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매체
매체로서의 소설이 가지는 장점은 거시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 보다는 묘사 자체를 생략할 수 있다는 것, 내면 묘사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시각과 청각을 제외한 미각 후각 촉각 근육감각 위치감 등의 복잡한 감각 전달이 가능하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많지만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돈이 한 푼도 안 드네!) 다른 장르에 비해서 장면 전환이 자유롭고 묘사와 사유가 똑같이 문장과 문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형이하와 형이상을 자유롭게 뒤섞을 수 있다. 서술 과정과 인간의 사고 과정이 유사하기 때문. 디테일한 묘사가 어려운 건 흠이지만 적절한 어휘만 있다면 한 단어로 표현 가능하다. 가성비가 좋다. 하지만 적절한 어휘가 없고 지금까지 본적도 없고 아주 복잡한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예: 피터 와츠, “블라인드 사이트”). 또 부분적으로 모호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읽힐 수 있는데, 꼭 단점은 아니다(예: 서술트릭). 오히려 모호한 것을 전달하기 쉬운 매체. 사실 이런 특성 때문에 소설은 호러에 아주 잘 어울리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점프 스케어=호러’로 받아들여직 되면서 정작 호러를 느낄 때 오는 공포감과 긴장감이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점프 스케어가 남발되면 긴장감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니까. 계속 딴소리 하자면 당연하지만 없던 것을 만들어 내고 적은 묘사가 상상력을 자극하니 판타지에도 적합하고, 내적 갈등을 쉽게 표현할 수 있으니 로맨스에도 적합하고, 인물의 사고 과정을 인과를 따라 전개 가능하니 미스터리에서도 소설은 강점이 있다. 다만 소설은 다른 매체보다 더 많은 능동성을 요구한다. 가성비가 좋은 이유는 동력의 일부를 빌려쓰기 때문. 예를 들어서 ‘뉴욕 센트럴파크에 한 셰퍼드가…’ 라고 하면 뉴욕과 센트럴파크와 셰퍼드에 대한 이미지파일과 정보가 읽는 사람 머리에 들어있어야 한다는 거. 이걸 장점으로 살리면, 장르소설에서 온갖 장르 소설 규칙과 클리셰로 쓰게 되는데, 앤서블, 차원도약, 다이슨 구, 특이점, 오메가 포인트… 전부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 같아도 설정이 나올 때마다 설명을 하는 것과 장르 독자가 읽을 걸 염두하고 글을 쓰는 것은 완전 다른 글이다. 다른 예를 들어 이세계 판타지에서 주인공이 기연을 얻어 먼치킨이 되는 것에는 장르 독자에겐 아무런 설명이 필요없다(글A). 만약 비장르 독자가 납득하지 못해 어떤 개연성을 요구하고 작가가 그걸 들어줘야만 한다면(글B) 그건 그냥 다른 글을 쓰게 되는 것이고, 정보량도 한참 낮고, 재미도 없다. 끝까지 글을 썼을 때 글A가 도달하는 곳과 글B가 도달하는 곳은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글A가 더 먼 곳까지 가게 된다. 글B가 도달하는 곳이 소설로선 의미없진 않겠지만, 장르로선 의미 없는 글이다(이런 일이 종종 벌어지는 곳: 신춘문예, 문예창작학과). 정말 재미있지만 다른 매체로 볼 수 없는 소설들이 있는데 다른 매체로 전환 될 때의 비용이나 자원 문제, 그리고 현대 작품이라는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 한다. 지극히 장르적인 소설들은, 지극히 소설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가 되기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