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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자를 감상하기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일침을 했다고해서 그 일침이 타당하거나 옳을 거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글쓰기는 그 증명이 대단히 어렵다. 변수가 너무 많다.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작품들도 플랫폼 마다 판매량이 다르고 그 목표가 제대로 성취했는지 알 수 없고 몇 번이나 성공한 탑티어 작가도 다음 작품에서 반드시 성공한다 장담할 수가 없다(실제로 많은 ‘성공한’ 웹소설 작가들도 무료 작품 연중을 거듭한 뒤에 다음 작품을 성공한다). 그 의견이 옳은지 어떤지 알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글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작가이므로 조언을 들을지 말지 판단하는 것도 작가다.

물론 조언이랍시고 하는 입장에서는 ‘그럴줄 알았지 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 하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고 나름의 자존감을 챙길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 되겠지만 그건 작가를 위한 일이 아니고 조언자의 허영심과 알량한 자존감을 챙기기 위한 것인데 작가가 그딴 것까지 신경 써줄 이유는 없다. 아마 정말로 제대로 된 의견을 냈다면 작가의 마음을 선명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작가라면 자신의 글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고 감상을 요구하는 건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감상을 듣고 ‘전혀 몰랐어요!‘가 튀어나오면 서로 곤란하다.

감상을 줬는데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내 글을 읽긴 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자연히 그 감상을 스루하게 되거나 ‘요구하는 조언은 글을 너무 많이 고쳐야해서 벅찬데 지금 내가 그걸 할 틈이 없다’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그 감상은 반영이 안 될 수 있다. 소설을 감상을 주고 받는다는 건 작가가 일방적으로 감상을 절하면서 넙죽 받아 글에 완전히 반영한다는 말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웹소설을 쓰면 댓글이 얼마나 많이 달리는 줄아나? 애초에 하고 싶다고해서 모든 의견을 완전히 반영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감상을 받고 그걸 반영한다는 건 작가의 태도 뿐만이 아니라 감상자의 태도도 중요하다. 감상자는 작가의 위에 서서 시혜적인 태도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작가도, 스스로 작가가 아니라 작가지망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따위 태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눈꼽만치도 도움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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