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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배운다는 것

규칙은 교수법의 일환이다. 이러저러한 규칙이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글쓰기에 규칙 같은 건 없다’는 말이, ‘글쓰기를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대중화된 기초 이론서가 존재하는 일반적인 지식과 달리 수 많은 글쓰기 수업과 작법서, 그리고 작가들은 모든 글쓰기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일원화된 글쓰기 방법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들의 글과 말은 서로 상충하거나 모순될 때가 있다. 그럼 글쓰기는 가르칠 수 없는 지식인가? 그렇지 않다. 글쓰기에서 배우는 규칙은 (넓은 의미에서의)스타일이다.

어쩌면 글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특정한 작법을 배우는 건 그 작가와 그 작법이 가진 스타일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은 흉내내기 어렵고, 흉내낼 수 있더라도 내 정체성이 훼손되기에 필연적인 반발심을 부른다. 다행히 제도권 작가나 수익을 내는 작가들은 이런 정체성 형성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시대별, 국가별 차이는 당연하고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도 제도권 소설, 대중소설, 웹소설, 장르소설 모두 각각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으며 해당 갈래 안에서도 더 좁은 범주의 스타일을 분류할 수 있다. 반면 이런 분류에 속하지 못한(즉 특정한 스타일을 형성하지 못한) ‘모호한 정체성’은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분류되지 못하는 모호한 정체성들이 단순히 가르치거나 배우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읽기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작가가 작법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독자도 독서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의 위치는 다르다. 모호한 독서 정체성을 가진 독자는 그저 여러 작품들을 두루 읽을 뿐이지만, 모호한 작법 정체성을 가진 작가의 글은 두루 읽히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은 흉내내기에서 온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존재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섭고 두렵고 꺼려진다. 모두가 긴 횡대로 서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또는 두 발만 나가야된다. 무리를 떨치고 달려나가면 안된다.

정체성-선명하다/선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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