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자들(1)
소녀는 머리를 들었다.
완만한 계곡에 시체가 즐비했다. 많은 이들의 손에는 여전히 병장기가 쥐어져 있었고 칼만 하더라도 날이 하나인 것, 둘인 것, 칼날이 짧은 것, 긴 것, 손잡이가 긴 것, 짧은 것, 저마다 달랐고, 반대편에 쥐어진 방패도 둥글고 작은 것, 크고 네모난 것, 쇠로 된 것, 나무로 된 것 달랐다. 칼 만큼이나 다른 무기들도 많았는데, 날이 하나인 창, 셋으로 나뉜 창, 도끼날이 붙은 창, 아주 큰 도끼, 전쟁용 망치, 쇠도리깨, 쇠몽둥이, 못이 박힌 쇠몽둥이, 화살 석궁용 화살과 같이 가지각색이었다. 무기들 처럼 죽은 시체들도 저마다 생김생김이 달랐는데, 목이 잘린 것, 손목이 잘리고 배에 칼날이 꽂힌 것, 칼날에 배가 베인 것, 도끼에 등이 갈린 사람 것, 허벅지가 꿰뚫려 구멍이 난 것, 가슴이 뭉게진 것, 머리가 부서진 것들이 함께 엉켜 있었다.
소녀는 얼굴에 묻은 진흙을 손으로 털어냈다. 분명 아까전까진 마른 땅이었던 거 같은데. 소녀는 반사적으로 킁킁거렸지만 피냄새에 코가 멀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진흙은 검붉은 색이었다.
멀리서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혹시 서 있을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시체이거나 시체가 되어가는 중인 것 같았다.
소녀는 시체들에게서 전낭과 옷을 챙겨 달아날 결심을 했다. 해는 아직 하늘 가운데 있었고, 다른 경쟁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전에 원하는 만큼 챙겨 달아날 수 있을터였다.
마음을 다잡은 소녀가 몸을 일으켰을 때,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시체는 손바닥을 파다거렸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떴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게 시체가 아니란 걸 알아챘다. 등에 화살 꼬리가 덜렁거렸지만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체가 하는 행동이 무슨 뜻인줄 몰라 소녀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시체의 입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들리진 않지만 ‘앉아, 앉아.’ 하는 모양새였다. 시체의 시선은 소녀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소녀는 자리에 앉았다. 엎드렸다.
소녀는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틀었다. 계곡 위쪽에서 누군가 시체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부서진 창대로 시체들의 가슴을 차례차례 꿰뚫어갔다. 소녀는 숨을 죽이고 다시 얼굴을 진흙에 묻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시체들은 거의 다 용병이었다. 굳이 죽음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미 도망친 자들도 많았다. 살아 도망친다고 해서 오로국(烏路國)에 원한을 가질 용병은 없었고, 오로국도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소녀의 귀에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군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시체 중에 산 사람이 섞였던 모양이다. 소녀는 문득, 아까 도망쳤어도 되지 않았나 후회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망가겠다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쫒을까.
지금이라도.
소녀는 몸을 긴장시켰다. 창날이 갑옷과 고기를 꿰뚫는 소리가 적적하게 다가왔다. 아무리 가만히 있는 시체라지만 쉬지도 않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인간이 아닌 거 같았다. 곧 소리는 소녀의 옆 까지 다가왔다.
속도가 느렸다. 꼼꼼하게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소녀는 숨을 멈췄다. 가만히 기다리며 실수로 자신의 차례가 넘어가길 비는 수 밖에 없었다.
손등이 가려웠다. 씻어본 기억이 꽤 오래전이었다. 정말, 꼭 이럴 때 이러더라.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까 소녀에게 앉으라고 신호를 보낸 시체였다. 소녀는 한쪽 눈만 떠서 시체의 등을 보았다. 남자는 다리를 다친건지 절뚝거렸고, 등에 꽂힌 화살 꼬리는 덜렁거리다 떨어졌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도망쳤기에 금새 멀어졌다.
소녀는 시체를 확인하는 이 이상한 인간이 저 시체를 쫒길 바랐다. 그럼 내가 도망칠 기회도 생기겠지. 이상한 인간은 마침 그것에 대해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자 소녀는 속으로 호재를 불렀다. 적당히 거리가 멀어졌을 때 도망치면 된다. 시체를 들추는 건 이 인간이 사라진 다음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그는 한 발 옮긴 다음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무슨 상황인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저 멀리 시체가 고꾸라졌다. 등에는 부서진 창대가 더해졌고, 이제야 정말 시체가 되었다. 소녀는 백여 보나 떨어진 거리의 과녁을 부러진 창으로맞추는 재주를 본 적이 없었다.
소녀가 놀라는 동안 소녀의 등에도 칼날이 내리 꽂혔다. 칼날은 척추를 꿰뚫고 심장을 관통했다가 비틀리며 뽑혔다. 남자는 소녀가 꿈틀거렸다가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고선 작업을 계속해갔다.
소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죽을 때 진흙을 삼켰던 바람에 소녀는 깨어나며 기침을 했다. 파리 앵앵 거리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소녀는 침을 뱉고 일어났다가, 다른 시체의 등에 주저 앉았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까마귀 울음 소리가 들렸다. 걸치고 있던 넝마를 벗어던지고 꿰뚫렸던 가슴을 매만졌다. 아직 뚫렸던 곳이 뻐근했지만 구멍은 메워진 것 같았다.
소녀는 죽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끼쳤다. 몇 번이나 죽어도 매번 새로웠다.
일어나기 위해 발을 내딛자 바닥이 딱딱했다. 허릴 숙여 손으로 더듬으니 차가웠다. 진흙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름이었다. 게다가 대륙의 하서(河西) 지방은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였다. 그럼에도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되살아 날 때 마다 이랬다.
소녀는 입을 옷과 돈을 찾기 위해 시체 주위를 돌아다녔다.
해가 질 때 까지 부지런히 찾은 결과 소녀는 만족할 만큼 성과를 거두었다.
용병들과 해로국(亥路國)의 기사들은 전선에서 후방으로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기사가 있으면 시종과 하녀가 따른다. 소녀는 운 좋게 자신과 체격이 비슷하면서도 깨끗한 하녀복을 구할수 있었다(물론 얼굴이 깨어져 죽은 하녀는 운이 좋지못했다). 우윳빛 블라우스에 발목을 덮는 이끼색 코르셋 드레스, 긴 부츠까지 꼭 맞았다. 고동색 머리카락은 귀 아래로 느슨하게 묶었다. 허리춤엔 백인대장이 가지고 있던 고급스런 단도(칼집과 함께)를, 피묻은 크로스백엔 육포 한 묶음과 포도주 한 병, 동전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 주머니에 동화를 두둑히 채울 수 있었고, 은화도 몇 개 있었다. 기사들이 가진 장검은 좋은 것이었지만 소녀가 다루기엔 너무 컸다.
달은 불룩한 상현달에, 구름이 끼여있지않아 별빛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우선 몸을 씻고 싶었다. 요류(曜流)강이 가깝게 흐르니 계곡을 오르면 시냇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녀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누군가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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