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도 되는 사람
좀비가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죽여도 되는 사람이라서’다.
보통은 무언가를 죽일 때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죄책감을 짊어져야 하는데 좀비는 적대적이고 소통 할 수 없이 타자화 되었으며 그 타자성이 우리 모두에게 퍼질 수 있다는 이유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된다. 좀비의 썩고 더럽고 추한 모습은 그 근거로 마련되었다. 때문에 좀비 아포칼립스에 근거한 작품을 창작할 때 좀비가 되는 과학적 고증을 설명하려고 따져들기 시작하면 여러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왜 좀비는 인간에게 그러는 것처럼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피아를 구분 할 수 있는가? 그럼 그들을 속일 수도 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상황에서 좀비를 죽이는 것만이 해법은 아닌 것 아닌가? 다른 문제. 죽었는데 움직인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질병이고 불가역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은가? 되돌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좀비를 죽이는 것이 항상 타당하다 할 수 있는가? 결과적으로 ‘좀비’는 과학적 고증이나 SF의 방법론을 가져와서 이야기할 수 없으며, 하게 된다면 그것은 판타지나 SF에 더 근접하게 된다(물론 좀비의 존재 자체가 사변적이므로 SF이긴 하다). 작품 속에서 좀비의 근간을 파헤칠수록 좀비 아포칼립스물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좀비’를 다루는 매체들은 좀비가 정확히 무엇이고 어떻게 그렇게 되며 왜 그러는지에 대해 외면하게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어서 좀비를 죽여야할 근거를 찾지 못하게 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좀비를 찾는 사람들은 좀비를 죽이길 바라는데 죽이지 않을 이유를 찾는게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고 좀비 아포칼립스가 필연적인 비윤리성을 띄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좀비는 작품을 이루는 장르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며 작중에서 그것을 어떤 태도로 다루며 결과적으로 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작품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듀나의 단편 ‘너네 아빠 어딨니?‘를 보듯이. 좀비는 그 탄생 이후부터 꾸준하게 폭력성을 발출할 도구로서 그 쓸모를 증명해왔지만 최근 작품에 이르러선 좀비는 우리의 공간을 점해오는 폭력적인 무언가로 은유되기도 했고 이런 장치는 김이환의 “절망의 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해당 작품에선 좀비 대신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가 등장한다. 좀비는 해방적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살인, 유혈과 시체, 극단적인 폐쇄 상황을 다루기 위한 개연성을 제공한다. 때문에 작품에서 좀비를 다루는 것을 보면 그 작품이 타자를 어떻게 느끼고 다루는지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잘 가공된 장르 소재는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