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이론을 왜 궁리합니까?
재미가 상대적이라는 이유로, 그 이유가 불확실 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 재미가 도출되는 방법에 대해 외면하게 된다면, 당장은 더 빠른 판단과 가치 있는 결과를 내는데 적합할지도 모른다. 재미에 대해 궁리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떠나서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재미 이론에 대한 외면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업계인의 눈’이라는 것은 예의 그 설명할 수 없는 재미에 대한 직관에 기대고 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상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전전긍긍하며 그런 직관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도, 그 직관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처럼 어느 날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아니, ‘존재한다’기 보다는 은퇴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지켜내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10%도 되지 않는다. 장르소설과 문단 양쪽 모두 이 규칙은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더 나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종류의 글쓰기에 도전할 때, 자신이 그 종류의 글쓰기 규칙의 ‘재미’를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다면 어떨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컨텐츠를 즐기며, 심지어 해당 분야의 종사자만큼이나 보는 사람들이 있고,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창작에 대한 ‘욕구’를 가진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창작 활동에 도전이라도 해보는 이들은 그 수가 많지 않다. 그럼 창작에 도전해, 백지 앞에 마주한 이들은 모두 창작에 성공할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그 순간에 포기한다. 무언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말로 아는 것’은 그것을 시도해보기 직전까지도 구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는 도중에도 헷갈리기 일수다. 그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나 재미에 대해 생각하라고 해’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그 ‘헷갈리기 일수’인 부분에서 글을 쓴다. 자신의 다음 글이 틀림없이 성공할 거라고 호언장담 하는 작가는 사기꾼이거나(그것으로 무슨 사기를 치겠냐마는) 음주자 또는 그에 준하는 수면을 취하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다. 직관은 신비한 마법의 요정이나 뮤즈가 내려준 영감이나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한 데몬이 점지해준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이해해왔던 것에 불과하며 가끔 신통한 답을 내어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쪽이 뇌의 속임수에 더 가깝다. 우리 뇌는 처음 느껴보는 시간과 장소에서도 ‘언젠가 봤던 것 같은데?’ 같은 소리나 하는 멍청이다. 그 직관이 결과적으로 성공으로 이끌어 주었다면 감탄할만한 능력이라 할 수 있으나, 내일도 성공으로 이끌어 줄 지는 알 수 없으며, 모두가 그런 뇌를 갖추지도 않았다. 나는 수 많은 작가들이 “그냥 재밌는 게 최고지.” 하는 말의 구렁텅이에 빠져 좌절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아는 작가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써내는 결과물이 재미없을 거라 믿으며 글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소설은 그 소설이 쓰여진 다음 해에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고 잊힌다. 많은 소설은 내가 모를 뿐이지 누군가에겐 재미있는 소설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재미 담론이 나올 때마다 재능 이야기를 하곤 한다. 성실한 것도 재능이고, 매사 탄탄한 문장을 지어내는 집중력도 재능이고, 다채로운 어휘를 지어내는 것도 재능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창작에서 두 번째로 갖춰야할 재능은 ‘취향’이다. 나는 ‘(이렇게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뛰어난 취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저 잘 될 거라 믿는 편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재미대로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재능이 끝까지 함께하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축복받은 취향은 커녕 ‘아니 나는 이렇게 재밌는데 남들은 왜?‘라는 의문을 한껏 품고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재미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그 빌어먹을 재미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을 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좀 급하다. 아, 물론 자신이 뛰어난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가 배신당한 사람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