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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3

떠올리고자 하면 모두 다 떠올릴 수 있지만 막상 쓰고자하니 별로 쓸 거리가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큰 동작으로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엄마 코고는 소리가 방으로부터 들려올 뿐이다. 지휘자가 소리 없이 지휘한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클라리넷과 호른을 부는 연주자들이 보인다. 하프도 있다. 하지만 하프의 자리는 비어있다. 귀를 기울이면 텔레비전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G. 거슈윈 랩소디 인 블루. 자막이 지나간다.

글을 쓰는데 소리가 집중이 안되어 일단은 소리를 줄였는데 화면이 자꾸 신경 쓰여서 TV를 꺼야겠다 생각하는데 리모컨 찾기가 귀찮아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어 이렇게 글이나 두드리고 있다. 글을 쓰고 싶어서 쓴다기 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 밖에 없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사는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이야기가 이따금 가끔 종종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노라면 그 문장을 마칠 때까지 생각이 난다. 지휘자의 붉은 넥타이가 신경쓰인다. 오른쪽 상단에 20/TBC SBS 왼쪽 상단에도 무어라 적혀있는데 TV와 방송화면 비율이 맞지 않아 읽기가 힘들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관악 동문 정기연주회. 맞는 거 같다. 요즘들어 시력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안경이 필요한 수준은 아닌 거 같다. 단지 금방 눈이 피로해진다고 생각된다. O.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다시 자막이 지나간다.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음악인 거 같다. 부제는 1부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희미하게 소리가 들린다. 분주하고 빠른 음악이다. 지휘자의 동작이 커진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TV 위의 시계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독특한 악기가 보인다.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30미리 정도되는 박격포처럼 생기고 그 끝이 가늘어지며 휘어 끝내 연주자의 입으로 말려들어가는 모양의 악기다. 연주자들은 지금 당장 격발할 수 있는 화승총처럼 비스듬히 총구를 하늘로 들었다. 별로 이름을 찾아보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옛날에는 모르는 단어, 모르는 개념, 모르는 생각, 모르는 것들을 보면 무작정 검색하고 찾아보기 바빴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괜찮을 법한 것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걸 이제서야 느끼고 있다. 관현악에 취미를 붙일 일은 영원히 없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지금 꼭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목숨을 바쳐 알아내야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휘자의 손동작이 완만하다.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연주자들 보다 눈에 띈다. 연주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이 든다. 가장 뒤에 거대한 징 같은 악기를 다루고 있는 여자 연주자가 눈에 보인다. 역시나 이름을 모르고 무슨 이름인지 구태여 궁금해지지는 않는 악기다. 내가 더 궁금하고 생각이 기울어지는 것은 저 서울대 출신의 여자 연주자가 이따금 연주에서 저 거대한 징을 치기 위해 몇 년 간의 공부를 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을까 하는 사실이다. 물론 내 생각과 달리 저 징을 두드리는 일은 아무나 누구나 보조 연주자가 자신의 연주가 없을 때 한다던가 하는 형식의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행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거대한 징을 연주 안에서 몇 번 안되는 횟수를 치는 것은 사실 내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미련해보인다는 생각이 드니까.

하프 줄에는 붉은 줄이 보인다. 그러고보니 지휘자가 올라간 낮은 단상도 붉은색이다. 보이진 않지만 관객들이 앉은 자리도 붉은색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연주회인데 색깔이 더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전의 소리를 낮춰두었기 때문이겠지. 잘 보면 꼭 붉은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단상 이야기다. 단상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무슨 나무인지는 역시나 모르겠으나 그 나무 자체가 붉은 기를 띄고 있는 긋 하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살색. 그리고 악보를 받치고 있는, 뭐라고 부르지? 그것의 색. 검은색일테지만 금관악기들이 빛을 반사해서 약간 노르스름한 것도 같고 이쁜 색은 아닌 거 같다.

지휘자는 김종덕. 내가 알아봤자 그다지 유익한 정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선은 적어둔다. 적어두지 않는 일 보다 적는 일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있는 걸까. 시계가 돌아간다고 연주자가 연주를 한다고 지휘자가 지휘를 한다고 시간이 꼭 흐른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글을 쓴다고 시간이 꼭 흐른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꼭 흐른다고 이 글이 쓰여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이 완성된 순간 이 글은 이 글을 쓰는 동안 흐른 시간들을 영원히 잡아두게 되는 것일까.

농담이다. 재미없는 이야기다.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다지 쓰고 싶은 일과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멀게 둘러가서 둘러가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가끔 고양이는 떠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양이의 생사를 걱정하는지, 아니면 고양이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인지 망설이고 헷갈려한다. 고양이가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고양이를 영원히 보지 않아도 괜찮은걸까. 고양이가 죽었더라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은걸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야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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