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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봉봉

여자가 말했다.

“거기 제 자린데요?”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여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말했다.

“뭐해요? 빨리 표 확인해봐요.”

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기차표를 확인하고 앉은 자리를 확인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자리였네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자리로 옮겼다.

여자는 의아하다는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방금까지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표적이 바로 이 여자였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여자를 미행을 할 생각이었는데, 우연찮게 그 여자의 자리에 앉았던 모양이다. 바로 얼굴이 팔려버렸으니 앞으로의 미행은 힘들듯 싶었다.

“이거 먹을래요?”

창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위스키 봉봉 하나를 들고 말했다.

남자는 멈칫했다 위스키 봉봉을 받아들었다. 혹시 이 여자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눈썰미로 슥 훑어도 위스키 봉봉의 포장지에 별 이상은 없었다. 여자가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눈치를 슬쩍 봤다가 위스키 봉봉을 까먹었다.

달콤했다.

깜짝 놀랄만큼.

남자의 표정이 펴지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말이 좀 심했죠? 옆자리 정도는 착각할 수도 있는데.”

남자는 그제서야 달콤한 맛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건 깨달았다. 엉겁결에 받은 초콜렛이 몇 년만에 먹는 것인지. 남자는 초콜렛을 천천히 녹여 이와 이 사이, 혓바닥 아래, 잇몸 속으로 스미게 두었다.

여자가 말했다.

“계속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신경이 예민해진 거 같아요. 방금도 기차에 오르기 전에 소매치기 하나가 제 가방을 들고 가려고 했거든요. 역무원이 금방 잡아줘서 다행이지. 아, 근데 어디까지 가세요?”

말이 많군.

남자는 하는 수 없이 기차의 종착역을 말했다. 그녀는 연고지는 불명이었고 어디로 갈지 예상할 수 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우와! 저랑 같은 곳에 가시네요.”

그건 의외였다. 종착역은 관광 도시 하나가 있지만 도망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이기에 좋은 곳이지. 기뻐한다면 남자가 기뻐해야했다.

남자가 말했다.

“무슨일로 가시죠?”

“관광이죠. 그 도시에 뭐가 있겠어요.”

“성수기가 아닌데.”

“혼자 가는 여행에 그런 거 따지겠어요? 그럼 그쪽은?”

“저는 일 때문에.”

“관광업에 종사 하시나보죠?”

“아, 뭐… 그렇죠. 잡지에 기행문 써요.”

“오, 정말요? 그럼 여러군데 가보셨겠네요?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남자는 잠깐 침묵했다.

남자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특별한 장소가 떠올랐다.

남자는 기억을 천천히 되살리며 말했다.

“남쪽 섬 중에, 대단한 건 아닌데. 별로 크지는 않아요. 마을 사람들도 몇 명 없어서, 배 타고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 곳이 있어요. 그래도 주변에 낚시 가는 사람이 많아서 배 잡는 게 어렵지는 않은데. 아무튼 봄에 가면 섬 전체에 철쭉 꽃이 흐드러지게 펴요.”

“흐드러지게? 말 되게 이쁘게 하신다. 계속 해줘요.”

“가만히 서 있으면 바람결 따라서 향기가 코를 찌르는데, 저 너머에서는 파도가 넘실대는 거죠. 그러고 있으면, 뭐라고 해야지?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는 느낌? 아, 혹시 꽃알레르기 있어요? 알레르기 있으면 안 되는데.”

“없어요, 저. 꽃 좋아해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는 그 향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조직원 하나가 그에게 자료라고 쥐어준 서류 뭉치에는 여자가 자주 쓰는 향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선호하는 옷가지는 무엇인지, 자주 가는 식당은 어디인지, 모두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 향수의 이름 또한 외고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향기가 좋네요.”

“뭐가요? 향수요? 그쵸? 저 이것만 써요.”

“그 향수 이름이 뭐에요?”

여자는 웃으면서 향수의 이름과 그 향수를 광고한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향수를 만드는 브랜드와 그 브랜드에서 만든 남자에게 어울릴법한 향수를 추천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여자가 부른 그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넣었다.

“와, 수첩 쓰시네요. 로맨틱하다. 요즘은 메모도 다 폰으로 하잖아요.”

“아무래도 이게 더 익숙해서요.”

일 때문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지워도 스마트폰에 기록이 남더라고요. 찢어서 태우는 게 훨씬 깔끔해요. 남자는 말들을 내려앉혔다.

하지 말아야 말들 때문에 입술이 마르자 남자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안 좋은 일들이 있었다고요?”

“네네. 뭐 따지기 시작하면 한 둘이 아닌데, 제일 큰 건 일 그만 둔 거 아닐까.”

“해고 당한 거에요?”

“아뇨. 프리랜서라고 해야되나? 뭐 대충 그런건데 클라이언트랑 마찰이 좀 있어서. 자세히 말하긴 좀 그런데… 제가 일하는 업계가 많이 좁아서, 트러블 생기면 말짱 황이거든요. 아 이제 뭐 먹고 살아야하나 몰라.”

여자는 푸념을 했지만 입에 금방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서 이 여행도 그냥 나 자신에게 주는 위로 선물이랄까, 새시작하기 전에 찬 바람 좀 쐬야지 싶어서 가는 거에요. 야! 신난다!”

자영업이 아니라 프리랜서인가. 남자는 으쓱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리받은 논들 사이로 둥글게 말아놓은 짚더미들이 듬성듬성 놓여져 있었다. 봄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암중에,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젊은 무당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높으신 분들 사이로 알음알음하여 소문이 퍼지고 남자의 조직에도 그 이야기가 닿았다. 남자는 점이며 사주팔자며 믿지 않았지만 무당의 말을 믿고 투자해서 큰 수익을 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쯤해서 무당을 멀리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조직의 보스는 그렇지 않았다. 이 맹랑한 무당은 큰 투자를 계획하는 조직의 보스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했고, 결과적으로 조직은 보스의 투자 실패로 크게 휘청거렸다. 무당의 말에 넘어간건 보스만이 아니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듯 무당은 자신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홀렸다. 각계각층에서 흘러나온 돈들이 무당의 말과 함께 모두 증발해버렸다. 무당이 모종의 작전 세력과 결탁했다는 사실이 얼마가지 않아서 밝혀졌다.

“이거 봐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남자의 볼을 찔렀다. 순간 남자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그게 여자의 검지손가락이란 걸 알아차렸다.

남자가 무뚝뚝하게 볼이 밀려난 그대로 있자 여자가 검지를 떼곤 키득거리며 웃었다.

남자가 말했다.

“뭐에요?”

“화났어요?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요?”

“일 생각 좀 했어요. 그쪽은 이제 뭐 할려고요?”

“글쎄요. 뭘 해야 좋을까. 거기 일 괜찮아요?”

“아뇨. 페이는 좋은데 업무 환경이 좀. 주말도 못쉬고.”

“그런가. 벌어 놓은게 있어서 제가 돈은 좀 있거든요? 차라리 가게나 하나 차릴까요?”

“치킨집 같은 거?”

“안 돼. 그건 내 최후의 보루에요.”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되게 많은가봐요. 돈 좀 있나봐.”

“그럼요. 늙은 깡패새끼들 등쳐먹었더니 배가 다 부르네. 이 캐리어 있죠? 이거 5만원짜리로 가득 채운 거에요. 바닥엔 금괴가 열장이나 깔려있고요. 아까 소매치기랍시고 이거 채어 가려다가 나자빠지는데, 얼마나 웃긴지. 그래도 조마조마하긴 했어.”

남자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순간 기차가 터널로 들어섰고 반사되는 상으로 옆 자리의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위스키 봉봉을 까먹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보자 여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아까 준 초콜렛에 아무 것도 안 넣었으니까. 나 그래도 먹는걸로는 장난 안 치거든. 그리고 괜히 급하게 굴지 마요.” 여자는 남자의 볼을 찔렀던 검지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나도 한 번 봐준 거니까. 초콜렛 하나 더 먹을래요?”

남자는 아까전 찔렸던 볼을 한 번 부볐다가 위스키 봉봉을 받았다. 달콤함이 질리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솔직히, 그냥 한 번 찍어봤어요. 몇 명 타지도 않는 기차에 체격 건장한 젊은 남자면 의심해볼만 하긴 하죠. 누가 겨울에 거길가. 어차피 이 기차에 당신 한 사람만 탔을 거 같지도 않고. 모르죠. 이 기차 탄 사람 전부가 내 목 따가는 임무를 받았을지도요.”

“이제 어떡할거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마지막 여행이라고. 내키는대로 일 보셔도 저는 할말 없는데, 그래도 저 지금 아양 떠는 거니까 좀더 봐줄 수 있죠?”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여자의 말대로 기차에는 두 사람이 더 타고 있었고, 아침 소매치기는 여자의 가방에 도청기와 위치추적기를 설치했다. 여자가 가방에 넣어둔 돈 보다 숨겨둔 돈이 훨씬 많을건 분명했으니까 그 행방을 알아야했다.

여자가 위스키 봉봉의 포장지를 구기며 말했다.

“조금만 더 깔끔하게 했으면 되는데. 아깝다 아까워. 아, 근데 걔는 벌써 죽었죠? 희재.”

“누구?”

“있잖아요. 키 작고 컴퓨터 잘 하던 애.”

“아.”

“걔 되게 귀여웠는데. 다 들통나니까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이 ‘언니만큼은 꼭 지켜줄게요!’ 막 이러고. 영화 참 많이 봤어. 아무튼 걔 죽었죠?”

“네. 아마도요.”

“아 불쌍하다. 사실 내가 하자고 꼬드긴건데. 머리도 똑똑하고 엄청 착한 애였는데 너무 미안하다.”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쏟아지는 역광에 남자는 인상을 썼다. 여자는 또 위스키 봉봉을 까먹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입에 막 들어가려는 그것을 낚아챘다.

남자가 말했다.

“취했어요?”

“그럴리가요.”

여자가 입을 열자 진득한 초콜렛 향과 옅은 알코올 냄새가 뒤섞였다. 남자는 제 입에 위스키 봉봉을 털어넣고 말했다.

“그만 먹어요.”

“왜요?”

“….”

“이거 가지곤 안 취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도청기를 발견하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긴 뭐. 더 먹으면 당뇨 걸리겠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뒤, 빠르게 휘갈겨 쓰면서 말했다.

“아무튼 마지막 정거장까진 가죠. 저희도 그게 더 편하니까.”

남자가 수첩을 들어 보여주자 여자가 눈으로 그걸 읽었다.

‘이번 정거장에서 내림. 조용히 준비.’

기차가 감속하기 시작하자 남자는 여자에게 일어서라 손짓했다. 둘 모두 일어난 뒤 남자가 나이프로 도청기와 위치추적기를 도려냈다. 남자가 도청기와 휴대폰을 의자 위에 놔두자 여자가 말했다.

“음악이나 들을까요?”

남자는 인상을 쓰고 기차칸의 앞뒤를 살폈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두 사람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남자를 보조해주는 역할이었다. 남자를 의심했다면 이미 움직였겠지.

기차가 정차했다.

남자는 가슴팍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둘은 승강장 기둥 뒤에 앉아 있다가 기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뒤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인상을 잔뜩 쓰고 마른 세수를 했다. 망했군.

여자가 자기 다리를 주무르며 남자를 쫒아왔다.

“아, 다리 저려. 왜 구해준거에요? 저한테 반했어요?”

“반하기는요. 돈 때문에 눈 돌아간거지. 이제 대책 없는데 큰일났다 진짜.”

“그럼 돈만 가져가면 되잖아요?”

“더 있는 거 알거든요? 간도 커 진짜. 얼마나 해먹은거야.”

“솔직히 반한 거 맞죠? 나 좀 예쁘잖아.”

“뭐래.”

남자는 홧김에 캐리어를 놔버리고 역 출구로 걸어갔다.

깜짝 놀란 여자가 힘겹게 캐리어를 끌고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니, 돈 때문이라고 하시던 분이.”

“난 그 향수 별로에요.”

남자는 투덜거리곤 여자와 함께 캐리어 손잡이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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