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자들(2)
등골이 저릿한 감각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익숙해질리가 없는, 소녀로썬 긴 시간 동안 익숙해져버린 그런 감각이었다.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 말 않고 서 있는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죽지 않는 소녀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지 않았다. 다만, 죽을 때의 고통과 부활의 불쾌함, 번거로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소녀에게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때문에 소녀는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 까?”
중간에 절그럭 거리는 소리에 소녀는 말을 늘렸다.
등 뒤의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소녀가 자신 혼자 소리를 들었다 착각 한것인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등 뒤의 누군가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칼 뽑아드는 소리에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소녀는 오른쪽으로 빙글 돌아서며 단도를 뽑았다. 칼등을 왼손으로 받치며 상대의 칼날을 막는다.
까지는, 소녀의 예상대로였다.
상대가 오른손잡이인 것도, 중키의 남자인 것도.
하지만 힘은 소녀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강했다. 소녀는 힘에 밀려 넘어졌다. 칼날도 더 깊게 들어왔다. 오른쪽 팔뚝이 얕게 베였다.
상대는 갈색 로브 아래로 조끼형의 검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장검. 얼굴은 어둠에 가려 눈코입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짧고 덥수룩하다.
소녀가 일어서려고 하자 칼끝이 미간을 찔렀다. 피부를 살짝 베는 정도다. 놀란 소녀가 몸을 뺐지만 칼날이 따라와 미간에서 코끝까지 그었다.
소녀는 남자의 실력이 상당히 좋다고 느꼈다. 이런 장난은 실수하면 얼굴이 반토막 날 수도 있는데. 이런 어둠 속에서 이런 재주를 부리는 건 보통이 아니다.
오른편으로 흐르는 피 때문에 소녀는 오른쪽 눈을 감아야했다.
소녀가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돈? 몸? 목?”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소녀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뭘 원하는지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벙어리인가?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듯 세상이 조금 더 밝아졌다. 소녀는 순간 의아해했지만, 이내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혀졌음을 알았다.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는 문득 의심스럽단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아까, 당신……”
소녀가 알아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신발이었다. 죽은 척 하고 있을 때 보게 된 신발. 아무 특징이 없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까 그 인간이나 지금 이 인간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아까 날 죽였습니까?”
남자는 눈에 이채를 발했다. 무슨 소리냐, 되묻는 눈동자가 아니다. 과연, 역시, 라는 눈동자다.
소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불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 자신이 되살아 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상관없다. 번거롭지만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신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곤란하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흥밋거리나 실험의 소재를 제공한다. 소녀는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쾌한 경험이 몇 개 있었다.
소녀는 왼손으로 칼날을 잡아 당기며 일어났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떨쳐내려는 듯 칼을 위로 들었고, 소녀의 손가락이 후드득 떨어졌다. 소녀는 드러난 겨드랑이로 오른손을 뻗었다. 오른손엔 여전히 단도가 들려있었다.
갈비뼈에 부딪는 일 없이 칼날이 틀어박혔다. 단도라지만 두 뼘이 채 안되는 길이다. 칼날이 끝까지 들어갔다. 심장까진 몰라도 폐와 큰 혈관은 제 구실을 못할 것이다.
소녀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남자는 팔을 들어올린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소녀는 남자가 쓰러지길 기다렸다.
남자는 쓰러지지 않았다.
왼손으로 어깨죽지를 더듬더니 단도를 뽑아냈다. 찢어진 로브 밖으로 피가 푹 튀었다. 소녀는 로브 안 쪽은 어떨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단도가 버려지자 뎅그렁 소리가 났다. 남자는 왼손으로 겨드랑이를 누르며 천천히 오른팔을 내렸다.
소녀는 남자의 행동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칼날이 모두 들어갔고, 남자는 최소한 쓰러져야했다. 소녀의 의문에 답변이라도 하듯 남자는 몇 번인가 쿨럭거렸다. 오른손으로 칼을 든 채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소녀의 얼굴에도 몇 방울 튀었다. 끈적한 피였다. 남자는 끝으로 침을 바닥에 뱉어내곤, 그것으로 전부라는 듯 다시 칼을 내질렀다. 칼날이 소녀의 목을 꿰뚫었다.
소녀는 깨어나면서 첫 번째로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로 춥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자신을 죽였던 남자였는데, 바로 옆자리에 있었다. 코 앞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아직 밤이었다.
소녀는 입을 열었다가 목에 찬 피를 뱉었다. 그걸 본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갈 살피더니 말했다.
“다섯 시간 십칠 분.”
소녀가 물었다.
“그게 뭡니까?”
“니가 죽었다 일어나는데 걸린 시간. 늘 똑같나?”
“사인에 따라 다르긴한데.”
소녀는 선듯 대답하다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 뭡니까?”
“동족이라 생각하는데.”
“당신도?”
소녀는 칼에 꽂혔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소녀가 말했다.
“보여줘요.”
“뭘?”
“아까 상처.”
남자는 으쓱하더니 가죽 갑옷과 셔츠를 차례대로 벗었다. 단련된 몸은 상처투성이었다. 소녀는 의아했다. 자신의 몸에는 상처는 단 하나도 없다. 몸에 상처가 나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된다. 남자는 달랐다.
아까 칼에 맞았던 상처는 부어있었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단단하게 다문 입술처럼 상처가 오므려져 있었다. 소녀와 다르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죽지 않는 모양이었다.
“됐나?”
“됐습니다.”
남자가 다시 옷을 차려 입는 동안 소녀가 말했다.
“그런데 왜 다짜고짜 칼을 휘두른 겁니까.”
“니가 되살아 나는 게 확실한지 알아보려고.”
소녀는 놀랐다.
“제가 되살아날 줄 알고 있었단 겁니까?”
“오로국에 죽지 않는 기이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봉로국(鳳路國)에 진상될 거란 이야기도 있더군. 하지만 오로국이 봉로국에 가기 위해선 해로국을 지나야하는데, 결국 전선으로 이동하는 수 밖에 없다. 만약 오로국에 정말 그런 괴물이 있고, 정말 봉로국에 진상을 하러 간다면,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만나리라 생각했지. 실제로 오로국 보급 마차가 봉로국으로 움직이더군. 하지만 해로국 기사들이 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도착하니 시체 뿐이었지. 그 괴물이 도망갔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문득 죽은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더군. 혹시나 싶어 죽은 체 하는 것들을 모두 죽였다. 그렇지만 없더군. 달리 갈 곳이 없어 해를 보며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던 중에 니가 자리에서 일어났지.”
소녀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각 나라의 군세 이동은 그 누구라도 확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왜 말을 안 한 겁니까? 그랬다면 칼춤을 안 췄어도 좀더 고운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니가 날 만나고 싶어할지 아닐지 내가 어떻게 아나? 그리고 나는 말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가 평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니가 평범한 사람이라 말했어도 죽일 것이었다. 니가 거짓말을 할지 아닐지 내가 어떻게 아나?”
소녀는 눈쌀을 찌푸렸다. 시대가 시대라지만 어찌 저렇게 비인륜적인가. 소녀는 남자가 하서쪽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서는 나라가 수십 개로 분질러져 매일같이 무너지고 세워진다. 합쳐지고 갈라진다. 도덕이 없고 인의가 없다.
잠시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는 소리만 들렸다. 남자는 나뭇가지를 분질러 더 던져넣었다. 불은 부산스럽게 춤을 췄고, 일렁거리는 그림자는 어지러웠다.
남자가 말했다.
“여름인데도 날씨가 쌀쌀하더군. 하동은 원래 이런가?”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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