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한 관심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이다. 하지만 정치와 정치적 사건들은 내가 관심을 가지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나는 이런 사실에 의문을 가진다. 민주주의에 있어 시민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담론이 중요한 것이라면, 이러한 주제는 보다 넓게, 자주, 빨리 의식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기 꺼린다. 심지어 친구 유모군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하는 건 지양되어야 할 일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이유 때문이냐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유모군은 “싸움이 나기 때문.” 이라고 답했다. 나는 ‘싸움이 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때로는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은 근거를 기반에 두고 있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싸움이 친근했던 관계,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관계 사이에서 발생한다면 서로에게 곤란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런 싸움 자체가 ‘나쁜 것’인가? 유모군은 싸움이라고 이름붙였지만 그것은 교양 없는 토론으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토론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다. 그것이 쓸모 없는 것인가? 게다가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또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토론에서 견지해야 될 자세를 언급하며 서로의 생각을 알아보는 선에서 이야기를 그만둘 수도 있다. 단지 싸우기 위한 도구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물론 싸우는 것이든, 교양 없는 토론이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고 그런 피로를 구태여 발생하고 싶지 않을수도 있다.
하지만 대인 관계가 아닌 경우에는 어떨까? 많은 사회 미디어들은 여야 간의 갈등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화합을 강조한다. 그들의 논쟁을 ‘소모적인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틀이다. 이 틀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생각이다. 싸움을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의식시키고 나면, ‘싸움을 거는 쪽’은 소모적인 논쟁에 급급한 이들로 비쳐지게 된다. 누가 이러한 틀을 만들고 있나? 누가 이러한 틀을 통해서 이득을 취하고 있는가? 이와 같은 생각은 정치에 대한 작은 자각에 불과하다. 이러한 틀을 만들어가며 싸우는 것은 여당과 야당이 다르지 않다. 야당 또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윤리적인 문제를 여당에 지우려고 했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여당은 야당이 세월호를 정치 공작에 이용하려고 든다고 했다. 그 바탕에 놓여진 세월호에 대한 의견과 가치를 판단하기 이전에, 두 정당 자체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지 않다. 단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옳고 그름과 같은 윤리적 판단은 별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당 관계를 지극히 감정적으로 대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의식하고 이야기하는데 있어 부적절하다.
B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B는 나와 아주 가까운 관계이다. B는 의경으로 복무했다. 복무 당시 광우병 사태가 있었고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었음에도 소위 닭장차를 타고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 가서 성난 군중을 막아서야 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B는 의경 복무를 하기 전까지 특별한 정치적 경향이 없었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한적이 없었다. 하지만 복무를 마치고 나온 B는 대단히 우경화되어 있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당시 의경은 복무 부조리가 최고조에 이른 때였고, 복무 기간에 겹쳐 거친 대규모 군중 시위를 막아서야만 했다. 의경 생활 간의 불만과 더불어 군중들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B는 지금까지도 조선TV를 보고, 일간 베스트에 접속한다. 노무현의 죽음을 희화한 영상을 보면서 웃는다. B는 가끔 의경 복무가 자신이 알지 못했던 북한의 단면과 좌파 빨갱이들의 진실을 볼 수 있었던 계기인 것마냥 이야기했다. B는 그런 것들을 알게 되면서 빨갱이에 선동당하는 군중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나는 육군으로 복무했다. 나는 시위대를 막아서거나 몸과 마음을 다칠만큼 폭력이나 부조리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정신전력 시험과 안보 관련 강의들을 들으며 보내야 했다. 그들은 베트남의 일화를 보여주며 우리 사회에 잠재된 종북 세력을 잡아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전쟁이 벌어지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최전방의 군인들은 모두다 죽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찾아본 보다 구체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런 건 거의 다 과장되어 있었다. 애초에 북한은 사격 연습도 제대로 못할 환경이라면서 특수부대와 같은 비대칭 전력을 조심해야 한다는 선전은 모순된다. 육군이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위험하다’는 틀을 만들어, ‘따라서 국방비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리고 그 국방비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골프장을 세우고, 방위 산업으로 위장해 뒷돈을 만든다.
수업 시간에 누군가 ‘젊은이들이 좌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 기억난다. 손을 들어 주장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기회가 왔다면 정말로 선동당하는 것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의경과 육군은 선동하는 실체가 눈에 존재한다. 하지만 종북 좌파는 어디에 있나? 물론 이석기와 이정희로부터 선동당해 종북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지하에 숨어 암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암약만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 많은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종북 좌파에 대해 ‘분노’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하지만 북한 주도의 통일 한국을 지향하며 우리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를 뒤흔들 위협하는 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 법에 따라 처분하면 될 일이다. 한국에는 그러한 사법 제도가 충분히 있고 신용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정치 또는 정치적인 담론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B를 비롯한, 대구라는 지역에서 겪을 수 있는 대인 관계의 정치적 성향과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겪게 되는 정치적 성향이 서로 마찰이 되는 부분에 내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우파적이고 후자는 좌파적이다. 이런 관계에서 나의 주장은 다른 관점의 성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B에게는 선동당하는 이만이 있는 것이 아닐거라고 주장하고, SNS에서는 B에게서 들은 의경의 지난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내 이야기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나도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비난과 모욕, 공격적 발언을 덜어내고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둘 다 크게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혼란을 느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야당을 지지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여당을 지지하는가? 그럼 결과적으로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모든 경우에서 선악으로 나누어 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선악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면 자신을 선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진실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했다. 정치 집단은 결국 어떤 집단이나 개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보수가 시장 경제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진보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복지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자 나는 좀더 마음을 두고 내 마음에 따라 내가 지지하고, 또는 지지하지 말아야할 것을 선별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여성 권익이나 장애인 복지, 성 소수자 권리, 환경·생태 복원과 같은 주제에 더 마음이 끌렸다. 소수자들이 응당 누려야할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건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데 있을 수 밖에 없다. 유전적, 환격적 요인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해낼 수 없고, 있더라도 매우 제한적이다. 이런 이들을 지지하는 일이 내 생각엔 더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이런 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언젠가 제인 구달은 자기가 탄 택시에서 짐승인 침팬지를 위한 운동을 하는 것 보다,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돕는 게 더 옳은 일 아니냐는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제인 구달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문제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이런 관용적인 태도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자원을 가장 필요한 첫번째 일에만 소모한다면, 나머지 일들은 결국 소외되고, 나중에 가서는 가장 필요한 첫번째 일도 그르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정치적인 생각을 하는데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꼈지만, 어떤 문제에도 제대로 대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와 판교 환풍구 사고같은 문제는 그 책임 공방을 나누는데 있어 여야를 비롯해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말을 달리했다. 세월호의 책임이 선장을 타고 유병언까지 올라갈 수 있다면, 반대로 화물 선적을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더 높은 관료에 이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국가안전처의 주요 간부는 전 해경의 관료들이다. 판교 환풍구 사고 또한 마찬가지다. ‘우연히’ 개인들의 사고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연히’ 죽었을 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적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사고가 무시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가지로 얽힌 각 부처와 단체의 이해관계를 통해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이 흐지부지되거나 무마되었다. 언론은 정치적인 제스처들을 부각시키면서 대중의 눈을 흐렸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보여진다. 정치적 발언에 대한 해석은 각자가 다르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를 단순히 ‘문제가 있다’하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런 관계 사이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존중받고 보호되어야할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단 한 가지라고 볼 수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부조리와 같은 문제는 끊어지지 않는 매듭이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자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의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다. 투표를 하거나, 투표를 독려하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가족이거나 주변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대개 나와는 정치관을 가지고 있고 하나가 아닌 다수의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버겁다. 심지어 B와는 언제부터인가 정치적 화제에 대해 전혀 입을 여는 일이 없어졌다. 서로의 의견을 전혀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대신 나는 보다 편한 상대들부터 시작했다. 그건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은 이미 일을 시작한 경우가 많고 노동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처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의견인 친구는 많지 않다. 특히나 아직 나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는 유모군은 내 생각에 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화두를 입에 올리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문제들을 잊을만할 때마다 언급한다. 나는 내 친구들이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잊어야하는 일들을 기억하고, 복잡해보이는 이해 관계 속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표를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인정해줄 수 있기만해도 우리는 좀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B와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와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이 꺼려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