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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법

현실 단계

가끔 이야기했던 것인데, 나는 작품 속에는 작가가 내재하고 있는 ‘현실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연성과 현실성을 묶어서 이야기하려는 시도다. 현실 단계가 높은 소설은 이른바 고증과 사실 세계와의 차이가 없고, 낮은 소설은 사실 세계와의 괴리가 커진다.

1단계에는 사실성이 극히 낮은 작품들이 위치한다. 이 위치에 존재하는 것은 우화와 간결한 동화와 그림책, 극히 단순한 그래픽의 플랫포머, 극히 제한적인 상황을 재고하는 사고실험이 있다. 이 단계에 존재하는 세계의 특징은 여백으로 가득 차 있기에 뭔가 더 놓으려고 하면 이미 놓인 것들과 모순이 일어나 세계 자체가 무너져버린다는 점이다. 이곳은 가정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세계다.

2단계에는 고학년 대상의 동화나, 스타워즈와 같은 고증에 별 관심이 없는 SF 영화, 퓨전 사극, 서프라이즈의 재현 장면, 많은 부분에서 고증이 맞지 않다고 지적 당하는 판타지/무협 소설들이 이곳에 있다. 이 단계의 특징은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 이 세계는 사실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세계다.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뜯어볼 것도 없이 ‘엉터리’라고 생각하지만,

3단계는 2단계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군이 위치하는 곳이다. 3단계 작품들은 2단계와 실상 비슷하지만, 여백을 더 교묘하게 사용하여 지적을 받을 허점을 내어주지 않는다. 이곳에는 2단계에서 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도 위치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리얼리즘 소설’들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위치한 소설들은 2단계처럼 좀처럼 잘못된 부분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4단계처럼 진짜 사실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확신을할 만큼 선명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 교묘함 덕분에 3단계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인식에서 ‘사실 세계와 다름 없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김훈의 ‘언니의 폐경’과 관련된 논란이 그렇다. 이 세계는 발견되는 것이 늦거나 무시될 뿐, 고증 실수가 존재하는 곳이다.

4단계에 위치하는 것은 작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사실 세계라도 무방한 곳이다. 이곳에는 과학자들의 하드SF, 역사학자의 역사소설, 자전적 소설, 르포, 다큐멘터리들이 있다. 흠결을 극히 찾아보기 힘들며, 때로는 대안되는 현실로까지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완벽한 작품들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3단계 안에 부분적인 4단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이한 사항은 아니다. 작품들을 문장으로, 컷으로 나누어 본다면 2단계와 3단계를 넘나들 것이다.

5단계는 당연히 지금 여기의, 가공되지 않은 현실 세계다. 이곳은 여백이 극히 드물지만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 같은 관측 불가능한 것들과 신, 마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들로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5단계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은 그 아래 단계에서 채워넣으면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개연적’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예를들어 귀신이 나오는 호러 작품(또는 괴담)의 경우, 그것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2단계가 될 수도, 3단계가 될 수도,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까지 갈수도 있다.

이 같은 현실 단계는 현실 세계와 작품 세계가 얼마나 일치하도록 만드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창작자가 ‘얼마나 교묘하게 사실이 아님을 숨길 수 있는지’ 또는 ‘고증과 무관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지’에 대한 더 고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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