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지다
나는 손바닥 위에 올라온 붉은약 한 알을 내려다보았다. 붉고 반투명하다. 다시 희를 본다. 희에겐 불안하거나 초조해보이는 태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당함이나 뻔뻔함을 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의 평정심을 지키기 위한 약간의 긴장은, 언제나 희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나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내가 말했다.
희, 넌 그 이야기를 믿고 있어?
글쎄요. 믿는다기 보다, 어떻게 설명해드려야할지. …이를테면 이 약을 먹는다는건,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믿지 않는 일이죠.
새끼 손가락?
예. 분명 여기 있지만. 희는 왼손을 주먹 쥐고 새끼 손가락만 펴서 까딱였다. 이게 내 진짜 손가락이 아니라 가짜 손가락이라고 생각이 드는거죠. 분명 모양도 길이도 느낌도 똑같은데 아, 이건 정말 가짜인것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는 결론을 내버린거죠.
무슨 말이야.
…음. 믿지 않더라도 손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새끼 손가락을 사용하게 되버리잖아요? 의식하지 않아도 새끼 손가락은 분명 새끼 손가락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거죠. 믿지 않아도 사용해버릴 수 있달까.
잘 모르겠는걸.
드셔보시면 알 거에요.
하지만…
…마약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약은 달라요. 분명 사람을 중독시키는 성분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한 알 뿐이라면, 몇 시간 쯤 지나면 자연스럽게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니까.
그럼 계속 약을 먹는 이유가 뭐야?
새끼 손가락을 믿고싶지 않아서죠.
나는 다시 약을 내려다보았다.
한 알 뿐이라면. 나는 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희는 무언가의 약에 취한 사람이라기엔 너무 총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에도 흐트러짐이 없고, 논리가 비약하는 점도 없다.
어쩌면 이 약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 이야기부터 너무 허무맹랑하다. 그렇다면 어떠한 환각을 보여주는 마약이는 생각이 들지만, 희가 마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믿기 힘들다. 평소의 희에게서는 마약을 하고 있다는 어떠한 징조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약에 대한 소문은 평범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너무 소란스러울 필요가 없는.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약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혀끝에 닿는 감각이 쓰거나 하지는 않다. 어쩌면 달달하다고 할까. 동아리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한모금 마시자, 쉬운 일이었다.
내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어떻게 바로 효과가 나타나겠어요. 그래도 보통 한 시간이 지나기전에 효과가 나타난다고해요.
한 시간이라…. 한 시간 뒤라면 오후 수업이 시작될텐데.
상관없을거에요.
자신하는 표정이다. 나는 희를 믿기로 하고, 희를 돌려보냈다.
문득 너무 쉽게 희의 꼬임에 넘어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처럼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지독한 마약이라면 나도 이 마약에 중독되어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마약이 내 예측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 역시 이런 미신을 믿지 말라고 희에게 좋게 타이르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담 붉은약을 먹음으로써 어느 쪽이든 이 약이 다른 이들이 알게되는 일은 없어진 셈인가. 희는, 정말이지 똑똑한 아이다.
이내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시작되었다. 수업의 처음에는 약을 의식했지만, 머리가 어지럽거나 가슴이 들뜨는 것 같은 약기운은 없었다. 컨디션에 이상이 없자 수업에 집중했고, 어느새 5교시가 끝나 있었다. 나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떨떠름해진 느낌에 쉬는 시간을 틈타 희를 찾아갔다.
교실까지는 들어서지 않고, 교실 문간에서 다른 아이에게 부탁해 희를 불렀다. 희는 다소 의아하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희가 말했다.
선배님, 어쩐일로?
희. 내게 준 약이, 그 약 맞아? 혹시 잘못 준 것 아니야?
예?
…그 붉은약 말이야. 소원을 이뤄준다는 약. 점심시간에 줬던 그거.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희의 표정은 당황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개된 장소에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걸까. 하지만 우리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에겐 방과후에 동아리실에서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희는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곤 교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희는 정말로 당황하고 있었다. 뭔가 눈치를 주거나 이야기를 하지말라는 제스쳐는 없었다. 나는 약간 불안해진 마음으로 나머지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는길로 동아리실로 걸음을 옮겼다. 동아리실은 별관 3층에 있어, 희의 반이 있는 3층에서 공중복도를 통해 곧장 갈 수 있었다. 희는 교실에 있지 않았으므로 동아리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희를 보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
아, 선배님. 희는 읽고 있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아까 그 약 이야기는, 무슨 말이죠?
책의 제목은 벽오금학도였다. 어렸을적 선계에 들어갔다 머리가 희어진 아이가, 다시 선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말했다.
희. 점심시간 때, 기억 안나?
글쎄요. 점심시간이라면, 동아리방에서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은 기억밖에 없는걸요.
맞아. 도시락을 까 먹다가 희는 잠깐 화장실로 갔지. 그리고 희 가방 안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들려와서 나는 가방을 열었어. 그리고 사탕함을 발견했고, 사탕을 하나 먹어볼까, 하다가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았지.
그리고 그 내용물이 ‘약’이었고요?
맞아. 기억나?
희는 미간을 좁히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선배님,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친한 후배라도 그렇지, 가방을 그렇게 막 뒤지시는건, 조금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니 그보다도. 게다가 아까부터 이상한 이야길 하시는데, 저는 아무런 약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선배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꿈이라도 꾸고 계신…, 선배님?
나는 희에게 다가갔다. 이제 희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아서 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나는 희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 모르겠어.
장난이 아니에요.
약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게 겁났기 때문일까? 그래서 점심시간때부터 약을 깨끗하게 숨기고서, 이제는 뻔뻔하게 약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나는 말하면서 희의 고운 두 손목을 붙잡았다. 희가 손목을 빼려고 하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화가 난 것 처럼 보이진 않았다. 희는 나와 눈을 맞추곤 말했다.
…선배님, 일단 진정하시는게. 저는 제 이야기를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직도 선배님이 왜 화를 내시는지 몰라요. 만약 제가 잘못한게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런 태도인데도 희는 공손하다. 내가 실수한걸까.
내가 붉은 약에 대해 추궁했을 때, 희는 그 약이 소문의 그 약이라고 말했어.
소문의 약이라면, 어떤 약을 말씀하시는지.
…먹으면 소원을 이루어진다는 약이야. 정말로 먹었다는 사람은 친구의 친구 밖에 없다는 그런 약. 그런 약을 희가 가지고 있었어. 나는 그 약을 다른 선생님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지. 하지만 희는 그러지말아달라고 말했어. 몸에 해로운건 하나도 없다고. 그저 소원을 이루어줄 뿐이라고 말이야.
…그러고보니 선배님. 제가 선배님에게 그 약을 드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아. 나는 그 약을 먹어보고 정말로 해로운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했어.
그래서, 소원은 이루어졌나요?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희는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선배님이 화를 낼 부분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왜?
마약은 가짜로 밝혀졌으니, 제가 숨기든 아니든 아무 일도 아니게 되었잖아요.
희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희는 자연스레 손목을 빼서 주물렀다. 손은 피가 통하지 못해 희었고, 그 아래로 내가 붙잡은 손자국이 또렸했다. 그 부분에서라면 분명 내 태도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희가 거짓말을 한 것도 사실이야.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그런 약에 대해서 몰라요.
희의 눈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졌다.
희가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
만약,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한 사람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이런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괜찮아.
선배님이 약을 드셨다면, 그렇게 믿는건 약의 작용 때문 아닐까요.
약을 먹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데. 나는 중얼거렸지만 불필요한 말을 내뱉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도 약의 작용이라면. 멀쩡한 정신으로 깨어있다는 착각이라면. 희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결국 그 약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그 약은 정말 ‘소원을 이루어주는 약’일지도 몰라요.
정확히는 그런 환상을 보여주는 약이겠지만.
선배님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답이 특별히 비밀이라서가 아니었다. 약을 삼키며 특정한 소원을 기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뭔갈 바라면서 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된다. 나는 이 사실을 희에게 말했다.
희가 말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 약을 먹으면 아무 일도 없다, 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변화가 생겼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겠네요. 그렇다면 선배님은 무언가를 바랐고, 그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모순된 상황과 기억이 나타나게 되었다, 라는 건 어떨까요?
내가 이런 복잡한 일들을 바랐다고?
그건 또 그렇네요. 희가 킥킥 웃었다. 선배님에겐 어울리지 않네요. 이 상황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선배님이 정말로 바란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지 몰라요. …선배님은 약이 아무 것도 아니길 바랐나요?
응.
약이 없어지길 바랐나요?
응. 약간은.
왜죠?
불필요한 질문 아냐? 그럼에도 나는 대답했다. 고작 별 것 아닌 약 때문에 소중한 후배와 내 신념을 저울질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고맙네요. 장난스럽지만 따스한 어투였다. 그렇지만 겨우 그런 바람들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건 의아한데요. 그런 바람이라면 환상 속에서 약이 없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런 기억간 모순이 생길게 아니라.
그것도 맞는 말이네.
…선배님은 저랑 다투고 싶었을까요?
뭐? 나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아냐. 그럴리가.
그럼 그 반대? 저랑 단 둘이 있고 싶었던걸까?
….
왜 대답을 못하시죠….
…하지만 애초에 이 동아리실은 늘 나와 희 전용이잖아.
그런식으로 말씀하시면 부끄럽거든요. 신입생을 받지 못하는 동아리라는 사실이.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주 오랜만의 농담인 거 같았다.
하지만. 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무서운데요.
어째서?
현실은 소망이 결핍된 상태니까요.
나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차피 한 알 뿐이라면, 몇 시간 쯤 지나면 자연스럽게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니까.’
나는 마른 입술을 물었다.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까. 희와 내가 갑자기 멀어지고, 함께 농담하고 웃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정말로 약이 일으킨 변화라면, 아주 약간의, 기억의 소소한 오류밖에 없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이 모호한 약이 그렇게 많은 변화를 초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희를 부르자, 희가 대답했다.
예?
아니, 아무 것도 아냐.
그렇다. 바뀐 것이 없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희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응.
그 약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하실것인지. …드신 약은 어땠나요?
희는 초조해보이는 눈빛이었다.
내가 말했다.
희. 어디까지가 환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