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용
이른바 붉은 용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다른 이름은 분명 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용에게 남은 이름은 붉은 용이라는 이름 뿐이었다. 용은 그 이름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그 일이야말로 그가 붉은 용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그가 밟고 선 창공은 푸름으로 빛났다. 붉은 용은 하늘 너머를 바라봤고, 다가오는 무엇들을 느꼈다. 붉은 용은 어떤 수를 읊조렸다.
“8,242”
팔천이백사십이.
무엇들은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들은 괴상한 생물들이었고, 날개를 가지고 날아오고 있었다. 붉은 용은 날개도 없이, 창공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이윽고 그 무엇들이 점에서 주먹만한 크기로 보이기 시작했을때 붉은 용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한발짝 발을 옮기자 그 둔중함에 공기가 요동쳤다. 무엇들은 괘념치 않고 붉은 용에게 날아왔다. 어느샌가 만들어낸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하지만 붉은 용은 그것들이 채 닿기도 전에 그 커다란 입을 열어젖혔다. 순간 폭발적인 그의 숨결이 공기를 지르며 무엇들에게 도달했다. 금빛 숨결은 삽시간에 무엇들을 불태웠다. 뒤늦게 가열된 공기가 팽창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넓은 창공에 그 소리를 듣는건 붉은 용 혼자 뿐이었다.
얼마인가 용은 그대로 서 있었다.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질무렵 붉은 용은 한발한발 창공에서 내려갔다.
붉은 용을 기다리고 있던건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붉은 용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붉은 용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기쁘지 아니했다.
그는 그대로 서서 인간들이 축제에 들떠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인간들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았다. 밤이 깊은 뒤 다시 낮이 오고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갔다. 붉은 용은 그자리에서 부동했다. 그는 느린 시선으로 바쁜 인간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다가왔다. 인간은 아니었다.
“너는 그것이 즐거우냐?”
붉은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즐거운가 보구나. 그 몸이 붉음으로 물드는데도.”
붉은 용은 자신의 몸을 훑었다. 쇠냄새. 피비린내. 눈 한가득 채우는 붉음. 한때는 씻어서 지워보려고 했지만 얼마안가 다시 피를 뒤집어 쓴다는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붉은 용은 언제부터인가 제 색을 잃었다. 그리고 어떤 용도 가지지 못한 색, 붉음을 얻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해라. 그것이 즐겁다면. 하지만 다음은 힘들지도 몰라.”
붉은 용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다.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몇번인가 용이 아는새모르는새 넘어갔다. 용은 부지런한 인간들을 보고만 있었다. 그때 또 다시 무엇인가가 붉은 용의 귀를 간질였다. 붉은 용은 창공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분주히 축제를 준비했다. 멀리 붉은 용은 창공의 점이되어 사라졌다.
붉은 용은 이번이 저번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창공을 그것들이 빽빽히 매우고 있었다. 아직 저 멀리에 있는데에도.
붉은 용은 당황하지 않았다. 최근 그것들의 수를 감안한다면 오늘과 같은 날이 오리라는건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 수를 읊조렸다.
“8,243”
팔천이백사십삼.
그렇지만 붉은 용은 이번 만큼은 무척이나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란도란 열심히 움직이는 인간들도 떠올렸다. 쓰러질 수 없는일이다. 붉은 용은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용은 언젠가 했던것 처럼 다시 숨결을 내뱉었다. 혹자가 파괴선(破壞線)이라 말했던것 처럼 오로지 에너지를 내뱉는데에만 중점을 둔 숨결은 공기를 요동시키며 그것들을 삼켰다. 빽빽히 박힌 그것들 사이로 거대한 구멍이 났지만 그것들은 안중에 두지않았다. 붉은 용은 그것들이 다가오기전에 두번, 세번, 계속해서 숨결을 내뱉었다. 붉은 용은 곧 그것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그마한 크기로는 승산이 없었다. 붉은 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몸을 부풀려나갔다. 적당하다고 생각할 무렵, 붉은 용은 그것들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피가 비를 이루었다. 멀리 지상의 인간들에게도 그 모습이 훤히 보였다. 붉은 용이 팔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그 팔의 붉음은 짙어져만 갔다. 하지만 그 피가 그것들에게서만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많았고, 붉은 용이 대처하지 못하는 부분을 공격하기도 했다. 붉은 용은 지쳐만 갔다. 다시금 빛 무리를 내뿜고, 손톱을 내지르고, 꼬리를 휘둘렀다. 지상에는 그것들의 시체가 수북했다. 하지만 붉은 용도 곧 쓰러질 것 처럼 휘청거렸다. 멀리 인간들의 마을이 보였다. 아, 쓰러질 수 없지. 용은 힘을 짜내어 그것들을 쓰러트려나갔다.
붉은 용은 8,243번째 전투도 끝마쳤다.
용의 깃털 하나하나마다 피가 뭉쳐 흉하게만 보였다. 비린 냄새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 때문에 용은 인간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좀 더 멀리서 인간들의 축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음은 더 진해졌지만, 용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용은 언제나 그렇듯, 그런 인간들을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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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 판한대!
주제는 빨강, 혹은 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