰레기를 구멍에 우겨 넣었다. 분명 거인의 눈에 뜨이리라.&lt;br&gt;&#10;예상대로 쾅쾅 흔들리던 문은 잠시 잠잠해졌다. 나는 긴장을 하며, 거리를 조금 두고 구멍을 들여다보았다.&lt;br&gt;&#10;구멍 너머로 거인의 눈이 보였다. 거인과 나는 눈을 맞추었다.&lt;br&gt;&#10;숨을 흡 들이켰지만, 계획했던 행동에 차질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송곳을 거인의 눈에 꽂아 넣었다. 거인의 비명, 괴성이 울려 터졌다.&lt;br&gt;&#10;귀를 막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재빨리 책상을 밀어내고 문을 발칵 열었다. 거인의 눈에서 튀긴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거인은 예상대로 눈을 감싸고 소리를 질러댔다. 계획은 거의 완벽하게 끝나는 듯 했다. 이대로 거인이 당황한 틈을 타서 문 밖으로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lt;br&gt;&#10;하지만 실패했다.&lt;br&gt;&#10;우리 집은 좁았고, 특히나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특히나 그랬다. 거인은 그 복도로 통하는 작은 방의 문을 두들기기 위해 비스듬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고, 한쪽 팔은 바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기대어진 팔은 현관을 틀어막고 있었다. 아마 현관에 놓여진 신발들은 멋지게 뭉개져 있으리라.&lt;br&gt;&#10;생각할 틈은 없었다. 거인은 바로 앞에 있었고, 거인은 점점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실로, 그리고 큰 방으로 도망쳤다.&lt;br&gt;&#10;내가 큰 방의 화장대를 문으로 끌어와 기대어 막을 때까지, 거인의 비명은 계속되었다. 정확히는 화가 나서 괴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lt;br&gt;&#10;나는 탈출할 방법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lt;br&gt;&#10;일단 생각이 난건 바닥에 있는 전화기였다.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lt;br&gt;&#10;막 1을 누르려고 할 때, 문에서 쾅 소리가 났다. 거인이었다. 하지만 화장대는 아까 전 책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문이 부서지지 않는 한 문제는 없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전화기로 옮겼다. 그리고 두번째 1을 누를 무렵에 수화기를 놓았다. 고민이 되었다.&lt;br&gt;&#10;경찰에 뭐라고 말한다?&lt;br&gt;&#10;&amp;lsquo;집에 거인이 있어요.&amp;rsquo; 라고?&lt;br&gt;&#10;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뭐라고 하지? 굳이 경찰을 부를거라면 &amp;lsquo;도둑이 들었어요.&amp;rsquo; 라고 해버려고 상관없을거 같다. 급하면 &amp;lsquo;강도가 있어요.&amp;rsquo; 라던가. 하지만 경찰 몇이 온다해서 저게 해결이 될까? 총알 몇 방 맞아도 꿈쩍도 않을거 같은데?&lt;br&gt;&#10;결국 나는 112 보다는 친구의 번호를 누르기로 결정했다. 사실 따지고보면 친구가 경찰보다 나을게 뭐 있으려마는 정신적 위안이 필요했다.&lt;br&gt;&#10;쾅쾅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번호를 누르니, 곧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신호가……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가 잠시 한숨을 쉰 뒤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친구. 이번에는 금방 통화가 되었다. &amp;ldquo;아, 너냐? 너 지금 어디……&amp;rdquo; &amp;ldquo;야, 잠깐. 나중에 통화하자.&amp;rdquo; 찰칵 소리와 함께 뚜뚜뚜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멍하게 들고 있다가 천천히 놓았다. 그리곤 다른 친구의 번호를 떠올리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정도 신호가 가니 전화를 받았다. &amp;ldquo;야, 너 지금 어디냐?&amp;rdquo; &amp;ldquo;누구냐? ……아, 너냐. 그런데 무슨 일이야?&amp;rdquo; &amp;ldquo;나 지금 상황이 엄청 안 좋거든? 우리 집으로 빨리 좀 오면 안되냐?&amp;rdquo; &amp;ldquo;으음. 나 지금 조금 바쁜데. 아무래도 빨리는 못갈 거 같다. 많이 급하냐? 무슨 일이야?&amp;rdquo; &amp;ldquo;아니, 그게, 그러니까, 집에 오니까 말이야, 거실에 거인이 있는데……&amp;rdquo; 뚜뚜뚜. 거인이야기는 잘못했나보다.&lt;br&gt;&#10;다시금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문득 쾅쾅하는 소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amp;lsquo;무슨 일이지?&amp;rsquo; 하고 문 쪽을 바라보는데 베란다 쪽에서 와장창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큰 방에도 창문이 있다. 베란다와 이어진 창문인데 베란다는 거실과 미닫이 창문으로 이어져있다. 와장창 소리는 아마 거인이 베란다로 오려다가 창문이라도 깨었기 때문이겠지. 그렇담 재빨리 창문을 닫아야 했지만 아무래도 용기가나지 않았다. 허둥지둥 하는 사이에 거인의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에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장롱 옆으로 숨었다. 그 순간 거인이 괴성을 질렀다. 화가 난 듯한 목소리. 창문을 넘어 팔을 뻗은 거인은 방안의 물건을 닥치는대로 부셔나갔다. 큰 방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젠장.&lt;br&gt;&#10;다행히도 거인은 장롱 뒤에 숨은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래서야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거인이 베란다 쪽에 있으니,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빠져 나갈 수도 있지만 화장대는 또 언제 치운단 말인가. 일단은 거인의 화가 가라앉을 때 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lt;br&gt;&#10;그때였다. 현관에서 &amp;ldquo;딩동&amp;rdquo; 하는 소리가 났다. 아차. 급하게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온다고 했던 그 시간이었다. 아마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건 그들 일 터였다. 절로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전부 거인 탓이었다. 생각해보면 거인이 거실에 있었던 탓에 탁자나 소파도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lt;br&gt;&#10;거인은 &amp;ldquo;딩동&amp;rdquo; 소리에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나는 거인이 현관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으리라 짐작했다.&lt;br&gt;&#10;딩동 소리는 두 번 정도 더 들렸고, 그다음으로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인이 문을 두드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도 들려왔다. &amp;ldquo;이봐! 안에 있어?&amp;rdquo; 나는 대답을 할까 망설였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있다는 걸 안다면 쓸 때 없이 의문을 가지고 떠들 것이고 거인이 현관문을 열려고 할지도 몰랐다. 그럼 그들이 위험해질 것이다. 차라리 내가 없는 것으로 알고 떠난다면 다행인 것이다. 뭣보다도, 이 상황에서 내가 소리를 지르면 거인도 내가 어디 있는지 들킨다. 진전할 수 없으면 악화 보다 현상유지가 좋지.&lt;br&gt;&#10;문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약속과는 달리 내가 집에 없어서 당황한 탓인 듯 했다. 약속을 못지킨 건 반성해야 할 점이지만 이 경우에는 불가항력이니까. 나는 스스로를 달래보고는 상황을 좀 더 기다렸다.&lt;br&gt;&#10;그런데 뜬금없이 벌컥 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amp;ldquo;어? 문 열려있는데?&amp;rdquo; &amp;ldquo;잠깐 어디 나간건가?&amp;rdquo;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맙소사. &amp;ldquo;일단 밖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amp;rdquo; &amp;ldquo;그래, 문 열어 놓은 거 보면 뭐 준비하러 갔나봐.&amp;rdquo;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걸 기억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인! 나는 깜짝 놀라서 장롱 옆으로 튀어나왔다. 거인은 어느새 큰 방으로 뻗었던 팔을 거두고 있었다. 거인은 그들에게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amp;ldquo;집 밖으로 나가!&amp;rdquo;&lt;br&gt;&#10;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amp;ldquo;뭐야? 집에 있잖아? 어디 있어?&amp;rdquo; &amp;ldquo;어디에 있는 거야?&amp;rdquo; &amp;ldquo;그런데 저건 뭐지?&amp;rdquo;&lt;br&gt;&#10;&amp;ldquo;밖으로 나가!&amp;rdquo;&lt;br&gt;&#10;나는 황급히 문에 대고 있었던 화장품대를 밀어내었다. 순간 비명 소리와 괴성이 집안을 스쳐지나갔다.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자꾸 소리쳤다. &amp;ldquo;집 밖으로 나가! 나가란 말이야!&amp;rdquo;&lt;br&gt;&#10;이윽고 큰 방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코를 찌르는 피냄새였다. 거실에는 살색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거인도 있었다. 거인은 입에 피를 한껏 묻히고는 혀를 낼름거렸다. 나는 현관문으로 힘껏 뛰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뛴 게 실수 었다. 살짝 열려있는 현관문 앞에서 나는 넘어지고 말았다. 피가 발을 적시고 있었지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는 허우적대며 일어섰다. 다시금 달려가려는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느껴졌다.&lt;br&gt;&#10;나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붙잡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마른 목으론 침도 넘어가지 않았다. 거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힘없이 잡아당겼다. 살짝 열려있었던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거인은 커다란 입을 벌렸다.&lt;br&gt;&#10;그 순간 보였던 것은 현관 신발장 위에 놓인 거울이었다.&lt;br&gt;&#10;거울에는 나의 얼굴과,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거인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거인은 큰 입으로 내 머리를 삼켰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겨울 행성</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2%A8%EC%9A%B8-%ED%96%89%EC%84%B1/</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2%A8%EC%9A%B8-%ED%96%89%EC%84%B1/</guid><description>&lt;p&gt;행성은 공전 궤도가 너무 비틀려져 있었기 때문에 표준 시간으로 봄이 한달, 겨울이 5년이었다. 때문에 은하 개척시대 초기에는 아무도 그 행성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은하계 안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행성 부동산 중개업자 사이에서도 볼품없는 겨울 행성으로 취급되었고 다른 행성을 살 때 얹어주거나 아주 값싸게 팔렸다. 많은 사람들이 행성의 궤도를 돌면서 대기를 분석하고는 살만한 곳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초기 테라포밍 기계들을 제외하면 행성은 오랜 시간 동안 무인행성으로 남아있었다. 한 무리의 개척자들이 그 행성을 사겠다고 할 무렵에는 이미 팔리지 않는 매물로 유명해져 있었다.&lt;br&gt;&#10;그들은 외부의 개척 행성에서 일어난 내전을 피해 행성에서 도망친 전쟁 난민들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화물선에 재산이 될만한 모든 것을 싣고 있었고, 그들을 쫒는 추적자도 적지 않았다. 복잡한 국제법 안에서 그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거주 가능한 행성의 새로운 개척자가 되는 것 뿐이었다. 그들이 가진 재산으로 살 수 있고, 제때 도착할 수 있는 행성은 그 겨울 행성 뿐이었고, 그들은 살기위해서 그 행성을 살 수 밖에 없었다.&lt;br&gt;&#10;그들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한 달 간의 봄이 시작될 때였다. 많은 이들이 행성의 가격이 헐값에 매겨진 이유를 알면서도 그 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 한달이 지나고나서 겨울은 혹독해졌고 미처 겨울나기를 준비하지 못했던 그들은 다시 그들이 타고왔던 낡은 함선으로 들어가야했다. 그들은 다시 오년을 버티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lt;br&gt;&#10;행성에서 겨울잠을 자는 풍습은 그렇게 나타났다. 돈이 될만한 것을 모두 처분하고 다음 봄이 왔을 때의 계획을 면밀히 검토한 그들에겐 여전히 수 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생으로 따지자면 무척이나 길었다. 그들은 개척자의 자격으로 국제연합에 단기 동면 기술을 받아낼 수 있었고 그들은 겨울이 올 때마다 잠들었다.&lt;br&gt;&#10;동면 기간 중 비활성화된 세포 덕분에 그들의 평균 수명은 수 백살에 이르렀지만 깨어있는 시간은 6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적인 발전 양상도 5년에 이르는 휴지기 때문에 다른 행성에 비해 퇴보되었고, 5년마다 그 시간만큼 밀려나 있는 자신들의 위치 때문에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다.&lt;br&gt;&#10;그들에게 더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린 것은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질 쯤이었다. 불안정했던 행성의 공전궤도가 수 세기 이내에 더 급하게 틀어질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기존의 부동산 매매업자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고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발해서 상당한 보상금을 받아내는데 성공했지만, 행성이 글자 그대로 기울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음 주기에서 봄이 하루 짧아지면 겨울은 1년, 3년 씩 늘어났다. 최후에는 공전 궤도를 이탈해 성간 행성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lt;br&gt;&#10;많은 젊은이들이 행성을 떠났다. 국제 연합은 충분한 숫자의 함선으로 남은 이들이 새로운 행성에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그들은 다른 행성에서 동면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기에 그대로 행성에 남았다.&lt;br&gt;&#10;이윽고 영원한 겨울이 도래했다. 행성에 남은 이들은 기약없는 봄을 기다리며 잠에 빠졌다. 인공적으로 관리되는 프로그램이, 봄이 오면 그들을 깨워주도록 설정되었다. 프로그램은 이따금 더해지는 변수를 공전 궤도 함수에 더해가며 계산을 이어나갔지만, 행성이 궤도를 이탈하면서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은하계의 수 많은 사람들, 한때 그 행성에서 태어났던 이들이 그 별의 최후를 바라보았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귤</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7%A4/</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7%A4/</guid><description>&lt;p&gt;&amp;ldquo;귤 껍질은 한 번에 까는 게 좋아.&amp;rdquo;&lt;br&gt;&#10;연의 뜬금 없는 말에 슬쩍 고갤 들어본다.&lt;br&gt;&#10;&amp;ldquo;하나의 물질엔 하나의 영혼이 깃드는 법이니까. 너처럼 귤 껍찔을 나눠서 깐다면 귤 껍질의 영혼도 갈갈이 찢기는 거지.&amp;rdquo;&lt;br&gt;&#10;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모르겠군. 나는 귤알을 하나씩 씹으며 생각했다.&lt;br&gt;&#10;연은 한 손으로 귤을 감싸고 천천히 귤을 까기 시작한다. 꼭지 부근에 엄지 손톱을 밀어넣어 껍질의 처음을 들어올려 내고, 그다음 엄지로 남은 껍질을 밀어내듯 벗긴다. 귤 껍질은 껌 포장지 처럼 벗겨졌다. 탁자 한 쪽엔 같은 모양으로 벗겨진 귤 껍질들이 가득 놓여있다.&lt;br&gt;&#10;손에 남은 귤알을 털어넣고 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그럼 귤알도 씹지 않고 한번에 삼키는 게 좋겠네?&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 아니지.&amp;rdquo;&lt;br&gt;&#10;&amp;ldquo;왜에?&amp;rdquo;&lt;br&gt;&#10;&amp;ldquo;잘 봐. 귤알 속에 알알의 귤낱알이 들어있잖아. 얘네들은 처음부터 나눠져 있으니까 씹어도 상관없어. 재인인 머리가 나쁘구나.&amp;rdquo;&lt;br&gt;&#10;연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귤이 달다.&lt;br&gt;&#10;나는 귤더미에서 귤을 하나 집어들고 연을 따라했다. 귤 껍질은 생각보다 더 여렸다. 노력했지만 귤 껍질은 끝에 가서 두 조각이 되었다.&lt;br&gt;&#10;연이 말했다.&lt;br&gt;&#10;&amp;ldquo;흐응. 처음엔 누구나 실수하는거지.&amp;rdquo;&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그럼 사람은 어때?&amp;rdquo;&lt;br&gt;&#10;&amp;ldquo;응?&amp;rdquo;&lt;br&gt;&#10;&amp;ldquo;손톱이나 머리카락은 길면 자르잖아. 손톱이나 머리카락에도 영혼이 있어?&amp;rdquo;&lt;br&gt;&#10;&amp;ldquo;있어. 있겠지. 그치만 걔들은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그렇게 자라는 거잖아. 잘라도 괜찮아. 잘라주는 게 좋아.&amp;rdquo;&lt;br&gt;&#10;완전 자기 마음대로네.&lt;br&gt;&#10;&amp;ldquo;도마뱀 꼬리는?&amp;rdquo;&lt;br&gt;&#10;&amp;ldquo;도마뱀이 선물하는 영혼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번데기 껍질은?&amp;rdquo;&lt;br&gt;&#10;&amp;ldquo;그 자리에 남고 싶은 나비의 영혼.&amp;rdquo;&lt;br&gt;&#10;&amp;ldquo;어머니와 아기는?&amp;rdquo;&lt;br&gt;&#10;&amp;ldquo;으응?&amp;rdquo;&lt;br&gt;&#10;&amp;ldquo;처음엔 한 몸이잖아. 아기가 태어나면 의사는 탯줄을 자르지.&amp;rdquo;&lt;br&gt;&#10;&amp;ldquo;글쎄. 아기는 처음부터 어머니와 다른 영혼인걸.&amp;rdquo;&lt;br&gt;&#10;그렇단 말이지.&lt;br&gt;&#10;&amp;ldquo;낡아서 부서지는 것들은?&amp;rdquo;&lt;br&gt;&#10;&amp;ldquo;혼자선 지쳐서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구름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amp;rdquo;&lt;br&gt;&#10;&amp;ldquo;땅이 그리워서.&amp;rdquo;&lt;br&gt;&#10;&amp;ldquo;내뱉는 숨결은?&amp;rdquo;&lt;br&gt;&#10;&amp;ldquo;돌아오니까 괜찮아.&amp;rdquo;&lt;br&gt;&#10;&amp;ldquo;차가운 것을 잡을 때 빠져나가는 온기는?&amp;rdquo;&lt;br&gt;&#10;&amp;ldquo;온정이라고 해.&amp;rdquo;&lt;br&gt;&#10;&amp;ldquo;우주의 팽창은?&amp;rdquo;&lt;br&gt;&#10;&amp;ldquo;영원하진 않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지금 하는 말들은?&amp;rdquo;&lt;br&gt;&#10;선듯 대답하려던 연의 입이 주저한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lt;br&gt;&#10;나는 말을 이었다.&lt;br&gt;&#10;&amp;ldquo;대화는? 정말 뜻 없는 영혼의 분절 아니야? 뱉었다 덧 없이 사라지는 것 아니야?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입술 꾹 닫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야. 말은, 영혼이겠지.&amp;rdquo;&lt;br&gt;&#10;&amp;ldquo;뭐?&amp;rdquo;&lt;br&gt;&#10;&amp;ldquo;말은 영혼이니까, 말한다는 건 영혼을 건네는 것이잖아. 그러니 대화한다는 건 영혼을 나누는 일 아니겠니. 입으로 따르고 귀로 받아서 서로의 균형을 맞추는 거 아닐까. 그 증거로 우리 영혼은 닮아가고 있잖아.&amp;rdquo;&lt;br&gt;&#10;나는 연과 눈을 마주하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시덥잖은 이야기네.&lt;br&gt;&#10;연은 뭐가 좋은지 저 혼자 킥킥 웃었다. 나는 귤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달콤한 귤. 그리고 연의 손가락을 떠올리며 천천히 귤을 까기 시작한다. 이제 귤알과 귤 껍질은 완연히 나누어진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까마귀</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9%8C%EB%A7%88%EA%B7%80/</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A%B9%8C%EB%A7%88%EA%B7%80/</guid><description>&lt;p&gt;몇 년 전 부터 우리 동네에선 까마귀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불길하다고 성을 내셨지만, 나는 까마귀의 짙고 검은 깃을 상상하며 즐거워 했다. 나는 까만색을 좋아했다. 까마귀가 똑똑한 조류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얼마안가 까마귀 소리는 다른 새들의 지저귐 처럼 익숙해졌다. 어머니도 성을 내지 않았고, 나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까마귀와 만나게 된 것은 그렇게 되고도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lt;br&gt;&#10;까마귀의 깃털은 더 없을 정도로 어두운 암흑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 짙은 그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는 하늘 가운데 떠 있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곧 겨울이었다. 나는 까마귀 앞에서 멈춰섰다.&lt;br&gt;&#10;까마귀 울음소리는 종종 들어왔지만 눈으로 집적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까마귀가 놀라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주의하며 쓰레기를 밟아 나갔다. 까마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까마귀는 내가 코 앞으로 다가갈 때 까지 도망가지 않았다.&lt;br&gt;&#10;혹시 다친 것인가 살펴보았지만 겉보기는 멀쩡하고, 건강해보였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까마귀에게 줄만한 것이 없는지 찾았다. 까마귀는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눈 앞의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초콜렛을 꺼내 포장을 벗긴 뒤 손바닥에 얹어 까마귀에게 내밀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내 손이 까마귀의 부리 바로 아래 갈 정도로. 그냥 잡아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lt;br&gt;&#10;까마귀는 천천히 부리를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휙 하고 낚아챘다. 딱딱한 부리의 감촉은 순간적이었다. 나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초콜렛 포장을 하나 더 벗긴 뒤, 이번에는 내 무릎 바로 아래(난 쪼그려 앉아 있었다)에 손을 펼쳤다. 까마귀는 통통 튀어와 초콜렛을 가져갔다. 거리는 좁혀진 그대로였고, 까마귀는 도망가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초콜렛을 벗긴 뒤 내 무릎 위에 두었다. 그리고 까마귀가 올라올 수 있도록 팔을 가로로 들었다. 까마귀가 초콜렛을 먹기 위해선 내 팔 위로 올라와야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까마귀는 그렇게 했다. 날개를 펄럭였을 때 도망갈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까마귀는 내 왼팔에 올라서서 초콜렛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명 더 달라는 듯 내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초콜렛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도망가버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른손을 들어 까마귀의 깃에 만졌다. 까마귀는 도망가지 않았고, 내 손길에 대해 무관심했다. 등을 쓸어내리고, 머리를 토닥이고, 부리를 매만질 때 까지도.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lt;br&gt;&#10;쪼그린 다리가 아파왔다. 도망가버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많이 저렸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었다. 까마귀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천천히, 건물 사이의 틈새에서 밝은 거리로 걸어나왔다. 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까마귀 때문에 팔도 뻐근해져갔다. 까마귀는 귀여웠다. 나는 까만색을 좋아했다. 까마귀가 똑똑한 조류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까마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lt;br&gt;&#10;무심코 말했다.&lt;br&gt;&#10;&amp;ldquo;초콜렛은 이제 없어.&amp;rdquo;&lt;br&gt;&#10;&amp;ldquo;그렇구나.&amp;rdquo; 까마귀의 말이었다. &amp;ldquo;맛있었어. 다음에 봐.&amp;rdquo;&lt;br&gt;&#10;까마귀는 그 자리에서 날개를 퍼덕여 날아올랐고,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내 왼쪽 팔목엔 까마귀가 내려 앉았던 검은 먼지 자국이 발자국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리모컨을 찾아줘</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6%AC%EB%AA%A8%EC%BB%A8%EC%9D%84-%EC%B0%BE%EC%95%84%EC%A4%98/</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A6%AC%EB%AA%A8%EC%BB%A8%EC%9D%84-%EC%B0%BE%EC%95%84%EC%A4%98/</guid><description>&lt;p&gt;케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젠장. 제이!&amp;rdquo;&lt;br&gt;&#10;분노와 허탈함이 반절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왜? 무슨 일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리모컨이 또 없어졌어.&amp;rdquo;&lt;br&gt;&#10;&amp;ldquo;잘 찾아봐. 쇼파 바닥에 없어?&amp;rdquo;&lt;br&gt;&#10;&amp;ldquo;없어.&amp;rdquo;&lt;br&gt;&#10;&amp;ldquo;탁자 위에는?&amp;rdquo;&lt;br&gt;&#10;&amp;ldquo;없어.&amp;rdquo;&lt;br&gt;&#10;&amp;ldquo;또 니가 깔고 앉은거 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아냐. 제이제이제이제에이이! 와서 같이 찾아줘.&amp;rdquo;&lt;br&gt;&#10;잠시 한숨을 쉬고 말했다.&lt;br&gt;&#10;&amp;ldquo;나 요리하고 있는거 안보여?&amp;rdquo;&lt;br&gt;&#10;&amp;ldquo;거실에선 안보여.&amp;rdquo;&lt;br&gt;&#10;&amp;ldquo;어쨌든 나 요리하고 있으니까. 텔레비젼이 보고 싶으면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전원 버튼을 눌러.&amp;rdquo;&lt;br&gt;&#10;&amp;ldquo;멀어. 이미터는 넘을거 같아.&amp;rdquo;&lt;br&gt;&#10;나는 가스렌지를 약불로 낮추고, 슬리퍼를 끌면서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켜고, &amp;ldquo;됐지?&amp;rdquo; 하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lt;br&gt;&#10;가스렌지 앞에서 뒤집개를 잡으려는데 다시 케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잠깐. 제이!&amp;rdquo;&lt;br&gt;&#10;&amp;ldquo;또 무슨 일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리모컨이 없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텔레비전은 켜졌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채널을 돌려야지.&amp;rdquo;&lt;br&gt;&#10;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lt;br&gt;&#10;&amp;ldquo;좋아. 내가 돌려줄께. 뭐가 보고 싶어?&amp;rdquo;&lt;br&gt;&#10;&amp;ldquo;뉴스.&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나는 채널 버튼 몇 번 눌렀고 아나운서가 나오는걸 확인하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lt;br&gt;&#10;가스렌지의 화력을 다시 올리는데 또 케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제이!&amp;rdquo;&lt;br&gt;&#10;&amp;ldquo;케이! 나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데 니가 이렇게 자꾸 부르면 오늘 아침은 엉망진창이……&amp;rdquo; 하고 말하다가, 그냥 가스렌지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lt;br&gt;&#10;&amp;ldquo;좋아. 그래. 또 무슨 일이야? 다른 채널이 보고 싶어? 다큐? 영화? 쇼?&amp;rdquo;&lt;br&gt;&#10;케이가 심드렁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다.&lt;br&gt;&#10;&amp;ldquo;모두 아니야. 리모컨을 찾아줘.&amp;rdquo;&lt;br&gt;&#10;나는 주위를 빙 둘러봤다. 리모컨은 보이지 않는다.&lt;br&gt;&#10;&amp;ldquo;그냥 보고 싶은 채널을 말해. 그럼 돌려줄께. 어디 박혀있는지도 모를 리모컨을 찾는 것 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어?&amp;rdquo;&lt;br&gt;&#10;&amp;ldquo;아니. 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왜?&amp;rdquo;&lt;br&gt;&#10;&amp;ldquo;왜냐고? 니가 리모컨에 대해서 뭔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리모컨은 단순히 텔레비전을 끄고 켜거나 채널을 돌리거나 음량의 고저를 조절하는 도구가 아니야. 잘 생각해보라고. 텔레비전에는 모든게 들어있어. 당장의 도로 교통 상황부터, 사자가 사냥하는 모습과, 키마 마타르 만드는 법, 얼마전 개봉된 영화의 줄거리와, 그 영화에 나온 연기자의 연애사까지! 알겠어? 텔레비전은 모든 것이라고. 그리고 리모컨은 수 십개로 갈려진 그런 채널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만능도구야. 신의 지팡이지.&amp;rdquo;&lt;br&gt;&#10;긴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lt;br&gt;&#10;내가 말했다.&lt;br&gt;&#10;&amp;ldquo;그럼 내가 리모컨이 되면 되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뭐?&amp;rdquo;&lt;br&gt;&#10;&amp;ldquo;내가 니 리모컨이 된다고. 내가 대신 채널을 돌리고 소리를 올리고 줄이고 텔레비전을 켜고 끄고. 그럼 되는거잖아?&amp;rdquo;&lt;br&gt;&#10;&amp;ldquo;안 돼.&amp;rdquo;&lt;br&gt;&#10;&amp;ldquo;왜?&amp;rdquo;&lt;br&gt;&#10;&amp;ldquo;느려. 느리잖아. 너 빛보다 빨라? 리모컨은 레이저를 쏜다고.&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 이해해주라. 사람이 빛 보다 빠를 수는 없잖아. 그만큼 빨라지도록 노력은 해볼게.&amp;rdquo;&lt;br&gt;&#10;&amp;ldquo;아냐. 난 인정못해. 그리고 노력해서 빨라져봤자 얼마나 빨라질까. 그냥 리모컨을 찾아줘. 이 근처에 있을거야. 리모컨이 발달려서 도망갔을리도 없을테니까 어딘가에 있을꺼야. 텔레비전 위에는 없어?&amp;rdquo;&lt;br&gt;&#10;나는 힐끗 봤다. 아무 것도 없다.&lt;br&gt;&#10;&amp;ldquo;없어. 아침을 먹고나면 니가 질릴때까지 채널 돌려줄께. 그때까지라도 참아.&amp;rdquo;&lt;br&gt;&#10;&amp;ldquo;내가 필요한건 니가 아니라 리모컨이라니까.&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 알았어. 그럼 아침 먹고나서 리모컨 찾아줄게. 일단 뭐라도 먹고하자고. 그정돈 기다려줘. 알겠지?&amp;rdquo;&lt;br&gt;&#10;케이는 묵묵부답. 내 얼굴만 빤히 바라봤다. 나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lt;br&gt;&#10;&amp;ldquo;잠깐.&amp;rdquo;&lt;br&gt;&#10;돌아봤다.&lt;br&gt;&#10;&amp;ldquo;왜?&amp;rdquo;&lt;br&gt;&#10;&amp;ldquo;가젤이 보고 싶은데.&amp;rdquo;&lt;br&gt;&#10;&amp;ldquo;좋아. 다큐 채널이지?&amp;rdquo;&lt;br&gt;&#10;&amp;ldquo;응.&amp;rdquo;&lt;br&gt;&#10;나는 채널을 돌리고나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아침을 준비했다.&lt;br&gt;&#10;요리를 그릇에 모두 담아내었을때,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lt;br&gt;&#10;&amp;ldquo;케이. 아침 다 됐어. 목발 줄까?&amp;rdquo;&lt;br&gt;&#10;&amp;ldquo;아냐. 그보다는, 안아줄 수 있지?&amp;rdquo;&lt;br&gt;&#10;&amp;ldquo;어렵지않지.&amp;rdquo;&lt;br&gt;&#10;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케이는 다른 사람 보다 가볍다. 나는 케이를 번쩍들어 식탁으로 데려가 앉혔다. 나는 케이의 맞은편에 앉았다.&lt;br&gt;&#10;케이가 음식을 맛보더니 말했다.&lt;br&gt;&#10;&amp;ldquo;와, 엉망진창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 것 치곤 훌륭한 아침 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그거야 내 능력이 좋아서 그런거지.&amp;rdquo;&lt;br&gt;&#10;케이가 살짝 웃었다. 나도 웃었다. 웃으면서 주머니 속에 있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분실물</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B6%84%EC%8B%A4%EB%AC%BC/</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B6%84%EC%8B%A4%EB%AC%BC/</guid><description>&lt;p&gt;&amp;ldquo;무엇을 잃어버리셨나요?&amp;rdquo;&lt;br&gt;&#10;접수원이 말했다.&lt;br&gt;&#10;너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lt;br&gt;&#10;&amp;ldquo;아뇨. 저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게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죠. 자기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는 거요.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죠.&amp;rdquo;&lt;br&gt;&#10;&amp;ldquo;하지만 저는 부족한 게 없어요. 잃어버린 게 없을 거에요.&amp;rdquo;&lt;br&gt;&#10;&amp;ldquo;상실이란 건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분실물 센터는 다릅니다. 저희는 이미 고객님이 잃어버린 물건을 모두 회수 했습니다. 고객님이 물건에 대한 기억만 되살리시면 고객님은 고객님의 물건을 되찾게 되는 겁니다.&amp;rdquo;&lt;br&gt;&#10;너는 분실물 센터 접수원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물건을 주겠다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lt;br&gt;&#10;접수원이 접수대에 처음으로 올린 물건은 낡고 구겨진 오천원권 지폐였다.&lt;br&gt;&#10;너는 접수원 재촉을 할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지폐를 집어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광등에 비추어보기도 했지만 그냥 평범한 돈이었다.&lt;br&gt;&#10;너는 말했다.&lt;br&gt;&#10;&amp;ldquo;이게 정말 제건가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amp;rdquo;&lt;br&gt;&#10;&amp;ldquo;저는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 데도요?&amp;rdquo;&lt;br&gt;&#10;&amp;ldquo;2012년 11월 21일 저녁 11시에, 친구 A와 오꾸닭에서 술을 마신 건 기억나시나요? 2차였는데.&amp;rdquo; 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기억난다고 대충 둘러댔다. &amp;ldquo;네. 그때 계산하고 남은 거스름돈이었습니다. 대강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그 다음 술자리인 막창 집에서 일어날 때 지갑을 꺼내다 바닥에 흘리셨죠.&amp;rdquo;&lt;br&gt;&#10;&amp;ldquo;아, 그럼 제 것 맞네요.&amp;rdquo;&lt;br&gt;&#10;너는 부들부들한 지폐를 비볐다.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lt;br&gt;&#10;&amp;ldquo;혹시 또 다른 물건은 없나요?&amp;rdquo;&lt;br&gt;&#10;&amp;ldquo;왜 없겠어요?&amp;rdquo;&lt;br&gt;&#10;접수원은 다음 물건으로 작은 종이가방을 건넸다. 그 안에는 포장된 상자가 들어있었다.&lt;br&gt;&#10;그것만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lt;br&gt;&#10;&amp;ldquo;뜯어봐도 되나요?&amp;rdquo;&lt;br&gt;&#10;&amp;ldquo;물론요.&amp;rdquo;&lt;br&gt;&#10;포장을 뜯자 꽤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상자가 나왔고, 그 상자를 열자 매끄러운 모양의 만년필을 볼 수 있었다. 만년필에 대한 식견이 있었던 너는,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나름 가치가 있는 종류라는 것을 알았다.&lt;br&gt;&#10;네가 그 만년필을 골똘히 바라보자 접수원이 말했다.&lt;br&gt;&#10;&amp;ldquo;고객님의 중학교 3학년 생일파티 때였죠. 2학기 종업식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객님의 생일은 자연스럽게 반 친구 모두가 모이는 파티가 되었죠. 하지만 생일파티라는 명목으로 모이는 자리이다 보니 고객님은 유래 없이 많은 축하선물을 받았고요.&amp;rdquo; 너는 이번만큼은 거짓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amp;ldquo;이 만년필은 그때 고객님을 짝사랑했던 B의 것입니다. 워낙 선물을 많이 받았던 고객님은 이리저리 쌓인 물건을 모두 확인 할 수 없었던 거죠.&amp;rdquo;&lt;br&gt;&#10;너는 포장 안쪽에서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B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혀져 있었다. 너는 구겨져버린 포장지는 가방에 넣고, 만년필과 쪽지는 종이가방에 돌려놓았다.&lt;br&gt;&#10;&amp;ldquo;좋네요. 더 없나요?&amp;rdquo;&lt;br&gt;&#10;접수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얼마되지 않아 작업복을 입은 직원이 큰 상자 하나를 들고 와 네 앞에 내려다놓았다. 너는 기대감을 가지고 상자를 열었다.&lt;br&gt;&#10;안에는 상자 가득 양말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서로 짝이 다른 양말들이었다. 굳이 뒤적거리지 않아도 너는 알 수 있었다.&lt;br&gt;&#10;&amp;ldquo;…양말이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 고객님이 처음 잃어버리신 양말은 4살 때였는데요. 그때 고객님의 어머니분이…&amp;rdquo;&lt;br&gt;&#10;&amp;ldquo;음. 됐고요. 혹시 분실물 센터는 세탁도 해주나요?&amp;rdquo;&lt;br&gt;&#10;&amp;ldquo;저희는 분실물의 분실 당시의 상태를 존중합니다. &amp;quot;&lt;br&gt;&#10;너는 양말 상자를 닫았다.&lt;br&gt;&#10;&amp;ldquo;그럼 이건 포기할게요.&amp;rdquo;&lt;br&gt;&#10;&amp;ldquo;그건 안 됩니다, 고객님.&amp;rdquo;&lt;br&gt;&#10;&amp;ldquo;네?&amp;rdquo;&lt;br&gt;&#10;&amp;ldquo;모든 분실물을 가져가시거나, 모든 분실물을 포기하셔야합니다.&amp;rdquo;&lt;br&gt;&#10;너는 무언가 항의를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오천원과 만년필을 냄새나는 양말 한 상자와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나있었다.&lt;br&gt;&#10;&amp;ldquo;다른 물건도 있나요?&amp;rdquo;&lt;br&gt;&#10;그래도 너는 네가 잃어버린 것 중에는 좋은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너는 어떤점에서 낙관적이었다. 너는 네 삶이 좋은 쪽 보다는 나쁜 쪽으로 더 기울어져있다고 믿고 있었고,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좋은 것이리라 믿었다. 네 삶의 총합을 더한다면 0이 될 거라고 생각 한 것이다.&lt;br&gt;&#10;분실물 센터의 직원들은 네가 일곱 살 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장난감을 찾아주거나,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어진 옛 친구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것들은 값지진 않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lt;br&gt;&#10;하지만 나쁜 것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 첫 모의고사 성적표, 처음으로 쓴 소설의 프린트, 한 번도 풀지 않아 깨끗한 문제지, 살대가 부러진 우산, 반쯤 닳은 지우개, 추레하고 낡은 아동복, 거북 등껍질.&lt;br&gt;&#10;너는 짙은 녹색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거북 등껍질을 받았을 때 계단을 한단 더 내려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길렀던 거북이었다. 너는 처음 며칠은 거북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이내 시들해졌고, 친구들과 함께 놀기 위해 거북을 들고 놀러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등껍질이나마 남은 것을 보면 분실물 센터는 나름 분발한 듯 보였다.&lt;br&gt;&#10;너는 겁이 났다. 삶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었다. 지금의 너는 우연히 일어난 행운과 불행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쁜 것을 잊고 좋은 것을 얻으려고 했던 의지의 증거였다.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lt;br&gt;&#10;너는 지갑에서 5천원을 다시 빼내고 종이가방을 접수원에게 내밀었다.&lt;br&gt;&#10;&amp;ldquo;관둘게요.&amp;rdquo;&lt;br&gt;&#10;&amp;ldquo;분실물을 찾지 않을 건가요?&amp;rdquo;&lt;br&gt;&#10;&amp;ldquo;네.&amp;rdquo;&lt;br&gt;&#10;&amp;ldquo;원래는 버리려고 했던 게 아니잖아요?&amp;rdquo;&lt;br&gt;&#10;&amp;ldquo;너무 늦어버린 거죠. 늦었다는 걸 아는데도 미련이 남아서. 사실 여기에 분실물을 찾으려고 온 게 아닌데.&amp;rdquo;&lt;br&gt;&#10;&amp;ldquo;그런가요? 분실물 센터에 분실물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면, 왜 오셨나요?&amp;rdquo;&lt;br&gt;&#10;너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집중을 했고, 땅을 바라보면서 인상을 썼다. 너는 답을 떠올렸을 때 고개를 들며 말했다.&lt;br&gt;&#10;&amp;ldquo;제가 분실물이었군요.&amp;rdquo;&lt;br&gt;&#10;&amp;ldquo;예.&amp;rdquo;&lt;br&gt;&#10;접수원은 직원을 불러 처음의 양말 박스처럼 큰 박스를 가져왔다. 너는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었고, 박스의 어두운 안쪽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lt;br&gt;&#10;나였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비늘 없는 물고기</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B9%84%EB%8A%98-%EC%97%86%EB%8A%94-%EB%AC%BC%EA%B3%A0%EA%B8%B0/</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B%B9%84%EB%8A%98-%EC%97%86%EB%8A%94-%EB%AC%BC%EA%B3%A0%EA%B8%B0/</guid><description>&lt;p&gt;비늘 없는 물고기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서쪽 사람들이 해안가에서 죽어 있는 그 비늘 없는 물고기의 사체를 주웠다고 했다. 사실 비늘이 있고 없고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물고기의 거대함이었다. 그 물고기는 그 어떤 짐승보다도 크고 살이 많아서, 서쪽 사람들은 한 달째 사냥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바다신에 대한 감사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amp;lsquo;작은발&amp;rsquo;이나 &amp;lsquo;뾰족코&amp;rsquo; 같은 젊은이들은 우리도 태양신이 아니라 바다신에게 제사를 지내야한다고 했다.&lt;br&gt;&#10;늙은이들도 처음에는 젊은이들에게 헛소문을 퍼트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서쪽 사람들이 안개가 자주 끼고 광활한 바다만 마주하느라 헛것을 자주보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작은발이 기어코 한 줌의 붉은 열매를 비늘 없는 물고기의 갈빗대와 바꾸어오자, 늙은이들도 태도를 바꿨다. 세워두면 작은발의 어깨에 다다를 정도였다. 그러면서 작은발은 이 마저도 중간 크기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흰머리만은 그 생선 가시로는 가죽도 못꿰어낸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다른 늙은이들은 서쪽 사람들이 보기와는 다르게 신의 축복을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으리라 태도를 바꾸었다.&lt;br&gt;&#10;나는 족장과 이야기를 했다.&lt;br&gt;&#10;&amp;ldquo;뭔가 수를 써야하지 않습니까.&amp;rdquo;&lt;br&gt;&#10;족장은 벽을 보고 거울을 닦다가 거울만 들어 비추어지는 나를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lt;br&gt;&#10;족장이 말했다.&lt;br&gt;&#10;&amp;ldquo;겁을 내지 않는군.&amp;rdquo;&lt;br&gt;&#10;&amp;ldquo;거기 있는 건 제가 아니니까요.&amp;rdquo;&lt;br&gt;&#10;&amp;ldquo;영혼이 담긴다고 비명을 지르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amp;rdquo;&lt;br&gt;&#10;나는 얼굴이 더워지는걸 느꼈다.&lt;br&gt;&#10;&amp;ldquo;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게 아닙니다.&amp;rdquo;&lt;br&gt;&#10;족장이 작게 웃었다.&lt;br&gt;&#10;&amp;ldquo;올 거라고 생각했었어. 네가 할 일이 있다.&amp;rdquo;&lt;br&gt;&#10;&amp;ldquo;어떤?&amp;rdquo;&lt;br&gt;&#10;&amp;ldquo;별 건 아냐. 비늘 없는 물고기에 대해서 &amp;lsquo;네 생각&amp;rsquo;을 이야기하는거야. 작은 물고기들은 비늘이 있다. 하지만 그건 몸을 묶어둔 것 처럼 괴로운 일이다. 비늘이 깎여나가는 물고기들은 원래 제몸보다 더 커지는 법이다.&amp;rdquo;&lt;br&gt;&#10;&amp;ldquo;그걸론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바다신이 커다란 물고기를 선물로 보냈다고 생각하겠죠.&amp;rdquo;&lt;br&gt;&#10;&amp;ldquo;그거면 충분해. 빨간 눈한테는 그건 조화를 어긴 물고기라고 가르쳤거든. 두 이야기가 합쳐지면 결국 그건 바다신의 선물이 아니라 경고였다고 받아들이게 될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도 불충합니다. 결국 서쪽 사람들은 배를 불렸고 낙엽이 떨어지는 때가 왔는데도 편하게 쉬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야기를 신뢰하지만 눈에 보이는 &amp;lsquo;진짜&amp;rsquo;만큼 믿지는 않아요. 서쪽 사람들에게 정말로 저주가 내려지지 않는 이상.&amp;rdquo;&lt;br&gt;&#10;&amp;ldquo;걱정마. 시킨대로만 해.&amp;rdquo;&lt;br&gt;&#10;작은 청동 거울에는 족장의 입꼬리가 보였다. 나는 족장을 믿기로 했다. 족장의 말이 틀린적은 없었다.&lt;br&gt;&#10;&amp;ldquo;그런데 비늘 없는 물고기는 정말로 그 이야기처럼 비늘이 없어서 거대한 것인가요?&amp;rdquo;&lt;br&gt;&#10;&amp;ldquo;눈이 내리는 때가 오면 가르쳐줄게. 그땐 시간이 많으니.&amp;rdquo;&lt;br&gt;&#10;족장은 다시 몸을 숙이고 거울을 닦기 시작했다.&lt;br&gt;&#10;나는 족장의 말대로 사냥을 나가는 길이나 배가 부르고 열매 삭힌 물을 마실 때, 잠을 자기 전 불티들을 별과 번갈아 보면서 비늘 없는 물고기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그 이야기는 빨간눈의 부조화에 대한 이야기와 엮이며 바다신의 저주가 되었고, 서쪽 사람들은 자신에게 찾아올 재앙도 모른채 쾌락에 취한 불손한 존재들이 되어갔다.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축하하거나 부러워하는 것 보다 욕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lt;br&gt;&#10;급기야 작은발이 비늘 없는 물고기의 갈빗대로 만든 창을 쓰다 상처를 입게 되자 바다신에 대한 이야기도 잦아들었다. 그것이야 우연이겠지만, 그로써 바다신에 대한 지향심 각자의 속내로 숨어들었다. 언젠간 다시 떠오르겠지만 지금처럼만 할 수 있다면야.&lt;br&gt;&#10;우리는 산지기를 쫓아낸 큰 동굴에서 겨울을 났다. 나는 족장에게 비늘 없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lt;br&gt;&#10;비늘 없는 물고기는 고래라고 한다. 서쪽 사람들이 고래에 대해 이야기한 것 중 틀린 것은 없다. 거대하고, 살이 많다. 고래는 종류가 많지만 작은발이 가져온 갈빗대로 봐서는 그건 흰수염고래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고래보다 거대한 것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는 거대한 생명이다. 고래에게 비늘이 없는 까닭은 본래 산짐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을 좋아해서 바다에서 살아가다 결국 물고기가 되어버렸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퍼스트 콘택트</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8D%BC%EC%8A%A4%ED%8A%B8-%EC%BD%98%ED%83%9D%ED%8A%B8/</link><pubDate>Fri, 24 Feb 2017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D%8D%BC%EC%8A%A4%ED%8A%B8-%EC%BD%98%ED%83%9D%ED%8A%B8/</guid><description>&lt;p&gt;앞으로 2cm였다. 소년의 손이 소녀의 손에 닿기까지 2c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한 마디의 길이. 소녀는 생과일주스를 마시고 멀리 구름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소녀의 관심은 소년의 손끝에 있었다. 소녀는 마음속으로 응원했다.&lt;br&gt;&#10;소년과 소녀가 사귀기 시작한 지는 한 달이 지났고 서로 알고 지낸 지는 2년이 넘었다. 데이트는 네 번째였다.&lt;br&gt;&#10;소년은 늘 노력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늘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소녀가 짓궂게 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둘의 마음이 맞아떨어졌고 이제 2cm를 앞두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1cm. 9mm. 8mm. 7mm…… 점점 가까워진다. 소년이 소녀의 &amp;lsquo;손을 잡는 것&amp;rsquo;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소녀도, 소년도, 그렇게 생각했다.&lt;br&gt;&#10;그러나 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년은 소녀와 2mm를 앞두고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lt;br&gt;&#10;소년이 아무것도 모르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 소녀가 급히 손을 빼며 말했다.&lt;br&gt;&#10;&amp;ldquo;아차.&amp;rdquo;&lt;br&gt;&#10;&amp;ldquo;어?&amp;rdquo;&lt;br&gt;&#10;&amp;ldquo;깜빡했다.&amp;rdquo;&lt;br&gt;&#10;&amp;ldquo;으, 응?&amp;rdquo;&lt;br&gt;&#10;소년은 어벙한 얼굴로 꿈뻑였다.&lt;br&gt;&#10;소녀는 으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손을 뻗어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amp;ldquo;어어?&amp;rdquo; 소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소녀는 잡은 손을 흔들며 펴보라 했고, 소년은 그렇게 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붙여 보였다.&lt;br&gt;&#10;닿지 않았다.&lt;br&gt;&#10;소년의 눈은 동그래졌고,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소년과 소녀의 손바닥은 2mm. 딱 그만큼 떨어져 있었다.&lt;br&gt;&#10;&amp;ldquo;말하는 걸 깜빡했었는데…… 사실 나 좀 이상 체질이라서. 다른 사람들이랑 닿질 못해.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니구……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잡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아냐.&amp;rdquo;&lt;br&gt;&#10;&amp;ldquo;아, 아냐?&amp;rdquo;&lt;br&gt;&#10;소년의 표정은 벤치에 등을 기대며 고갤 숙였다. &amp;ldquo;아니지이. 절때로오.&amp;rdquo; 말하며 고개를 넘겨 하늘을 바라봤다. 이게 뭐람. 기껏 용기 냈는데.&lt;br&gt;&#10;소녀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마시던 생과일주스만 쪽쪽 빨았다. 아니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거야. 날 때부터 그런걸.&lt;br&gt;&#10;&amp;ldquo;야아.&amp;rdquo;&lt;br&gt;&#10;소년이 불렀다. 소녀가 돌아봤다.&lt;br&gt;&#10;&amp;ldquo;어? 왜?&amp;rdquo;&lt;br&gt;&#10;소년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lt;br&gt;&#10;&amp;ldquo;그럼 너 밥은 어떻게 먹어?&amp;rdquo;&lt;br&gt;&#10;&amp;ldquo;밥은 잘 넘어가는데.&amp;rdquo;&lt;br&gt;&#10;&amp;ldquo;옷은 어떻게 입어?&amp;ldquo;아빠도?&amp;rdquo;&lt;br&gt;&#10;&amp;ldquo;동생도 그래.&amp;rdquo;&lt;br&gt;&#10;&amp;ldquo;친구는?&amp;rdquo;&lt;br&gt;&#10;&amp;ldquo;친구? 몰라. 안 닿을 걸. 들킬까 봐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안 닿을 거야.&amp;rdquo;&lt;br&gt;&#10;&amp;ldquo;그래?&amp;rdquo;&lt;br&gt;&#10;소년은 생각했다. 여자애들은 친한 애들끼리는 팔짱도 자주 끼고, 손도 자주 잡고 그러던데. 확인해 본 적이 없다고? 소녀는 친구가 많이 없었다. 소년은 그에 대해 소녀의 성격 때문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나보다.&lt;br&gt;&#10;빨대 공기 빠는 소리가 났다. 소녀가 막 생과일주스를 다 마신 참이었다. 소년은 뭔가 떠올랐다.&lt;br&gt;&#10;소년이 말했다.&lt;br&gt;&#10;&amp;ldquo;밥은 잘 먹는다 그랬지?&amp;rdquo;&lt;br&gt;&#10;&amp;ldquo;응.&amp;rdquo;&lt;br&gt;&#10;&amp;ldquo;옷도 문제없고.&amp;rdquo;&lt;br&gt;&#10;&amp;ldquo;응.&amp;rdquo;&lt;br&gt;&#10;&amp;ldquo;그럼 이렇게 생각해봐.&amp;rdquo;&lt;br&gt;&#10;&amp;ldquo;뭘?&amp;rdquo;&lt;br&gt;&#10;소년은 팔을 뻗어 소녀의 손목을 느슨하게 잡았다.&lt;br&gt;&#10;&amp;ldquo;내 손은 이제 네 장갑이야.&amp;rdquo;&lt;br&gt;&#10;&amp;ldquo;자, 장갑이 왜 거기 붙어?&amp;rdquo;&lt;br&gt;&#10;&amp;ldquo;아, 정말. 일단 상상해보라니까 그러네. 봐봐. 이건 장갑이야.&amp;rdquo; 소년의 손이 소녀의 손 위에 겹치었다. 온기는 전해져오지만 살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amp;ldquo;상상해보라니까.&amp;rdquo; 소녀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잘되지 않았다. 그 사이 소년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amp;ldquo;그리고,&amp;rdquo; 소년이 마른침 살짝 삼킨다. &amp;ldquo;날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amp;rdquo;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왜 이래? 미쳤나 봐. 소년이 다가온다. 하지만 소녀는 피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감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래. 음식이야. 음식. 뭐가 좋을까? 젤리? 푸딩? 아이, 정말. 뭐가 좋을까?&lt;br&gt;&#10;그 사이 소년의 입술이 소녀의 입술에 가닿고……&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정형행동과 피크닉</title><link>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0%95%ED%98%95%ED%96%89%EB%8F%99%EA%B3%BC-%ED%94%BC%ED%81%AC%EB%8B%89/</link><pubDate>Mon, 15 Apr 2013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A%B8%B0%EB%A1%9D/%EC%86%8C%EC%84%A4/%EC%A0%95%ED%98%95%ED%96%89%EB%8F%99%EA%B3%BC-%ED%94%BC%ED%81%AC%EB%8B%89/</guid><description>&lt;p&gt;책상에서 책을 읽는 중에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하니 박사님이 보였다. 박사님은 문간에 그대로 서서 말했다. 서두 없이 바로 본론에 진입했다.&lt;br&gt;&#10;“양. 동물원의 동물들은 좁은 공간에 갇혀 살기 때문에 정신이 이상하다던데. 알고 있나?”&lt;br&gt;&#10;“어, 기운 없이 축 늘어지거나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거요? 정형행동이라고 부르던 것 같던데.”&lt;br&gt;&#10;“그럼 그런 정형행동을 사람들도 하는 건 알고 있나?”&lt;br&gt;&#10;“그런 짓 하면 그냥 정신병원 가는 거죠. 굳이 정형행동이라고 하나요?”&lt;br&gt;&#10;“아냐. 사람들은 그게 병이라고 생각을 안 하니까. 정신이 이상하다고도 생각을 안 하고.”&lt;br&gt;&#10;“예를 들면 어떤 것요?”&lt;br&gt;&#10;“신호등이 파란 불이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거나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 버리는 것. 서로 만나면 인사하는 것. 윗사람에게 예절을 지키는 것. 모르는 사람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것. 밥을 먹을 때 수저를 사용하는 것. 옷을 입고 다니는 것. 휴대폰으로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는 것……”&lt;br&gt;&#10;“잠깐.”&lt;br&gt;&#10;“왜?”&lt;br&gt;&#10;“그건 정형행동이 아니라 법과 질서, 윤리와 기본적인 인간된 도리라고 하지 않나요?”&lt;br&gt;&#10;“그리고 정형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양. 잘 생각해보라고. 법과 질서와 윤리가 자연스러운 일이야? 인간도 동물이라고. 원숭이에서 뻗어 나왔으면 원숭이답게 나무 위를 활보하고 다녀야 하는데 좁은 방구석에 박혀 있잖나.”&lt;br&gt;&#10;그건 당신이잖아. 이 인간아.&lt;br&gt;&#10;본심을 삼키면서 말했다.&lt;br&gt;&#10;“그래요. 인간도 동물이죠. 그렇지만 다른 동물이랑은 다르잖아요. 인간은 지성이 있는 동물이잖아요.”&lt;br&gt;&#10;“그래도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이란 건 인정해야할걸.”&lt;br&gt;&#10;“인간된 입장에선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요.”&lt;br&gt;&#10;“아냐. 그건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을 뿐이야. 인간들은 자신들을 틀에 집어넣고 그걸 지키며 살기위해 아득바득 노력하고 있는 거야. 양. 시선을 넓게 가지도록하게. 이 우주엔 인간만 살고 있는게 아냐! 아, 잠깐. 생각해보니 양의 그런 사고도 정형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 경우에는 정형사고인가?”&lt;br&gt;&#10;나는 으쓱하곤 말했다.&lt;br&gt;&#10;“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정형행동 이야기는 왜 꺼내신 거에요?”&lt;br&gt;&#10;박사님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lt;br&gt;&#10;“양, 정형행동을 치료하려면 행동 풍부화를 해야 해. 정형행동을 하는 동물로 하여금 대자연의 향취와 내재된 본능을 일깨울 수 있게 해야하지. 나는 지금부터 나 자신에게 행동 풍부화를 적용해 나의 정형행동을 치료해보도록 할 생각이야. 양도 관심있으면 나오도록 해.”&lt;br&gt;&#10;나는 책을 덮으며 챙겨서 나갈게요, 하고 말했다. 박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닫고 돌아갔다.&lt;br&gt;&#10;“피크닉 가잔 소리를 왜 저렇게 길게 하실까.”&lt;br&gt;&#10;의문일 따름이다.&lt;/p&gt;</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