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경험담
1학년 학기 초 였습니다. 저희 인문대학은 각 층 마다 갤러리가 있는데 평소에는 그냥 의자나 탁자가 놓여 있어 휴게실로 쓰입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보니 북적거리긴 하는데 강의실이 가까우니 크게 소란스럽지는 않고 독서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부산스러움을 유지합니다. 하루는 거기서 책을 읽고 있었지요.
학기 초였고 친구고 뭐고 아무 것도 없는 아싸에다가 어디 가기도 애매한 한 시간 공강이라 강의실 앞 쪽 휴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아마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 였던 거 같군요. 후반부의 포풍같은 전개 장면을 앞두고 읽기 시작하려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누군가가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이상한 게 인상이 잘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조금 추레해보이는 옷차림이었는데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으니 당연하긴 합니다마는.
아무튼 제 왼쪽 자리에서 몸을 앞 뒤로 천천히, 크게 흔들면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라고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처음엔 외국인인줄 알았습니다. 저희 학교에 중국인 유학생이 꽤 많거든요. 그렇지만 휴게실에 다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하는 통화라서 뭐라고 하는지 곧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냐, 엄마 죽여.”
“아니라니까. 엄마.”
“응. 응. 응.”
“없애야 된다니까 그걸.”
“엄마가?”
일단 대화에 엄마가 들어가기는 하는데 엄마랑 대화를 하는 건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도대체 누구랑 통화를, 무엇에 대해서 통화를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자꾸 관심을 가지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그냥 책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막 클라이맥스 부분을 남겨두고 있었으니 강의실 들어가기 전에 읽고 싶었거든요.
주위가 시끄럽긴 했지만 집중을 하니 죄다 잊고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읽고, 결말부 감동을 되새김질 해보느라 시간을 좀더 썼고, 그렇게 한 40분 정도 읽고나서 시계를 보니 강의실에 들어가봐야 할 시간이더군요.
문득 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나려는데, 옆자리에 보니 그 사람이 그대로 앉아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상한건, 통화 내용에 진전이 조금도 없는 겁니다. 엄마를 찾고 대명사로만 지칭되는 뭔가를 죽이거나 없애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만 자꾸 하는 겁니다. 이러니 흥미가 당길 수 밖에. 책을 넣으려다 말고 다시 펼쳐든 뒤, 적당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척 하면서 대화 내용에 좀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가까운 거리라서 상대편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는 10분 동안 대화는 눈꼽만큼의 진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슈탈트 붕괴라고 하나요. 알고보니 하는 말이 몇 가지 패턴만 반복하는지라 엄마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라고요. 어떤 대화를 하면 말이 진전되지 않고 빙빙 돌기만 하는지. 휴대폰 시계를 보니 수업시간 직전이었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휴게실엔 오가는 사람이 이제 없었고 제가 가장 늦게 일어난 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늦은 오후 수업이라서 더 이상 수업이 없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사람은 수업도 안 들어가는건가 싶어서 돌아봤습니다. 이상하더라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예상 이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휴대폰 없이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휴대폰 같은 것도 아니었어요. 왼손 주먹을 그냥 귀에 붙이고 있는건데, 그거 가지고 장황하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절 쳐다봤다면 긴장감이나 공포감 조성을 더 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사실 전달에 어긋나니 관두겠습니다. 그 뒤로 저는 수업에 들어 갔고, 마치면서 여전히 그 사람이 휴게실에 있는 걸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혹시나 교내 유명인 같은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 뒤로 휴게실에서 그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