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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으로서의 소설 읽기

독자는 소설에서 무엇을 읽는가?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 주제를 읽는 것일까? 아니면 ‘주제를 읽기 위해’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주제야말로 정말로 작가가 목표로 하는 것인가? 그것만이 이야기가 가진 힘인가?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우화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막을 지나가는 세 명의 여행자들이 있다. 그들은 쓰러진 노인을 발견하고, 노인은 물을 한모금 달라고 부탁한다. 사막에서 물은 무척 귀하고 그들은 먼 길을 떠나야하므로 노인에게 물을 내어주는 건 위험한 일이다. 다른 여행자들이 떠나고 한 명의 여행자만이 노인에게 물을 주고 잠시 보살핀다. 노인은 사막의 길을 잘 찾았고 여행자를 다음 마을로 인도했다. 다른 여행자들은 사막에서 길을 헤매다 죽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제는 간단하다. 선행을 베풀어라. 그럼 이 주제는 이 이야기의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하나의 문장으로는 이 주제가 이야기의 어디에 위치해 있다고 명확히 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영혼이 인간의 몸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어떤 서사 작품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고 하자. 그럼 작가는 이 두 인물 사이를 교섭하는가?

그리고 서로의 의견이 첨예한 상황이라면, 소설은 이 갈등을 어떻게 해서든 해소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완벽한 승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동인물이 반동인물을 불태우고 그 잿더미를 짓밟더라도 불충분하다고 느낄 독자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갈등의 해소는 둘 중 누군가를 승리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교섭할 것인가, 즉 두 사람 중 어느 쪽에 승수를 주는 대신 이익을 챙기게 하고, 명예를 가져가게 하는 대신 눈물 흘리게 할 것이며, 행복한 대신 포기하게 만들 것인가를 재어보는 일이다. 작가는 두 인물의 갈등을 그리고 해소한 뒤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결정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는가? 정작 이 교섭은 두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두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섭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교섭에 대한 은유에 불과하며, 작가는 자신의 대리자인 서술자를 불러 인물로 하여금 이러한 갈등에 대해 중재하고, 독자는 그러한 갈등에 대한 중재가 좋다 또는 나쁘다 평가한다. 실제로 교섭이 발생하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다.

앞선 우화에서 갈등은 세 사람이 노인의 부탁을 들을 때 발생한다. 이때 이야기는 독자에게 말한다. 독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상황은 나쁘다. ‘사막에서 물은 무척 귀하고’ 당신은 ‘먼 길을 떠나야’한다. ‘노인에게 물을 내어주는 건 위험한 일’이다. 작가는 한 명의 여행자만이 노인에게 물을 주고 여기에 더해 보살피기까지 하는 것으로 단순히 물을 건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독자는 작가의 교섭에 응한다. 물을 건네 주었다면 어쩔 수 없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이 독자의 체념 너머로 작가는 독자가 감안하지 않고 있던 노인의 기능을 되살린다. 지쳐 쓰러진 노인이라면, 그 노인은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오가던 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사막에 사는 노인이고 사막에서의 길을 잘 찾는 이가 아닐까. 노인에게 물을 건넨 여행자는 길을 안내 받는 정도의 친절을 보답받을 수 있지 않을까. 독자는 그 교섭에 다시 동의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응한 독자에게 선물을 덧붙인다. 알다시피 선물이란 기대하지 않을 때 더 기쁜 법. 작가는 다른 여행자들이 노인에게 물을 건네지 않아 죽었다고 쓴다. 독자는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이제 주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하기 이전에 주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주제는 교섭을 하기 위해 맞추어가는 맥락 안에서 형성되었을 뿐이다. 이야기 안에서 주제는 마치 인간에게 영혼이 없듯이 없다. 이렇듯 어떤 작가들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지 않고, 교섭을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쓸 수 있으며 그것 자체가 집필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을 평한다는 것은 작품의 주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교섭의 과정, 즉 소설 안에서 어떤 작은 거래들이 반복하여 누가 어떤 것을 취하고 잃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 된다.

그럼 소설에서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가? 우리는 교섭에 실패한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 주제를 지녔는지에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교섭에 실패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주제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결국 그 이야기는 그 주제에 대한 역주제가 된다. 이것은 주제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어떤 작품들은 위험한 주제를 뛰어난 교섭으로 독자를 설득시킨다. 그런 작품은 위험해지고 비평가들에게 있어 문제적인 작품이 되며, 대중들에게 회자되다가, 고전으로 남는다. 즉 중요한 것은 작품이 얼마나 좋은 주제를 말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교섭의 과정이 작품 안에서 얼마나 우아하게 일어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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