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꿈
창 밖으로 새가 재잘거리는 아침.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비비니 눈물이 묻어나왔다. ─또? 잠긴 목에선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만 동그랗게 모인다. 힘겹게 눈을 뜨자 왼쪽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은 입가를 지나 떨어져내려 손등에 툭.
최근 들어 잠에서 깨어날 때 마다 눈물이 괴었다. 눈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걸까? 문제가 있다면 안과에 가봐야하겠지만, 눈물이 흐르는 것 정도는 그다지 큰 병일거 같지는 않았다.
“…고 생각하는데.”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잠시 있어보라며, 제목도 없고, 그저 맨들맨들한 갈색 가죽에 쌓인 커다란 책을 한 권 꺼냈다.
“그거 뭐야?”
“백과사전.”
친구가 책장을 후드득 넘기며 말했다.
“눈꼽이 끼거나 눈이 충혈되거나 하지는 않아?”
“안 그래.”
“잠을 잘 못잔다거나.”
“전혀.”
“꿈은 어떤걸 꿨는데?”
“갑자기 꿈 이야기가 왜 나와?”
“여기 책에 적혀있어. ‘잠에서 깨어 눈물이 흐를 때 3, 꿈을 꿨을 경우’ 무슨 꿈을 꿨는데?”
“…몰라. 뭔가 꾸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그 책 도대체 무슨 책이야?”
“백과사전이라니까. 아, 여기있군.”
“뭐가?”
친구는 날 무시하고 또박또박 사전을 읽어갔다.
“‘위와 같은 신체적 이유 말고도 꿈 속에서 겪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꾼 꿈에 따라서 치료 방법이 다릅니다. 자신이 죽는 꿈을 꿨다면 1,3522 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꿈을 꿨다면 2,7223 페이지, 그 외에 꿈이라면 5,3742 페이지로 이동하세요. 무슨 꿈을 꿨는지 모른다면 9,3573 페이지로 이동해 꿈을 기억하는 방법을 참고하세요.”
“게임북?”
“백과사전이라니까 그러네. 넌 기억 안 난다 그랬지? 9,3573 페이지로 가야겠군.”
친구는 책장을 잔뜩 잡아 넘겼다.
“‘꿈을 기억 하는 방법 첫 번째. 머리에 강한 충격을 줍니다. 2.5 킬로그램 이상의 질량을 가진 물체로 꿈을 기억하려는 사람의 머리를 성인 남성의 힘으로 강타하면 만 분의 일의 확률로 꿈이 기억납니다. 주의. 천 분의 일의 확률로 기억을 잃기도 합니다.’ 해볼래?”
“거절.”
“그럼 ‘두 번째. 잠에서 깨자마자 희미한 꿈을 메모해두면 거기에서 꿈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했어?”
“아니.”
“‘세 번째. 잊고 살다보면 기억 나기도 합니다.’”
“어쩐지 백과사전이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나. 하나 더 있어. ‘네 번째. 44,9213 페이지의 제조법을 따른 약물을 마셔보세요.’”
“잠깐. 그 책이 사십만 페이지 까지 있다고?”
친구는 히죽 웃으며 검지를 흔들었다.
“쯧쯧. 태클이 늦어. 그 소리는 일 만 페이지 넘길 때 이야기 했어야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친구는 무시하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페이지를 넘기는 정도가 아니라 책 자체를 넘겼고, 책이 올려진 책상을 넘겼고, 사실은 책상이 아니라 책상이 놓여진 교실을 넘겼다. 아침 햇살이 비져 나오던 창문 밖으론 노란 별빛이 쏟아지고, 나무로 된 책걸상은 세련된 철제로, 녹색 칠판은 가상현실출력기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는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라늄 4 작은 술, 반물질 2 큰 술, 암흑물질 2 작은 술, 암흑에너지 1/2 작은 술…’”
“구할 수 있겠냐!”
“’…가 구하기 힘들다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로도 구할 수 있습니다. 잡초 한 포기, 이슬 한 방울, 흙 한 줌, 구름 한 조각, 햇빛 한 줄기, 봄비의 상쾌함, 36.5도의 체온, 보드라운 살결, 애정어린 시선, 따뜻한 포옹.’”
나는 눈을 깜빡였고, 친구는 “여기에선 못 구하겠네.” 말하곤 다시 교실을 뒤집었다.
이제 드넓은 들판에 나와 친구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때마침 계절은 봄이었고, 기억을 되살리는 약의 재료는 모두 모여 있었다. 친구는 나를 껴안았다.
친구가 말했다.
“어때, 기억나?”
“응.”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나 눈물을 닦았다.
이런 꿈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