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나의 세계 1. 약속이 있어서(1)
6개월만의 접속을 환영하는 건,
“크롸롸롸롸롸!”
드래곤의 아가리였다.
‘어째서?!’ 하고 의문을 표할 시간도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다운 포탈(Down Portal)로 튕기며 경험치를 깎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집중했다.
드래곤의 움직임은 빠르고 강력하지만, 동작이 너무 컸다. 나는 몸을 살짝틀어 달려드는 드래곤의 이빨을 피했다.
훅! 기압이 스친다.
-Oh! 아슬아슬한데요!
반의 반보만 잘못 판단했어도 회색빛 딱딱한 바닥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옆으로 뛰어들거나 과감하게 몸을 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는 ‘컨트롤’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절제된 동작은 다음 동작을 위한 초석이 된다.
나는 허리춤에서 빙마검 카타스트로피(氷魔劍 Catastrophe)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마검의 저주를 상쇄하기 위해 항마 장갑(降魔掌匣)이 푸른 빛을 내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카타스트로피를 아무런 페널티 없이 쥐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10분. 극히 짧은 것 처럼 보였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타스트로피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했다.
‘발검(拔劍)’ 스킬을 사용하자 내 능력치로는 불가능한 빠르기로 검이 뽑혀져 드래곤의 목덜미를 베었다.
-크리티컬 히트!
푹! 하고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대충 내지른 칼질로 드래곤을 일검에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장 바닥을 박차며 뒤로 재주를 넘었다. 제자리 점프로 10m 이상 물러날 수 있는 건 내 몸무게를 제어할 수 있는 그라비티 부츠(gravity boots) 때문이었다.
나는 드래곤의 상처가 카타스트로피의 저주에 의해 얼어붙는 것을 확인하고는 30m 가량 거리를 더 벌렸다.
드래곤, 특히 드래곤 중 육체 능력치가 가장 높은 거룡(巨龍)류와의 전투는 최대한 거리를 벌린 뒤 원거리 공격으로 상대하는게 일반적인 사냥 방식이었다. 단지, 대부분의 드래곤 사냥은 길드 규모 레이드(Raid)가 기본이지만.
드래곤은 얼어붙어가는 목의 상처에 괴로워하면서도, 나를 발견하곤 코에서 콧김을 뿜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과는 달리 머리의 산양 같은 뿔을 들이밀며 왔는데, 범위는 물론이고 빠르기가 아까보다 빨랐다. 바닥을 내려찍으며 달리니 숲이 쿵쿵 울렸다. 전력을 다해도 피하기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슬슬 그걸 쓸 차례죠?
“……1분만 조용히 하고 있어주면 안될까요? 티나?”
-Ummmmm…… 좋아요. 딱 1분만.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허리춤에서 총 한 자루를 뽑았다.
전투용이라기 보다는 의장용에 가까운 상아색의 작은 자동권총이었다. 크기도 손 안에 다 들어올만큼 작고, 잘 보면 총구도 10mm가 될까 싶은 총이라 언듯 봐서는 정말 장식용이 아닌가 싶지만, 한 번이라도 위력을 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달려오는 드래곤의 왼쪽 발을 정조준을 한 뒤, 빔건(beam gun)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
굉음과 함께 터져나간 번쩍임 뒤로 드래곤은 축을 잃고 왼쪽으로 나자빠졌다.
-Wow! 또 크리티컬 히트에요?
“티나?”
-……예. 좋아요. (지퍼 잠그는 효과음.)
하지만 빔건 또한 최대 출력으로 당겨버린지라, 총구가 후끈거렸고, 에너지캔(energy can) 하나가 다 소비되었다는 삑삑 거리는 경고음이 들려왔다.
나는 빔건을 다시 허리춤에 꽂으며 드래곤에게 달려갔다. 캔을 갈아넣을 시간은 없었다. 드래곤이 엎어져 버둥거리는 이 순간이 절호의 기회였다.
사실 드래곤 같이 강력한 몹에게 자잘한 데미지를 줘서는 한이 없다. 일반 능력치가 워낙 높기 때문에 많은 데미지를 감쇄시킬뿐더러, 거룡과 같은 경우엔 약하나마 재생 스킬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공격이 끊어지면 역공을 당할 수 있었다. 쉴새 없이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레이드라면 모를까. 혼자서 딜러, 탱커, 힐러를 모두 도맡아야 하는 솔로잉 플레이어(soloing player)가 드래곤을 잡는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라는 것은 다른 에그(EGG) 게임의 이야기.
제작사의 광고 문구에 따르면 이 게임은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을 기저로 하며,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만든 만큼 생명체라면 찔리거나 잘려나가는 순간 즉사하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드래곤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알려진 드래곤의 약점은 열 두 곳이지만 일곱 곳은 드래곤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공격하기 불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나머지 다섯 곳 중 세 곳은 드래곤의 주둥이 부근이라 공격하기 껄끄러웠으며, 남은 두 곳 중 한 곳은 내 검의 길이로는 닿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남은 한 곳은 드래곤의 뒷통수와 경추 부분의 이음새!
하지만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던 탓인지, 서너 걸음 정도 남겨두었을 때 드래곤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이제 ‘학습(學習)’ 스킬에 의해 행동 패턴이 변경될 것이고,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멀리 달아났다가 기습을 시도한다면 나는 지금의 주도권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닥에 발을 짚었다. 드래곤의 목덜미와의 거리는 대강 5미터에서, 드래곤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좁히지 못하는 상태.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드래곤의 목덜미 위에서 등장했다! 에너지캔 하나를 모두 소비하는 ‘근거리초공간도약(近距離超空間跳躍)’ 스킬! 흔히 말하는 블링크(bliŋk)였다.
지체없이 두 손으로 맞잡은 카타스트로피를 드래곤의 뒤통수 아래로 내리꽂자, 켁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드래곤은 무너져 내렸다.
나는 드래곤 뒤통수에 깊숙하게 꽂힌 카타스트로피를 뽑아내어 칼집에 넣고는 한숨을 돌렸다. 주위의 숲은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듯 고요했다. 나무는 낮고 얇았다. 깊은 숲의 고목도, 높은 산의 거목도 아니란 뜻이었다.
“드래곤이 리젠(regen)될 자리는 아닌 거 같은데…….”
혼잣말 처럼 말했어도 보충 설명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티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삐진건가?
“티-나?”
-…….
“크리스티나?”
-…….
“음, ……크리스티나 여신님?”
-1부-운!
귀가 아파서 눈을 찡그렸다. 귓바퀴에 걸고 있는 귀찌 - 가청기(可請器)가 전자음이 가득 섞인 젊은 여성의 목소리를 내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 무슨 말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 1분 동안 저에게 입. 닥. 치. 고. 있으라고 했지 않습니까?
“아아. 그거. 미안해요. 그런데 제가 언제 그렇게 심하게 말했습니까? 그냥 전투에 집중하도록 조용히 해달라고 한 건데. 제가 전투에 집중하지 못해서 다운 포탈로 튕겨나가면 여신 님도 딱히 좋을리가…….
-아뇨. 좋은데요.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릴…….”
-6개월이나 자리를 비우는 사제 같은 건 필요 없는데.
“…….”
-Ah. 이참에 한 번 ‘신벌(神罰)‘로 다운 포탈 가볼래요?
참고로 신벌은 ‘신 NPC’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규율에서 벗어난 사제를 단번에 다운 포탈로 보내는 스킬이다. 이 게임의 복잡한 게임 설정을 따르자면, 긴 시간 게임을 접었다가 재접속하는 것도 신벌 사유에 속한다.
“……죄송합니다.”
-Huhuhu……. 뭐어, 굳이 죄송하다고 하시니까는, 이번 한 번 만은 봐주도록하지요. Huhuhu. 그렇게 까지 사정사정 하신다면야. Huhuhu.
어쩐지 기분 나쁜데. 되게 기분 나쁘게 웃는데.
신벌 받고 다운 포탈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뭐라 한 마디를 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Ah. 그나저나 드래곤에게 왜 공격당했는지 궁금한건가요? 하긴, 6. 개. 월. 동안이나 노이즈(Noise)에 끼여 계셨으니 드래곤의 공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가네요. 그러게 누가 6개월이나 끼여있으랬습니까. 무능하군요 사제는.
“그럼 노이즈에 끼여 있었던 이 무능한 어린양에게 설명이라도 좀 해주시죠.”
-Um? 태도가 불손한데요?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말했다.
“빛과 열의 여신, 크리스티나 님. 부디 이 가련하고 미진한 수도자 걷는 이 길 위로 작은 등불이나마 밝혀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이건 놀리는 거 같은데…….
“그럼 도대체 뭘 원 하는 거에요?”
-아, 알겠어요.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설명해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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