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standalone="yes"?><rss version="2.0" xmlns:atom="http://www.w3.org/2005/Atom"><channel><title>작법 on wirae.me</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link><description>Recent content in 작법 on wirae.me</description><generator>Hugo</generator><language>ko-KR</language><lastBuildDate>Mon, 04 Nov 2024 00:00:00 +0000</lastBuildDate><atom:link href="https://wirae.me/%EC%9E%91%EB%B2%95/index.xml" rel="self" type="application/rss+xml"/><item><title>웹소설과 비웹소설, 서로 다른 문체로 글쓰기</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A%B3%BC-%EB%B9%84%EC%9B%B9%EC%86%8C%EC%84%A4-%EC%84%9C%EB%A1%9C-%EB%8B%A4%EB%A5%B8-%EB%AC%B8%EC%B2%B4%EB%A1%9C-%EA%B8%80%EC%93%B0%EA%B8%B0/</link><pubDate>Mon, 04 Nov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A%B3%BC-%EB%B9%84%EC%9B%B9%EC%86%8C%EC%84%A4-%EC%84%9C%EB%A1%9C-%EB%8B%A4%EB%A5%B8-%EB%AC%B8%EC%B2%B4%EB%A1%9C-%EA%B8%80%EC%93%B0%EA%B8%B0/</guid><description>&lt;p&gt;오늘 다른 작가분에게 받은 질문인데, 평소에도 몇 번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이라 트위터에 써본다. 질문은 이렇다. &amp;lsquo;웹소설과 비웹소설을 둘 다 쓰는데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amp;rsquo;&lt;br&gt;&#10;일단 두괄식으로 답하자면, 지금은 웹소설과 비웹소설에 글쓰기 차이를 두지 않는다. 예전에는 뒀다. 내 생각에 이것은 스타일─문체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lt;br&gt;&#10;소설쓰기 자체는 고등학생 무렵부터 단편소설로 시작했기 때문에 기본 문체는 어디까지나 단편소설에 맞춰져 있다. 정확히는 환상문학웹진거울의 환상소설, SF, 그리고 판타스틱에 실렸던 영미SF, 호러, 일본 라이트노벨과 파우스트계 추리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강한 장르 전형성을 가진 단편을 쓴다. 또한 각각의 장르가 단순히 서로 다른 장르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국가와 시기가 나뉘기 때문에 글을 쓸 때 문체의 세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고 있다.&lt;br&gt;&#10;이런 상황에서 웹소설을 쓰게 되었을 때는 지금까지와의 글쓰기와는 다른 문체를 불러와야 했다. 중학생 시절 읽은 대여점 판타지/무협 소설을 반영하려고 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웹소설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이미 올드한 문체였다. 웹소설을 쓰기 위해선 웹소설을 읽고 당시에 유행하고 있는 문체를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웹소설의 문체는 지금만큼 정리되진 않았지만 방향성은 같았다. 문장 구조를 꼬지 않고 짧게 쓰며 압축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상황을 풀어서 쓰고 행갈이를 자주한다.&lt;br&gt;&#10;웹소설의 문체는 일반적인 문체와 다르게 읽는 사람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도 고려한 문체다. 작가가 자기만족적인 글쓰기를 시도하면 독자에게 더 깊고 다채로운 만족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하루에 한 편을 못 쓸 수도 있고 200화 이상 못 쓸 수도 있고 완결을 못 낼 수도 있다. 웹소설에선 전자보다 후자가 몇 배는 더 중요하다. 웹소설에선 그 어떤 한 줄의 문장도 보다 더 긴 이야기만큼의 만족을 주지 못한다.&lt;br&gt;&#10;다행인 것은 내가 원래 장르소설을 썼기 때문에 웹소설에서 크게 다른 문체를 쓰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판타지와 SF, 호러 모두 잡지 게재를 거친적이 있고 웹소설과 유사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향의 독자층을 겪었다. 여전히 웹소설은 기존의 소설 장르들과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또 어느 부분에선 유사했다.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장르소설이 가지는 관습과 규칙, 형상을 고스란히 이어받기도 했다. 문체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손지상 씨가 환상문학웹진거울을 통해 소개했던 반보트 문장법은 여전히 웹소설에 적용이 된다. 나는 스티븐 킹의 조언도 잘 따르고 레이먼드 챈들러 흉내도 종종 내며 로저 젤라즈니(김상훈 번역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체들은 여전히 웹소설에서도 잘 먹힌다.&lt;br&gt;&#10;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생활의 전반부를 넘어가자 문체가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과거의 나는 좀더 다양한 문체를 쓸 수 있었다. 영미SF도 쓸 수 있고, 라이트노벨도 쓸 수 있고, 한국환상소설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체를 다양하게 쓴다는 것은 문체가 불안정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이 더 좋은지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고유한 문체가 아니라 어떠한 작가 또는 어떠한 장르의 문체를 묶어서 비슷하게 흉내내게 된다. 문체라는 것은 작가가 글을 쓸 때 감안하는 세부 규칙들의 합이다. 예를 들어 &amp;lsquo;인물의 대사는 꼭 따옴표 안에 넣는다&amp;rsquo;같은 것이다. 모두가 따르는 규칙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스티븐 킹의 &amp;lsquo;형용사 좀 쓰지 마라&amp;rsquo; 같은 것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엔 그리 어색하지 않다면 의성어나 의태어를 끼워넣는다. 절대 넣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세부 규칙들이 나 스스로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모른다. 이런 세부 규칙 중 일부는 의식되지만 거의 대부분은 손가락에 붙은 습관에 가깝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체 안의 세부 규칙이 조금씩 더해지거나 빠지는데, 더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온다. 정말로 바뀌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변화가 느려지면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체가 된다. 다만 불안정하거나 안정적인 것 양쪽 중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엔 사람이 나이들면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생기고, 이러한 경향이 문체에도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lt;br&gt;&#10;나는 아마 지금도 영미SF 흉내를 내고 라이트노벨 흉내를 내고 한국환상소설 흉내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문체의 세부 규칙도 좀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글쓰기로 지금 쓰는 문체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지는 의아하다. 실익이 있다고해도 일단 문체를 그때그때 바꾸는 것은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할 수 있다고해서 그게 쉽지는 않다는 뜻이다. 문체를 바꾸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lt;br&gt;&#10;안정적인 문체가 되면서 웹소설과 비웹소설 사이의 문체간 차이도 많이 줄어들었다. 근래에 와서는 웹소설을 웹소설로 의식하지도 않고, 장르소설을 장르소설로 의식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문체에 세부 규칙을 몇 가지 추가하는 것까지는 유별난 일은 아니다. 많은 작가들이 작품에 따라서 다소의 문체 차이를 둔다. 독자에게 보다 생경한 단어 위주로 쓰기로 선택한다거나, 관습적 표현을 최대한 지양한다던가, 각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가능하면 다음 문장에 대한 훅이 되도록 쓴다던가 하는 것이다. 이상의 세부 규칙은 비웹소설을 쓸 때 내가 감안하는 부분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좋은 문장 쓰는 법</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A2%8B%EC%9D%80-%EB%AC%B8%EC%9E%A5-%EC%93%B0%EB%8A%94-%EB%B2%95/</link><pubDate>Mon, 04 Nov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A2%8B%EC%9D%80-%EB%AC%B8%EC%9E%A5-%EC%93%B0%EB%8A%94-%EB%B2%95/</guid><description>&lt;p&gt;문장은 정량화할 수 있고, 따라서 좋은 문체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면 그것이 문장법이 된다. 한국에서의 글쓰기에서 수동태나 피동 표현을 피하라는 것 등이 문장법이라 할 수 있다. 다행히 이런 문장법은 따로 찾을 것 없이 문창과와 국문과에서, 한겨례 출판편집스쿨과 같은 강의 그리고 문장강화 같은 도서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문장법을 익히면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챗GPT나 클로드와 같은 LLM만 하더라도 반듯한 문장을 쓴다. 하지만 글이 좋지는 않다.&lt;br&gt;&#10;많은 작가들이 작법서에서 좋은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그 작가들 자신의 문체에 대한 세부 규칙을 나열하는 것으로 서로가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널리 알려진 &amp;lsquo;단문을 쓰라&amp;rsquo;는 조언만 하더라도 당장 트위터에서도 짧은 문장만이 좋다고 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작법서는 글쓰기를 막 시작한 사람을 위한 조언이므로 복잡한 문장 구조를 실수 없이 쓸 수 있다면 꼭 단문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lt;br&gt;&#10;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문체를 갖춰야 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문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자신은 어떤 세부 규칙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문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세부 규칙이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세부 규칙에 대한 인식이 사람은 글쓰기를 힘들어하거나 다른 작가의 문체를 흉내내게 된다. 후자는 아주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작가들도 자신이 읽은 글에 영향을 곧잘 받는다. 의식적으로 보고 베낀 것이 아닌 이상 표절이 아니고, 문체를 따라해도 진짜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물론 진짜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다들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한다. 문제는 글을 쓸 생각이면서도 글 자체를 쓰지 못하는 쪽이다. 이런 경우에는 &amp;lsquo;베껴도 되는 다른 교보재&amp;rsquo;를 베끼는 것도 방법이 된다. 자신이 평소에 하는 입말을 그대로 글에 반영하는 것이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글쓰기보다 말을 늦게 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안다.&lt;br&gt;&#10;문체 각각의 직접적인 세부 규칙은 많은 작가의 작법서의 문장에 대한 파트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제일 좋은 것은 그냥 글을 읽는 것이다. 문체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글을 읽는 것과 인식하고 읽는 것은 다른 읽기가 된다. 글을 읽으며 문장과 문단을 얼마나 길고 짧게 쓰고 어휘는 감정적인지 이성적인지 아니면 감각적인지 논리적인지 따위를 따져보라. 묘사나 은유가 많은지 일화나 예시를 얼마나 자주 쓰는지 글이 얼마나 빠르고 느린지를 느끼고 글이 독자를 웃기게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진지하게끔 만드는지 파악하라. 이 작가는 나열을 할 때 얼마나 많이 나열을 할까? 이 작가는 글의 주제에서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래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가? 이 작가는 시점을 얼마나 자주 바꾸나? 이 작가의 수사법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그리고 그러한 요소가 정확히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인식하게 되면 문체에 대한 세부 규칙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근대소설 그리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7%BC%EB%8C%80%EC%86%8C%EC%84%A4-%EA%B7%B8%EB%A6%AC%EA%B3%A0-%EB%A6%AC%EC%96%BC%EB%A6%AC%EC%A6%98%EA%B3%BC-%EB%AA%A8%EB%8D%94%EB%8B%88%EC%A6%98/</link><pubDate>Mon, 14 Oct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7%BC%EB%8C%80%EC%86%8C%EC%84%A4-%EA%B7%B8%EB%A6%AC%EA%B3%A0-%EB%A6%AC%EC%96%BC%EB%A6%AC%EC%A6%98%EA%B3%BC-%EB%AA%A8%EB%8D%94%EB%8B%88%EC%A6%98/</guid><description>&lt;p&gt;근대소설은 이제 소설이라는 개념이 워낙 넓은 걸 감안해서(예를들면 서유기/삼국지 같은 것도 소설이라고 하니까) 쓰는 말인데 보통 돈키호테를 기원으로 하거나 아니면 학자에 따라 여러 소설들을 근대소설이라고 불러서 딱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 이전의 소설과 구분되는 세련됨을 이야기하는 편임 앞에서 말한것처럼 일종의 내면세계가 있다거나 근대적인 가치(인권이나 평등이나 과학이나)가 작품애 내재되어 있다거나 그래서 각 나라의 근대소설도 이런 기준으로 따지는 편(한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은 혈의 누였던가)&lt;/p&gt;&#10;&lt;p&gt;여기서 근대소설은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으로 나아갔는데 이제 다른 예술이 그러하듯이 현실을 모방하는 방향이었던 거임 그래서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소설이라는 건 &amp;lsquo;얼마나 더 진실에 가까운가&amp;rsquo;에 대한 일종의 게임이 됨 그래서 리얼리즘은 더 정밀하고 세밀한 묘사, 합리적이고 모순적이지 않은 개연적인 사건들(이전 소설들은 개연성 없이 얼렁뚱땅이니까), 비과학적인 환상적인 것을 배제하기(이전 소설들은 이것저것 나옴), 인물의 내면세계를 보여주기, 구어체 대화(과거에는 글과 말은 다른 것이었는데 소설에서는 이 격차가 좁혀짐) 등등의 작업이 이루어짐. 근대소설이 그 이전의 소설과 구분지어지는 세대적 격차를 둔다면 리얼리즘은 그 글이 가지는 스타일들을 두루 이르는 거에 가까울듯.&lt;/p&gt;</description></item><item><title>SF라는 감각</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sf%EB%9D%BC%EB%8A%94-%EA%B0%90%EA%B0%81/</link><pubDate>Sat, 14 Sep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sf%EB%9D%BC%EB%8A%94-%EA%B0%90%EA%B0%81/</guid><description>&lt;p&gt;장르를 감지하는 건 일종의 다른 감각기관을 가지는 거라고 생각. 이산화 작가가 쓴 정지돈의 &amp;lt;브레이브 뉴 휴먼&amp;gt; 감상을 보듯 SF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SF의 좋은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까지의 SF에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를 잘 못함. 이건 개인의 취향이 아님. 비평문에서 비평가가 호오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음. 그냥 &amp;lsquo;실제로 그렇게 느낄 수 있기 때문&amp;rsquo;이고, SF비평이라는 건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과정이 뒤따름. 즉 무언가를 SF로 읽는다는 건 의식적 구분이 아니라 감각적 체험임. 리얼리즘과 똑같이.&lt;br&gt;&#10;단지 SF적 감각, 더불어 다른 장르와 장르를 구분하는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군의 장르소설들을 장르적 일체감으로 묶지 못하고 공통되는 규칙과 관습, 형상을 놓치고 있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없는 것.&lt;br&gt;&#10;이를테면 한국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한국소설의 현시대 소설은 그 이전 세대 소설의 장르성을 경유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도달하는 지점이 있고 그 부분이 바로 비평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지님. SF 또한 마찬가지임.&lt;br&gt;&#10;따라서 하나의 소설이 좋은 &amp;lsquo;리얼리즘 또는 한국&amp;rsquo; 소설이면서 좋은 SF가 아닐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좋은 &amp;lsquo;리얼리즘 또는 한국&amp;rsquo; 소설이면서 좋은 SF일 수도 있는 것임.&lt;br&gt;&#10;한국에서 &amp;lsquo;문학성&amp;rsquo;이 오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짚을 수 있음. 한국에서 문학성이란 기존 한국/제도권/리얼리즘/모더니즘 소설이라는 각각의 분화된 장르성이 결합된 성질을 이야기함에도 소설이 가진 어떤 좋음을 대변하는데 가치를 두고 있음.&lt;br&gt;&#10;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소설의 역사성과 유리되거나, 제도권에 소속되지 않거나, 리얼리즘 또는 모더니즘 소설이 아닌 &amp;lsquo;대중적이지 않은 작품&amp;rsquo;의 가치들이 평가 절하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읽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소설 읽기가 아니라고 빈번히 주장됨. 여기에는 계급성이 있음. SF 또는 웹소설 같은 장르소설이 소수의, 마니아의, 배우지 못한 사람의, 고전과 같이 깊이 있는 독서를 하지 못한 사람의 소설이라는 것.&lt;br&gt;&#10;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소설과 장르성은 소설은 물론 여러 이야기 매체를 포괄하는 양식이며 독자 및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경험, 가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컨텐츠로 존재하고 있음.&lt;br&gt;&#10;결과적으로 SF를 비롯한 장르비평도 이 &amp;lsquo;인식되지 않는&amp;rsquo; 장르 독자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이들이 무슨 이유로 읽는 것인지, 그렇게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로 향하게 된다고 생각함.&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글을 고치는 세 가지 방법</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D%84-%EA%B3%A0%EC%B9%98%EB%8A%94-%EC%84%B8-%EA%B0%80%EC%A7%80-%EB%B0%A9%EB%B2%95/</link><pubDate>Tue, 20 Aug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D%84-%EA%B3%A0%EC%B9%98%EB%8A%94-%EC%84%B8-%EA%B0%80%EC%A7%80-%EB%B0%A9%EB%B2%95/</guid><description>&lt;p&gt;글 고치기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가 된다. 첫 번째는 &amp;lsquo;퇴고&amp;rsquo;인데 이 퇴고의 어원은 당나라 시인 가도가 시를 짓고 나서 시어 중 하나를 밀 퇴(推)로 할 것인지 두드릴 고(敲)로 할 것인지 고민한데서 따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임의적으로 글을 고치는 모든 방법을 퇴고라고 부르기도 하나, 실제 사용례를 볼 때 이 고사 속의 시인의 고민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퇴고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로는 김훈이 &amp;ldquo;칼의 노래&amp;quot;를 쓸 때 &amp;lsquo;꽃은 피었다&amp;rsquo;는 문장을 며칠을 고민하다 &amp;lsquo;꽃이 피었다&amp;rsquo;로 고쳤다는 인터뷰가 있다. 이렇듯 퇴고는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기 보다는 작품을 깊게 읽었을 때 알아차릴 수 있는 작품의 섬세한 뉘앙스를 다듬는 것에 가깝다. 두 번째 고치기 유형으로는 &amp;lsquo;편집&amp;rsquo;이다. 편집은 흔히 편집자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실제로도 그래왔지만 현대 한국에선 그런 경향이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 작가가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는듯. 하지만 편집이 편집자의 일이었을 때도, 작가 또한 작품을 편집했다. 편집은 쉽게 말해 시간 순서로 배열된 사건을 어떻게 의미있는 읽기 순서로 배열하느냐는 문제다. 유명한 편집 일례로는 &amp;ldquo;롤리타&amp;quot;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있다. 나보코프는 작품을 쓸 때 작품을 인덱스 카드(고리로 한데 묶을 수 있는 일정한 크기로 자른 종이)에 써서 들고다니며 읽고 시시때때로 순서를 재배열하고 내용을 추가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amp;lsquo;다시쓰기(rewrite)&amp;lsquo;다. 다시쓰기는 문자 그대로 초고를 그대로 두고, 초고의 내용을 작가의 내면에서 재정립하여 첫 문장부터 다시 쓰는 일을 말한다(물론 이건 원론적인 이야기고, 고칠 부분이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그대로 두면 된다). 작품의 모든 요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만 고치게 될 경우 글의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에 등장인물이나 사건, 배경 등을 자연스럽게 추가하거나, 작품의 스토리를 완전히 변경하는 경우에도 다시쓰기는 언제나 유효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고치기 과정을 위해서는 초고가 존재해야하는데, &amp;lsquo;초고 집필 이후 고치기&amp;rsquo;라는 과정은 영미권 작법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범적인 글쓰기다. 스티븐 킹은 &amp;ldquo;유혹하는 글쓰기&amp;quot;에서 이러한 작법(&amp;lsquo;우선 빠르게 초고를 집필하고, 휴식을 가진 뒤 이후에 고쳐라&amp;rsquo;)을 설파하고 있으며, 반대로 존 스칼지는 &amp;ldquo;슬기로운 작가 생활&amp;quot;에서 이런 글쓰기 방법론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글 고치기 방법 중 무엇이 가장 좋을까? 글을 고치는데 몇 십년 시간이 남아있다면 계속 다시쓰기를 하다가 편집도 퇴고도 몇 년하면 이상적이지만, 세상은 작가가 이상적인 글을 쓰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써야할 글은 많고 마감도 눈 앞에 닥쳤다. 작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글을 쓰는 방법도 다르다. 작가마다, 그리고 글마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충분히 만족스런 글이 쓰여졌다면 퇴고로 마무리를 하고, 아주 바쁘다면 편집만으로 글의 가치를 올려볼 법하며, 오래전의 초고를 꺼내볼 생각이라면 다시쓰기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우수한 초고라고 자신한다면 글을 거의 고치지 않고 내놓을 수도 있다(존 스칼지나 이영도 같은 작가들은 쓰기 전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된 원고가 있다고 자신한다). 글을 고칠 때는 일관된 원칙보다 글마다 대응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웹소설에서의 문장</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C%97%90%EC%84%9C%EC%9D%98-%EB%AC%B8%EC%9E%A5/</link><pubDate>Wed, 03 Jul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C%97%90%EC%84%9C%EC%9D%98-%EB%AC%B8%EC%9E%A5/</guid><description>&lt;p&gt;웹소설에서의 문장은 다른 소설과어떻게 달라야할까? 웹소설의 문장은 1. 두괄식 또는 미괄식으로 &amp;lsquo;한 문장만 읽어도 전체 문단이 이해가 되도록&amp;rsquo; 쓰는 것이 좋다. 2. 그것이 싫다면 &amp;lsquo;한 문단을 한 문장으로 구성&amp;rsquo;하면 된다. 이런 경우 소설은 좀더 빠른 템포를 가져간다. 3. 웹소설에서 중요한 건 독자에게 선택권을 줘야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옵션은 빨리 읽기고, 이것은 1에서 제시한 것처럼 한 문장만 읽어도, 또는 2에서 대사만 읽어도 작품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작품을 더 깊고 자세하게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다른 문장을 통해서 부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선택권은 웹소설을 읽는 독자층이 다양하고 그만큼 읽는 방법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서서 웹소설을 읽고, 어떤 독자는 주말 밤 자기 전에 한 주 동안 모아둔 웹소설을 읽는다. 웹소설은 두 독자 모두에게 의미 있는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4. 앞에서 한 이야기와 연관되게 웹소설에선 &amp;lsquo;중언부언&amp;rsquo;해야 한다고 한다. 일반적인 소설 문장에서 이런 중언부언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피해야할 사안이지만, 웹소설의 경우 작품이 초장편으로 무척이나 길고(최소 8권에서 길게는 수 십권), 인물들이 못해도 수 십명 씩 등장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품 안에서 기억해야할 인물과 사건, 묘사는 다시 등장할 때는 가능한한 같은 서술로 다시 제공되어야 한다. 특히 인물의 경우 몇 개의 묘사를 묶어서 해당 인물이 어떤 인물이며 주인공 또는 주변 인물들과 어떤 상호작용을하는지에 대해서 즉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 어떤 웹소설 독자도 그 인물이 언제 어디에서 나왔는지 다시 찾기 위해 작품을 뒤적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5. 웹소설에서 모든 묘사와 설명은 &amp;lsquo;우선은 직관적&amp;rsquo;이어야 한다. 대상이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있을지언정 지나치게 은유적이거나 쉽게 이해할 수 없다면 독자는 해당 서술에서 너무 오래, 그러니까 다른 웹소설과는 다른 일반적이지 않은 속도로 작품을 읽게 된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작품에 대해 불신을 유예시키지 못하는 계기가 된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1세대 판타지 소설이 없는 이유</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1%EC%84%B8%EB%8C%80-%ED%8C%90%ED%83%80%EC%A7%80-%EC%86%8C%EC%84%A4%EC%9D%B4-%EC%97%86%EB%8A%94-%EC%9D%B4%EC%9C%A0/</link><pubDate>Sat, 08 Jun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1%EC%84%B8%EB%8C%80-%ED%8C%90%ED%83%80%EC%A7%80-%EC%86%8C%EC%84%A4%EC%9D%B4-%EC%97%86%EB%8A%94-%EC%9D%B4%EC%9C%A0/</guid><description>&lt;p&gt;소위 1세대 판소의 자유분방함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현재 웹소설과 비교할 정도의 경쟁력 자체는 없음 당시 소설들이 출간까지 이어진 건 시장 개척자라 다른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임. 소위 정판은 지금도 팔리는데 1세대는 플롯 층위가 그냥 안 팔리게 생김. 정판이 나와도 1세대 판소가 호출되곤 하는 걸 보면, 정판과 1세대 판소는 접점이 많지만 아무래도 구분점이 있고 그게 플롯이 아닌가 싶다. 웹소설을 정의하는 게 또 플롯이기 때문에. 웹소설은 간단하게 우상향 플롯 정도로 부를 법한데, 1세대 판소는 훨씬 자유분방하다. 드래곤 라자는 야트막하게 상승하고 내려가길 반복하다 시작된 그 지점에 다시 도달하고, 더로그는 중간에 추락을 좀 하다가 조금 높은 지점에 도달하고, 데로드엔 데블랑은 오르는가 싶더니 그냥 바닥에 내리꽂는다. 웹소설엔 이런 종류의 플롯이 그냥 없다. 그때는 좋았다는 사람들은 플롯이 색다른 맛을 줬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건 연재소설에선 안 좋은 플롯이다. 그때는 더 좋은 플롯에 대한 합의가 없었기에 서로 경쟁하지 않았지만, 웹소설에서는 더 좋은 플롯이 뭔지가 알기 때문에 플롯은 고정되고 다른 부분에서 차이점을 두게 된다. 자유분방한 플롯이 주는 차이는 다른 소설과 구분되는 가치를 만들어내고 그 때문에 노스텔지어를 만들어내긴 하지만, 사실 지금도 그런 작품들이 꽤 나오고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람들은 1세대 소설의 모든 요소를 별로 안 좋아한다. 장르 판타지에서 스킨만 바꿔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건 일종의 낭비다. 작가도 독자도 힘들기 때문에 같은 역할(잡몹)을 가졌으면 같은 이름(오크)으로 부르는 것이다. 선험적 지식(회빙환천재 등등)이 없으면 긴장감이 생기고 기대감도 없으니 안 본다. 비극적인 건 안 본다. 등등. 잘 쓰면 된다고 하는데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잘 쓰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판타지에 남자 주인공으로 회빙환천재 넣으면 더 많이 본다. 잘 쓰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라서 돈을 덜 버는 실수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론이 없는 건 아니고 그걸로는 절대로 밥도 못 먹고 산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다른 소설에 비하면 시장이 괜찮다는 웹소설도 소설이란 한계는 못 벗어나서 딱히 험한길 가는 사람 대우 해주지는 않는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기획과 직감</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8%B0%ED%9A%8D%EA%B3%BC-%EC%A7%81%EA%B0%90/</link><pubDate>Sun, 19 May 2024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8%B0%ED%9A%8D%EA%B3%BC-%EC%A7%81%EA%B0%90/</guid><description>&lt;p&gt;기나긴 기획 끝에 나오는 작품을 망치고 난 뒤, 직감적으로 쓴 작품이 잘 되는 이유는, 작가는 기나긴 기획을 통해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어떤 정론을 구축했고, 직감적인 작품이 그 정론을 딛고서 더 멀리 나아가는데 성공했기 때문 아닌가 싶다. 실패가 필연적이었던만큼 성공 또한 그런 것.&lt;br&gt;&#10;기획의 문제는 챗봇 AI가 이야기를 만드는 가지는 문제와 유사하다. 이미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한다는 거. 하지만 데이터베이스는 불충분하다.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괜찮은 작품들은 이 범주 안에 존재한다. 정론은 이미 있는 규칙을 정리한 것.&lt;br&gt;&#10;좋은 작품은 오래된 것과 결합한 &amp;lsquo;새로운 것&amp;rsquo;이다. 기획은 오래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범주로 정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을 통해 만들어지는 성공 법칙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장할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lt;br&gt;&#10;하지만 직감적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정론을 벗어난다.한 사람의 직감은 그 사람이 가진 데이터베이스 보다 크고 자유롭다. 데이터베이스가 잘 정리되어 있다면 직감은 그 정론을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더 좋은 길로 향하게 되어 있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소설의 분량</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C%9D%98-%EB%B6%84%EB%9F%89/</link><pubDate>Fri, 07 Feb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C%9D%98-%EB%B6%84%EB%9F%89/</guid><description>&lt;p&gt;제도권에서 단편은 원고지 200매 기준 60매에서 120매 사이. 그러니까 1만 2천자에서 2만 4천자 정도. 넉넉하게 200매 정도까지도 단편으로 본다. 영미권은 단어수로 세지만 분량은 조금 더 많은 편으로 기억(short story 기준). 장편 단권(novel)은 국배판이 12만자 정도 되면 300페이지 나온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원고지 기준 600매 내외인 셈. 도서정가제 이후 경장편/중편 경향이 강해져서 단편과 장편 단권 사이의 작품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중편(novella)은 200매 정도로 알고 있는데 경장편의 정확한 분량이 궁금해서 핀 시리즈라는 경장편을 내는 현대문학을 펼쳐서 대강 찾아봤는데 이영도의 &amp;ldquo;마트 이야기-시하와 칸타의 장&amp;quot;은 10만자, 듀나의 &amp;ldquo;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amp;quot;는 8만자 정도. 차이가 좀 있지만 400매, 500매가 최근 경장편 분량인듯 하다. 장편소설은 단권으로 끝나는 경우가 흔하지만, 웹소설 경향에선 권수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 남성향 판타지는 매니지에서 여덟 권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편. 과거에 이런 권수라면 대하소설로 불렸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역사소설의 면모로 개인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여러 캐릭터를 보여주었기 때문인데, 단순히 분량만이 아니라 소설의 속성도 분류에서 드러나는 것. 단편을 열 작품 정도 발표하고 나면 작가들의 작품이 단편집으로 묶여서 나오고 그러면 300페이지를 조금 넘고 그랬다. 최근엔 한 권을 경장편, 중편으로 구성하거나 단편으로 구성(이 경우에는 일러스트를 넣어 볼륨을 키운다)하기도 하기 때문인지 단편도 열 편이 아닌 그보다 적은 분량으로 싣는듯. 이렇게 되면 단편소설의 분량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작은 책이면 편수가 많은 쪽이 볼륨이 있어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문예지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앞서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지도. 매수당 고료 계산을 한다면 단편을 적게 실은 단편집이 작가에게 더 이득인 것 같기도 하고.&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군상극에 대하여</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5%B0%EC%83%81%EA%B7%B9%EC%97%90-%EB%8C%80%ED%95%98%EC%97%AC/</link><pubDate>Thu, 02 Jan 2020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5%B0%EC%83%81%EA%B7%B9%EC%97%90-%EB%8C%80%ED%95%98%EC%97%AC/</guid><description>&lt;p&gt;군상극은 문예사만 짚어서는 설명하기 어렵죠. 군상극은 무대 예술과 영향을 주고 받았던 과거 작품과 달리 영화나 TV 드라마, 또는 게임에 더 가까우니까. 서사문학은 최초에는 단일한 시간선을 보여주는 &amp;lsquo;내러티브&amp;rsquo;에만 치중되어 있었지만 플롯이 등장했고 그 플롯은 점점 더 복잡해졌습니다. 소설은 여러 문예사조나 근접한 다른 서사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죠. 복잡한 플롯을 가진 서사 작품은 단일한 시간선이 아니라 둘 이상의 시간선을 보여준다는 말이고, 이 말은 하나의 장소 또는 인물의 과거와 미래, 또는 같은 시간 선에서의 다른 장소와 인물, 또는 &amp;lsquo;서로 다른 인물들의 같은 시간대&amp;rsquo; 등 다양한 시각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 렌즈를 통해서 창작되는 작품은 이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메라는 어디에나 놓일 수 있고, 제한적인 시각만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무대 예술과는 차별화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소설 또한 이러한 방법론을 채용했고, 복잡한 구성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구성이 문예사적으로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래도 제 말의 방향 자체가 틀렸을 것 같진 않긴한데), 이런 복잡한 구성은 소설에서 계속해서 발전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군상극은 아주 복잡한 수준의 구성이 요구 되는 작품군으로 보입니다.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적어도 3명 이상의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인물들을 동일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드러내는 작품 구성이라고 할텐데, 사실 소설에서만 드물 뿐이지 많은 드라마(특히 아침 드라마라고 부르는 부류)는 이미 군상극이라고 부를만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를 옮기는 건 쉬우니까. 소설에서는 드문데 왜냐하면, 이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한 줄 한 의 문장으로 읽어내려가야만 하고 이것은 독자에게 단일한 하나의 시간의 흐름으로 이해 됩니다. 따라서 시각이 둘 이상이면 일관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초점이 등장하죠. 초점은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인물과 인물, 장소와 장소를 옮겨갈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군상극이라 부를만한 작품들은 서로 다른 인물과 장소,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일관성을 가진 초점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나의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시각을 조망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이건 멀티테스킹을 요구하는 게임적 시각에 가깝기도 하죠(물론 &amp;ldquo;얼음과 불의 노래&amp;quot;처럼 오래된 작품의 경우 게임에 영향을 받았는진 모르겠습니다. 조지 R. R. 마틴이 RTS를 즐겨봤을까요? 그럴 것 같은 인물이긴 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니어쳐 게임은 즐겨 봤을지도 모르고). 군상극이 가지는 의의라면 개인의 내면만이 아니라 군중이라고 부를만한 다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겠죠. (생각해보니 이와 같은 서술이 더 오래 쓰였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amp;lsquo;거대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amp;rsquo;이라면 역사서도 있겠죠. &amp;ldquo;얼음과 불의 노래&amp;quot;는 이차세계의 미시사를 다룬 역사책을 픽션으로 다듬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요.) (거대서사가 주목받지 못하고 미시사가 도래한 것도 이런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런 기준이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쓰레기를 쓰겠어</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3%B0%EB%A0%88%EA%B8%B0%EB%A5%BC-%EC%93%B0%EA%B2%A0%EC%96%B4/</link><pubDate>Sat, 19 Oct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3%B0%EB%A0%88%EA%B8%B0%EB%A5%BC-%EC%93%B0%EA%B2%A0%EC%96%B4/</guid><description>&lt;p&gt;&amp;ldquo;나는 쓰레기를 쓸 것이다&amp;rdquo;&lt;br&gt;&#10;솔직히 복창하진 않는데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별로 의심하지는 않고 있음.&lt;/p&gt;&#10;&lt;p&gt;Q. 자존감이 낮아 보여서 걱정 되요&lt;br&gt;&#10;A. 진짜 잘하지 않는데 잘한다고 생각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괴롭게 만든다면 구태여 자기를 속일 필요가 없죠. 돼요.&lt;br&gt;&#10;아무튼 글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는 중요하고 기왕이면 자기 글의 단점을 잘 이해해서 고치는 방향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장점을 강화하라고요? 장점이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불안 없이 웹소설쓰기</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B%B6%88%EC%95%88-%EC%97%86%EC%9D%B4-%EC%9B%B9%EC%86%8C%EC%84%A4%EC%93%B0%EA%B8%B0/</link><pubDate>Fri, 27 Sep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B%B6%88%EC%95%88-%EC%97%86%EC%9D%B4-%EC%9B%B9%EC%86%8C%EC%84%A4%EC%93%B0%EA%B8%B0/</guid><description>&lt;p&gt;생각난 개념이 있는데 뭐라고 불러야 이쁜 어휘가 될 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amp;lsquo;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긴장감을 불러오는 플롯 장치&amp;rsquo;인데 이걸론 뭔가 부족하다. 정확히는 &amp;lsquo;주인공의 기반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amp;rsquo;인데. 불안장애에 가깝다. &amp;lsquo;해결되지 않고 넘어간 작품 내의 갈등 요소&amp;rsquo;인데. 단순히 &amp;lsquo;불안감&amp;rsquo;이라고 부르긴 심심하다. 아무튼 &amp;lsquo;불안감&amp;rsquo;이라고 부르자면, 이건 호러와 미스터리의 근간이고 장르소설이 아니라도 제도권 소설, 고전소설이나 리얼리즘과 모던에서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는 갈등을 위한 개연적 요소로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판타지 소설에서는 아니다. 정확히는 웹소설 현대판타지. 장르소설 즉 현대판타지 소설은 단순히 문장의 길이, 문단의 모양, 연재되는 플랫폼의 차이로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제도권 소설과 현대판타지의 가장 큰 차이는 불안감의 부재다. 현대판타지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은 명확해야한다. 때문에 주인공에 대한 초점과 시야, 알고 있는 정보는 현대 판타지 소설에서 서로 비슷한 경향이 있다(작가 시점을 선호하고 1인칭의 경우 거의 모든 정보를 앎). 회귀물이 인기 있는 것도 미래를 아는 주인공에게는 &amp;lsquo;불안감&amp;rsquo;이 없기 때문. 불안감을 만드는 요소들: 주인공과 독자 사이의 정보 격차, 주인공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 대적자와 완전히 갈무리되지 않은 갈등 요소, 저주, 주인공을 위협할 수 있는 운명적 요소, 드러나지 않은 배신자, 불필요하게 더 많은 정보(작가와 독자 사이의 정보 격차) 등 조금 더; 서사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이를테면 영웅 서사에서의 하강부), 불안을 자아내는 문장, 도플갱어 등. 불안감은 위기와는 다른데, 위기는 이제 대면했으며 돌파해나갈 것이라는 점과 달리, 불안은 기저에 깔려 있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며 주인공을 계속 옥죌 것이라는 예측에서 온다. 긴장감과도 다른데, 정확히는 불안은 긴장의 하위 요소다. 긴장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중립적인 반면 불안은 부정적이며, 긴장이 주인공의 행동을 기대하게 하지만 불안은 보다 수동적인 대응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불안은 항거할 수 없는 운명과 저지른 업보에 대한 마땅한 응보, 개인이 끝내 이겨낼 수 없는 부조리, 세상이 만들어진 모양에 대한 개인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현대판타지는 왜 불안을 거절하는가? 판타지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타지가 현실을 거절하는 건 당연하다. 그야말로 대척점에 있다. 이와 같은 비평적 접근과 별개로 창작론의 관점에서 불안의 부재는 곤란한 지점이 있다. 불안은 소설 서사의 기본이며 개연성의 층위를 쌓아나가는 와중에 생산되는 필연적 요소다. &amp;lsquo;불안 없이 소설 쓰기&amp;rsquo;는 &amp;lsquo;어떻게 무염 닭가슴살을 맛있게 먹는가&amp;rsquo;와 유사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웹소설의 해답은 그냥 소금을 치는 것, 불안을 내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불안은 각 편의 시작 지점에서 나타났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해소된다. 때문에 각 편에선 불안이 존재하지만 소설의 전체를 보면 &amp;lsquo;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amp;rsquo; 보이게 만든다. 일종의 마술이다. 이를테면 25화의 작품이라면 3&lt;del&gt;4회 분량으로 한 에피소드를 진행하며 2&lt;/del&gt;3회 분량에선 주인공이 &amp;lsquo;낙관적 전망을 가진 긴장감(불안의 반대 요소)&amp;lsquo;으로 소설을 진행하고 마지막 한 편을 불안을 드러냈다가, 해당 편의 끝에서 불안을 갈무리하고 종료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현대판타지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불안이 &amp;lsquo;가짜 불안&amp;rsquo;이기 때문이다. &amp;lsquo;부정적 전망을 가진 긴장감&amp;rsquo;은 등장했다가 곧바로 이익으로 교체되고 긴장이 해소된다(알다시피 현대판타지는 각 편이 &amp;lsquo;결기승전&amp;rsquo;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현대판타지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끊임없는 이득을 통해서 스케일이 에스컬레이트 된다. 이 전개 속도는 절대 멈출 수 없으며 현대판타지의 틀을 결정짓는다. 너무 빠른 스케일의 확장은 세계관의 벽에 부닥치고 파워 게임에 대한 독자의 역치를 상승시켜 재미를 감소시킨다. 그래서 가짜 불안에 의해서 얻게 되는 이익은 사실상의 가짜 이익이 된다. 결기승전의 구성에서 독자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익은 다음편의 초반부에서 기대보다 작은 이익으로 밝혀지고, 이 낙차를 통해서 독자에 대한 파워 레벨에 대한 역치를 회복시킨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초점</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B4%88%EC%A0%90/</link><pubDate>Sun, 15 Sep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B4%88%EC%A0%90/</guid><description>&lt;p&gt;아주 단순한 소설도 사실은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것 작가-화자-인물의 겹이다. 작가는 초점(시점이라고도 말하는)을 통해 독자의 시야를 제한하게 되는데, 이런 작업 과정에서 작가와 화자가 겹치거나(전지적작가시점), 화자와 인물이 겹치는 등(1인칭주인공시점)의 장치를 마련한다. 초점은 글에 따라 성격이 바뀌는 편이지만, 일반적으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1인칭 서술자(화자) 주인공과 독자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 독자가 신뢰하는 관계가 된다. 반면 1인칭 서술자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 인물이라면 주인공과 독자는 관찰자 인물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때문에 전자의 초점의 경우 1인칭 서술자인 주인공이 독자를 배반하는 반전 서사로, 후자의 초점의 경우 미스터리/호러 등에서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불신을 유예시킬 목적으로 사용 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인물과 사건을 불신하는 관찰자에 독자가 동의하므로). 아까는 작가가 직접 소설에서 등장하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는데, 초점 장치가 작가까지 드러나면 사실은 소설과 구술문학, 비소설간의 경계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근대를 넘으며 비교적 빈도가 줄긴 했지만 현대 작가들도 곧잘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설(특히 장르소설)에서 초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긴 하다. 장르에 따라 이미 정해진 초점들이 있고 이것에 장르를 구분하는 거대한 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초점을 가지고 놀고, 그것이 독자에게 인식되면, 실험적이라는 견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초점은 소설이라는 매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도구다. 타 매체는 흉내를 내기 벅찬 소설의 고유한 성질이기 때문. 어떤 작품은 초점을 인지하지 못하면 밋밋한 서사와 구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초점을 주목하면 소설을 몇 번이고 되짚어보게 만든다. (길리언 플린 &amp;ldquo;나는 언제나 옳다&amp;rdquo; 등.)&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잘 쓴 글과 잘 팔리는 글은 다르다</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E%98-%EC%93%B4-%EA%B8%80%EA%B3%BC-%EC%9E%98-%ED%8C%94%EB%A6%AC%EB%8A%94-%EA%B8%80%EC%9D%80-%EB%8B%A4%EB%A5%B4%EB%8B%A4/</link><pubDate>Wed, 28 Aug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E%98-%EC%93%B4-%EA%B8%80%EA%B3%BC-%EC%9E%98-%ED%8C%94%EB%A6%AC%EB%8A%94-%EA%B8%80%EC%9D%80-%EB%8B%A4%EB%A5%B4%EB%8B%A4/</guid><description>&lt;p&gt;잘 쓴 글 ≠ 잘 팔리는 글&lt;/p&gt;&#10;&lt;p&gt;잘 쓴 글: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어낼 수 있는 글.&lt;br&gt;&#10;잘 팔리는 글: 시장에서 많은 독자의 선택을 받아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글.&lt;/p&gt;&#10;&lt;p&gt;밥을 굶으며 쓰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사실 잘 쓴 글이라는 것부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amp;lsquo;비평적&amp;rsquo;이라는 조건을 붙였는데 비평해줄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잘 썼는지 아닌지 알 방법도 없다(자기 혼자 잘 썼다고 생각하고 말 생각이 아니라면). 잘 팔리는 거 무시하고 잘 쓰고만 싶다면 그걸 받아줄 수 있는 환경은 그리 많지 않다. 등단을 해서 문예지에 글을 내는 것이 가장 메이저하고 그 외부에는 거울이나 미스테리아나 한국SF협회 같은 소규모 장르 단체들 정도니까. 입구가 굉장히 좁다. 신문사 신춘문예 한 편 뽑는데 수 천편 몰리니까. 등단이 되었다고 쳐도 다음해까지 이력을 이어나가는 작가는 그 해 등단작가 중에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된다. 대부분의 작가는 등단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된다. 글을 잘 쓰는 것만으로는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담보하지 않는다. 장르라고해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어차피 지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비평을 받아 글을 잘 썼는가 어떤가(물론 비평이 단순히 글이 좋은가 안 좋은가를 따지는 &amp;lsquo;평가&amp;rsquo;는 아니지만, 비평가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글이 예술장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에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를 따지기도 전에 비평 받을 기회조차 아주 어렵다. 자신 있으면 도전하라 할 정도가 아니다. 결국 &amp;lsquo;글을 잘 쓰고 싶다&amp;rsquo;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욕심에 가깝다. 예술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더 잘하고자 하는 상승 욕구가 존재하니까.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거나 그만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한계를 자각하고도 더 잘 하려는 것은 응당 가져야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amp;lsquo;잘 팔리는 글&amp;rsquo;을 포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잘 쓴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잘 팔리는 글이 결과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문학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잘 쓴 글과 잘 팔리는 글은 서로 반목하는 요소가 아니다. 둘 중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표절의 두 가지 문제</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D%91%9C%EC%A0%88%EC%9D%98-%EB%91%90-%EA%B0%80%EC%A7%80-%EB%AC%B8%EC%A0%9C/</link><pubDate>Fri, 02 Aug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D%91%9C%EC%A0%88%EC%9D%98-%EB%91%90-%EA%B0%80%EC%A7%80-%EB%AC%B8%EC%A0%9C/</guid><description>&lt;p&gt;표절은 법적인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나뉘는데,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윤리적으로 A를 B로 치환해도 소설이 그대로 성립한다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여지가 있음에도 독자층은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는 D&amp;amp;D와 드래곤 라자(그리고 더로그)가 있다. 드래곤 라자에서 OPG 같은 이름이나 각종 주문들과 같은 D&amp;amp;D 요소들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고유명사들은 언제든지 치환될 수 있었으며, 오히려 작품의 정합성을 위해 더 적절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렇게 되었다. 이영도는 여전히 사랑받는 작가이다. (아, 물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상적인 지점은 법적으로 표절은 아니지만 작품 속 A를 B로 치환했을 때 소설이 크게 바뀌거나, 치환 자체가 불가능한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amp;lsquo;허락 받지 않은 직접 인용&amp;rsquo; 수준이 아닌 이상 법은 표절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문제는 어떤 표절로 지목된 작품이 향후 &amp;lsquo;법적인 문제가 없다면&amp;rsquo;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다. 창작 윤리의 관점에서 표절은 지양해야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서 시작된 특정 작품에 대한 보이콧은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이런 문제 자체를 모르는 독자도 많으니까). 결국 이 사태에 대한 해결 능력을 가져 도덕적 성찰이 요구 되는 것은 작품을 쓰는 작가 자신과 그런 작품을 추려내서 독자들에게 내보이는 대형 플랫폼이다. 하지만 대형 플랫폼은 창작 윤리보다 시장 논리에 따른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논란을 가졌던 시장이 이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표절과 클리셰는 어떻게 다른가</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D%91%9C%EC%A0%88%EA%B3%BC-%ED%81%B4%EB%A6%AC%EC%85%B0%EB%8A%94-%EC%96%B4%EB%96%BB%EA%B2%8C-%EB%8B%A4%EB%A5%B8%EA%B0%80/</link><pubDate>Thu, 18 Jul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D%91%9C%EC%A0%88%EA%B3%BC-%ED%81%B4%EB%A6%AC%EC%85%B0%EB%8A%94-%EC%96%B4%EB%96%BB%EA%B2%8C-%EB%8B%A4%EB%A5%B8%EA%B0%80/</guid><description>&lt;p&gt;나는 둘 이상의 작품에서 A라는 소재를 사용하면 &amp;lsquo;A는 클리셰&amp;rsquo;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하나의 작품에서 A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을 때, 이 A를 사용하는 경우 표절이라는 것이다. 이건 명백하게 모순적이다. 누군가는 표절을 해야만 클리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표절과 클리셰는 명백하게 다르다. 표절, 베낀다는 것은 명백한 함의가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는 선이 있다.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 합의된 인용이 아니라면 저작권 침해다. 고유명사를 옮기는 경우 그 속성도 그대로 옮겨진다면 그 역시 저작권 침해다. 미묘한 부분은 스토리다. 이것은 &amp;lsquo;베꼈다고 주장&amp;rsquo;할 수 있어도 &amp;lsquo;저작권을 침해&amp;rsquo;했는지 여부에 대해서 논쟁적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 경우 표절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것은 A라는 이야기가 부재했을 때 의심 되는 작품에 여전히 오리지날리티(또는 다른 클리셰 B와 C)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원작과 의혹 작품을 겹쳐지는 부분을 오려냈을 때도 의혹 작품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남은 것이 누더기,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표절 작품이 맞다. 만약 그 부분을 잘라냈음에도 여전히 그 작품이 홀로설 수 있다면, 사람들은 표절이 아니라 &amp;lsquo;영향을 받았다&amp;rsquo;고 말한다. 결국 표절이냐 클리셰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몇 개의 작품이 그 소재를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작품이 몇 개의 작품에서 발생한 것이냐의 문제다. 단 하나의 작품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표절이다. 둘 이상의, 무수한 작품들로 비롯되었다면 그것은 클리셰로 이루어졌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화려체를 쓸 때</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D%99%94%EB%A0%A4%EC%B2%B4%EB%A5%BC-%EC%93%B8-%EB%95%8C/</link><pubDate>Fri, 12 Jul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D%99%94%EB%A0%A4%EC%B2%B4%EB%A5%BC-%EC%93%B8-%EB%95%8C/</guid><description>&lt;p&gt;문장을 짧게 쓰라는 것은 그냥 짧으면 그만큼 범하는 오류가 줄어든다는 단순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비문/오문을 쓰지 않는다면 문장을 길게 쓴다고해서 뭐라고 할 이유가 없다. 많은 수사와 형용사가 들어가는 화려체는 이와는 별개의 문제다. 소설의 묘사는 그냥 문장이 이뻐서 넣는게 아니다. 글쓰기가 경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글쓴이들이 하는 이야기니 덧붙여 말할 것이 없다. 묘사를 통해 어떤 세부가 드러난다면 그 세부는 소설 속에서 둘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 기능은 그 자체로 미적인 가치다. 좋은 문장은 그 자체로 오락이니까. 묘사의 쓸모는 두 번째 기능에 달렸다. 이후 전개를 암시하거나 복선이 되거나 반전의 근거가 되거나 독자에게 심상을 부여해 작품의 분위기를 좌우하거나 평탄한 서술에 요철을 넣어 활력을 불어넣는 등의 쓸모를 말한다. 그냥 등장인물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었다 등 기분의 문제는 기능적이지 않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쓸 수 없는 것 쓰기</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3%B8-%EC%88%98-%EC%97%86%EB%8A%94-%EA%B2%83-%EC%93%B0%EA%B8%B0/</link><pubDate>Thu, 11 Jul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3%B8-%EC%88%98-%EC%97%86%EB%8A%94-%EA%B2%83-%EC%93%B0%EA%B8%B0/</guid><description>&lt;p&gt;난 글에서 묘사랑 비유 단 하나도 안 쓰다가 의식해서 쓰기로 해서 요즘은 쓰고 있다. 아마 시 배운 게 큰 거 같다. 시는 크게 봤을 때 운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미지와 비유니까. 당연히 문창과 가기 전까지는 제대로 시를 읽은 적은 없었고. 덕분에 더 잘쓰냐하면 잘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닌가? 재미있는 일은 특별한 요인이 없어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언제나 글쓰기의 바리에이션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느리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것만 쓰는 것 보다 언젠가는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쓸 수 있는 것만 써서 주목을 받았다가 유행이 지나자 다음작품에서 잊혀지는 경우는 너무 흔하게 봤다. 하지 않았던 것을 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동력이다. 당연히 하던 걸 할 때보다 안 하던 것을 하면 못하겠지.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그놈의 &amp;lsquo;노력&amp;rsquo;을 해서 그 하나라도 잘할 수 있게 되냐는 것이다. 못하게 되던 것을 어떻게든 하게 되는 것은 난이도가 낮다. 낮은 준위의 숙련도 쌓기는 쉽다. 반면에 달인이 되는 건 어렵다. 되고 싶다고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포기하란 말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생각하자는 거다. 하면 된다는 말은 낙관주의에 근거한다. 그것도 좋지만 글을 쓰는 이들이 글의 완성에 대해서 늘 포기하는 것처럼(어느 작가 말처럼 책을 내놓는 일이 그저 내려놓는 일인 것처럼), 그쯤하면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다음 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괴담과 공포소설</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4%B4%EB%8B%B4%EA%B3%BC-%EA%B3%B5%ED%8F%AC%EC%86%8C%EC%84%A4/</link><pubDate>Sat, 25 May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4%B4%EB%8B%B4%EA%B3%BC-%EA%B3%B5%ED%8F%AC%EC%86%8C%EC%84%A4/</guid><description>&lt;p&gt;나는 괴담과 공포소설이 장르부터 다르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괴담 소비자들은 장르 호러소설 소비자들가 완연하게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구분법은 괴담은 창작자가 불분명하고, 어딘가에선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작품 밖의 화자(이자는 창작자가 아니라 전해들은 사람이다)가 주장하며, 여러장치를 통해 청자도 자신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호러소설은 창작자가 분명하며, 소설이라는 장르로 명시되어 있으며, 독자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물론 &amp;lsquo;괴담적(?) 소설/영화&amp;rsquo;도 존재하고 있지만(이를테면 모큐멘터리 장르)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각종 사이트의 괴담 게시판과 유튜브에서 저작권을 찾을 수 없는 괴담과는 구분이 된다고 본다. 물론 공포소설이 알고보면 괴담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고, 반대로 괴담이었던 것이 실제 컨텐츠로 나오는 경우는 흔하다보니 작품 속 내용을 통해 전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기 보다는 이야기가 발화되는 방법의 차이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괴담은 단순히 허풍쟁이의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귀신이나 장산범, 슬랜더맨, 꿈 속의 사내 따위가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자유로를 지나갈 때 귀신을 볼지도 모르는 공포가 실존하는 이상, 괴담은 소설, 영화와도 다르다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는 괴담은 민담이나 전설의 후신이라고 봐야할 것인데, 근대화가 시작되고 여러 판타지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되었지만 그 존재 자체가 두렵기 때문에 오로지 공포만은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다시쓰기란</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B%8B%A4%EC%8B%9C%EC%93%B0%EA%B8%B0%EB%9E%80/</link><pubDate>Sat, 25 May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B%8B%A4%EC%8B%9C%EC%93%B0%EA%B8%B0%EB%9E%80/</guid><description>&lt;p&gt;&amp;lsquo;리라이팅&amp;rsquo;은 사실 어디에서나 쓰이는 간결한 해결 방법이다. 컴퓨터가 다운되면 껐다키면 되고, 총도 기능 장애가 있으면 분해조립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한숨 자고 나면 전보다 좋아지는 것처럼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이다. 소설이라고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하면 된다. 리라이팅 기술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런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의지가 중요하다. 일반 작법에서 리라이팅 기술이 일반화 된 반면 아마추어 작법에선 한시, 시조에서 옮겨온 &amp;lsquo;퇴고&amp;rsquo; 기술을 얄팍하게 적용하거나 &amp;lsquo;열줄 정도만 돌아가서…&amp;rsquo; 같은 요행을 바라는 모습을 흔히 본다. 퇴고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소설은 퇴고가 중요하지 않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유명한 김훈의 &amp;ldquo;칼의 노래&amp;quot;에서 했다는 조사 &amp;lsquo;이&amp;rsquo;와 &amp;lsquo;은&amp;rsquo;을 고민했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퍼져있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문장가의 고민이지 소설가의 고민이 아닌 것 같아서다. 소설은 유기적이다. 각 소설의 부분을 이루는 A와 B, B와 C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만 빼버려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부분을 고치면 유기성에 손상이 온다. 손상이 오지 않거나 적은 부분이라면?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lt;br&gt;&#10;여기서 다시 쓴다는 말은 &amp;lsquo;처음부터 다시&amp;rsquo;라는 뜻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볼 때 완전히 다시라기 보다는 글을 완전히 해체해서 고난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또는 속 알맹이를 어떻게 더 좋은 글로 만들어 내는가의 이야기이긴 하다. 글로 쓰여지지 않아도 글이 될 수 있는 무언가는 여전히 남아있다.&lt;br&gt;&#10;트윗 띄엄띄엄 쓰다 보니 초고에서의 돌파구 뚫기를 위한 방법으로써의 다시쓰기와 초고 완성 후 다시쓰기가 혼재된 것 같긴 한데, 근본적으로 방법은 같다고 보기 때문에. 물론 우리네 선배 작가들은 초고에서 막히는 일 따위 없도록 하라고 말씀들 하셨지만, 모든 글쓴이가 그들 같지는 않은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글쓰기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3%B0%EA%B8%B0%EB%A5%BC-%EC%9C%84%ED%95%9C-%ED%99%98%EA%B2%BD%EC%9D%84-%EB%A7%8C%EB%93%A4%EC%96%B4%EC%95%BC-%ED%95%98%EB%8A%94-%EC%9D%B4%EC%9C%A0/</link><pubDate>Thu, 09 May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3%B0%EA%B8%B0%EB%A5%BC-%EC%9C%84%ED%95%9C-%ED%99%98%EA%B2%BD%EC%9D%84-%EB%A7%8C%EB%93%A4%EC%96%B4%EC%95%BC-%ED%95%98%EB%8A%94-%EC%9D%B4%EC%9C%A0/</guid><description>&lt;p&gt;&amp;lsquo;낮에 하는 게 더 좋다고? 하지만 밤까지 작업하는 건 그때까지 못 끝내서 아닌가?&amp;rsquo;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amp;lsquo;진짜 집필 시간&amp;rsquo;이란 건 그리 많지 않다. 엄격하게 따져서 키보드 위에 손가락 올려두고 움직이는 시간만 체크한다면. 결국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간중간 휴지기가 얼마나 길고 그 시간 뭘 하느냐의 문제인데 경험도 그렇고 실제로 다른 작가들도 그렇고 &amp;lsquo;좋은 컨디션&amp;rsquo;일 때 그 휴지기란 것이 거의 없을 때도 있다. 그럼 &amp;lsquo;좋은 컨디션&amp;rsquo;은 어떻게 유지하는가? 밥 잘 먹고 운동하고 저녁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amp;lsquo;좋은 컨디션&amp;rsquo;이 모든 문제의 해결법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집필 문제의 해결법인 것은 확실하다. 대문호들은 거의 대부분 규칙적으로 일하고 글을 썼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잤고 말년에 술이나 약으로 망치기도 하고 일필휘지로 명작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좋은 컨디션으로 글을 썼다. 다른 문제는 &amp;lsquo;작업 환경&amp;rsquo; 문제. 집필은 두 가지 물리적 제약을 받는다. 하나는 글을 쓸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쓸 시간이다. 글을 쓰겠다는 의지만으로는 극복되지 않으므로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갖추어 나가야만 한다. 극복하기 전까진 &amp;lsquo;시간/공간이 부족해서 글을 못 써&amp;rsquo;하고 온갖 핑계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 핑계는 강력하기 때문에 선배 작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글을 써왔으며 그럼에도 명작이 되었다는 사실 조차도 &amp;lsquo;그건 그 사람이 잘 나서 그런 거고 난 아닌데&amp;rsquo;가 되어버린다. 유감스럽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시공간을 가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앞서 좋은 컨디션과 작업 환경을 갖는 것은 최소 조건으로 생각된다. 가지지 못하고 잘 해내간다면 정말 박수 받아 마땅한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봐선 누가 나서서 작가의 건강을 관리해주거나 노동 환경을 개선해주진 않기 때문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소설 감상을 받아들이기</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A%B0%90%EC%83%81%EC%9D%84-%EB%B0%9B%EC%95%84%EB%93%A4%EC%9D%B4%EA%B8%B0/</link><pubDate>Wed, 01 May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A%B0%90%EC%83%81%EC%9D%84-%EB%B0%9B%EC%95%84%EB%93%A4%EC%9D%B4%EA%B8%B0/</guid><description>&lt;p&gt;난 작가가 자신의 글에 대한 감상을 인용(認容)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전제가 있다. 글에 대한 감상이 작가 자신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하며 감상을 받아들였다고해서 반드시 글에 반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일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작가와 작가의 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작가는 물론 독자도 해당되는 일이고 합평회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공격이 작가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윤리적인 논의가 아니라면 사실상 없다.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은 언제나 작법이나 재미, 취향에 대한 것이다. 또한 독자의 감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감상이 글과 작가의 글쓰기에 영향을 끼쳐야할 이유는 없다. &amp;lsquo;감상의 수용&amp;rsquo;과 &amp;lsquo;감상의 반영&amp;rsquo;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글에 대한 여러 관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고해서 그 모든 관점을 글에 담아내는 것은 하고 싶다고해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작가의 줏대다. 가끔은 누군가의 발언이 옳고,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쓰는 글과 글쓰기의 방향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미련없이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의 주인이다. 다른 누군가가 올라타려고 들면 과감하게 밀쳐낼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의 감상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작가의 정체성은 작가의 경험이 총합이며, 작가의 글에 대한 감상이 그 글과 글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흔들기 때문이다. 좋은 감상은 무엇이고 나쁜 감상은 무엇인지 선별하기 위해선 우선은 많은 감상을 모을 필요가 있다. 작가는 감상을 감상한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현실 단계</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D%98%84%EC%8B%A4-%EB%8B%A8%EA%B3%84/</link><pubDate>Sat, 06 Apr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D%98%84%EC%8B%A4-%EB%8B%A8%EA%B3%84/</guid><description>&lt;p&gt;가끔 이야기했던 것인데, 나는 작품 속에는 작가가 내재하고 있는 &amp;lsquo;현실 단계&amp;rsquo;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연성과 현실성을 묶어서 이야기하려는 시도다. 현실 단계가 높은 소설은 이른바 고증과 사실 세계와의 차이가 없고, 낮은 소설은 사실 세계와의 괴리가 커진다.&lt;br&gt;&#10;1단계에는 사실성이 극히 낮은 작품들이 위치한다. 이 위치에 존재하는 것은 우화와 간결한 동화와 그림책, 극히 단순한 그래픽의 플랫포머, 극히 제한적인 상황을 재고하는 사고실험이 있다. 이 단계에 존재하는 세계의 특징은 여백으로 가득 차 있기에 뭔가 더 놓으려고 하면 이미 놓인 것들과 모순이 일어나 세계 자체가 무너져버린다는 점이다. 이곳은 가정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세계다.&lt;br&gt;&#10;2단계에는 고학년 대상의 동화나, 스타워즈와 같은 고증에 별 관심이 없는 SF 영화, 퓨전 사극, 서프라이즈의 재현 장면, 많은 부분에서 고증이 맞지 않다고 지적 당하는 판타지/무협 소설들이 이곳에 있다. 이 단계의 특징은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 이 세계는 사실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세계다.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뜯어볼 것도 없이 &amp;lsquo;엉터리&amp;rsquo;라고 생각하지만,&lt;br&gt;&#10;3단계는 2단계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군이 위치하는 곳이다. 3단계 작품들은 2단계와 실상 비슷하지만, 여백을 더 교묘하게 사용하여 지적을 받을 허점을 내어주지 않는다. 이곳에는 2단계에서 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도 위치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amp;lsquo;리얼리즘 소설&amp;rsquo;들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곳에 위치한 소설들은 2단계처럼 좀처럼 잘못된 부분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다고해서 4단계처럼 진짜 사실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확신을할 만큼 선명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그 교묘함 덕분에 3단계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인식에서 &amp;lsquo;사실 세계와 다름 없다&amp;rsquo;고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김훈의 &amp;lsquo;언니의 폐경&amp;rsquo;과 관련된 논란이 그렇다. 이 세계는 발견되는 것이 늦거나 무시될 뿐, 고증 실수가 존재하는 곳이다.&lt;br&gt;&#10;4단계에 위치하는 것은 작품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사실 세계라도 무방한 곳이다. 이곳에는 과학자들의 하드SF, 역사학자의 역사소설, 자전적 소설, 르포, 다큐멘터리들이 있다. 흠결을 극히 찾아보기 힘들며, 때로는 대안되는 현실로까지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완벽한 작품들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3단계 안에 부분적인 4단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이한 사항은 아니다. 작품들을 문장으로, 컷으로 나누어 본다면 2단계와 3단계를 넘나들 것이다.&lt;br&gt;&#10;5단계는 당연히 지금 여기의, 가공되지 않은 현실 세계다. 이곳은 여백이 극히 드물지만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 같은 관측 불가능한 것들과 신, 마음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들로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5단계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은 그 아래 단계에서 채워넣으면 그것은 &amp;lsquo;현실적&amp;rsquo;이지 않지만 &amp;lsquo;개연적&amp;rsquo;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예를들어 귀신이 나오는 호러 작품(또는 괴담)의 경우, 그것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2단계가 될 수도, 3단계가 될 수도,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까지 갈수도 있다.&lt;br&gt;&#10;이 같은 현실 단계는 현실 세계와 작품 세계가 얼마나 일치하도록 만드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창작자가 &amp;lsquo;얼마나 교묘하게 사실이 아님을 숨길 수 있는지&amp;rsquo; 또는 &amp;lsquo;고증과 무관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지&amp;rsquo;에 대한 더 고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글쓰기의 예사로움</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3%B0%EA%B8%B0%EC%9D%98-%EC%98%88%EC%82%AC%EB%A1%9C%EC%9B%80/</link><pubDate>Tue, 26 Mar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A%B8%80%EC%93%B0%EA%B8%B0%EC%9D%98-%EC%98%88%EC%82%AC%EB%A1%9C%EC%9B%80/</guid><description>&lt;p&gt;하나의 일은 여러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amp;lsquo;걷기&amp;rsquo;가 단순한 동작처럼 보여도 몸의 관절과 근육들이 움직이고 다음 발을 디딜 때까지의 균형잡기가 이루어지는 복잡한 행위인 것처럼, 글쓰기도 그렇다. 그리고 걷기의 요소 중 하나만 불완전해도 완전한 걷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글쓰기도 그렇다. 글쓰기의 어떤 부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도 싫고 지루하고 어렵다. 머릿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문장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나, 마땅한 아이디어 없이 글을 전개해 나가다 결국 그 끝에 봉착했을 때가 그렇다. 글쓰기의 어떤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누군가 글을 읽고 감상을 남기거나, 그 글이 수익으로 돌아올 때 그렇다. 그리고 어떤 부분들은 사람에 따라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나는 백지 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에 제목 짓기는 괴롭다. 나는 글에 딱 들어맞는 제목을 고르지 못하면 그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글쓰기를 이루는 각 요소에 대한 성취 방법이 다른 것처럼, 그 요소들에 대한 개인의 호오도 다르다. 대체로 글쓰기에서 괴로움을 덜 느끼는 이들이 글쓰기를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 하지만 모든 글쓴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괴로워하면서도 쓴다. 그 괴로움 끝에 결과적으로 큰 즐거움을 받을 거라는 희망으로 쓰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런 기대도 없거나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글쓰기가 특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가 다른 모든 일들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일들에 대해서 완벽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간단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인스턴트 대답을 준비해두고 있지만, 계속해서 캐묻는다면 시와 때가 맞아서, 환경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서, &amp;lsquo;그냥&amp;rsquo; 그렇게 되었노라 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글쓰기는 생각을 문자로 옮기는 작업이며, 그 과정에서 작가 개인의 고민이 여과 없이 드러나보일 수 있고, 그렇기에 &amp;lsquo;왜 쓰는가&amp;rsquo;에 대한 질문과 대답들이 만연한 것처럼 보여진다. 글쓰기는 범상한 일이다. 다른 모든 일들처럼, 그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 답을 내어줄 수도 있지만, 그냥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나름의 답을 찾은 이들은 떠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남아 궁리할 따름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소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라</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C%9D%84-%EB%8B%A4%EB%A5%B8-%EC%82%AC%EB%9E%8C%EC%97%90%EA%B2%8C-%EB%B3%B4%EC%97%AC%EC%A4%98%EB%9D%BC/</link><pubDate>Sat, 23 Feb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86%8C%EC%84%A4%EC%9D%84-%EB%8B%A4%EB%A5%B8-%EC%82%AC%EB%9E%8C%EC%97%90%EA%B2%8C-%EB%B3%B4%EC%97%AC%EC%A4%98%EB%9D%BC/</guid><description>&lt;p&gt;하던 이야기 좀더 하자면, 나는 자기 글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꺼리는 것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설 &amp;lsquo;초고 감상&amp;rsquo;이 필요하면 거의 애걸복걸을 하면서 읽어달라고 하는 편인데, 내 소설에 대한 감상 데이터가 쌓이지 않으면 내 소설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내 분석 또한 어그러진다. 내 소설이 내게 재미있느냐 없느냐 같은 건 더 좋은 글을 쓰는데 있어서 하등 쓸모도 없다. 쓰는데 즐겁기는 하겠지. 하지만 쓰는 게 즐겁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내가 가지는 내 소설에 대한 감상도 주관적이니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의 감상은 객관적인가? 아니. 역시나 주관적이지만 주관적인 시선이 여럿 겹치면 내 감상 보다야 객관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쳐야할 지표와 감상자의 감상이 어느 정도 일치하면 이제 그 글의 완성된 본이 더 또렷해지는 것이다. 결코 그 본에 도달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본을 또렷하게 떠올려가는 과정은 필요하고, 그것이 감상자에게 감상을 받아야 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감상자(정확히는 소설 초고 감상자/작법서에서 흔히 말하는 &amp;lsquo;첫 번째 독자&amp;rsquo;를 말한다)는 독자와는 다른 사람이다. 감상자는 작가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글을 보는 사람이고, 독자는 작가가 완성된 글을 내놓았다고 판단하고 글을 읽는 사람이다.&lt;br&gt;&#10;이하는 내가 생각하는 소설 감상 얻는 방법: 글을 보낼 때 읽어주면 고맙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정도의 미덕은 보여야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줘라. 열 명 정도한테는 보여줘야지 감상을 둘 셋은 건질 수 있다. 봐줄만한 사람한테 다 보내라. 봐줄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글은 혼자 쓰지만 글쓰기의 장 안에는 다 함께 써야한다. 없으면 만들어라. 그리고 읽을 거라면 지금 당장 읽으라고 말하라. 어차피 나중에 가봤자 안 읽는다. 그리고 글을 전혀 안 읽는 사람에게 보내지 마라. 어지간한 애정이 있어도 안 읽는다. 감상자는 되도록 같이 글을 쓰거나, 아니면 평소 독서량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많은 감상자를 확보하는 것은 좋지만 여러 바구니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같은 장에 몸을 담고 있으면 감상 또한 유사할 확률이 높다. 마지막으로 &amp;ldquo;유일한 객관적 감상자 코스프레&amp;quot;를 주의하라.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 사람은 자신이 이 글을 읽는 유일한 객관적 감상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말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amp;lsquo;객관적 감상자&amp;rsquo;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적인 체 하는 주관적 감상자는 글쓴이에게 해롭다. (나? 나도 기억해보자면 그런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 마다 항상 반성한다.) 유일한 객관적 감상자 코스프레는 자신만이 이 글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작가에게 단순한 감상을 넘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쓰라 글쓴이를 조종하려고 들기도 한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땅한 근거 없이 주장한다면 의심해야한다. 사실 많은 글쓰기 선생들, 또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이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좋은 선생들은 절대로 A만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amp;lsquo;내가 보기엔…&amp;rsquo; 하고 운을 떼면서 자신의 주관성을 끊임없이 재확인 시키고 주저하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계속 하며, 자신의 감상은 참고만 하라고 일러둔다. 만약 글쓰기의 정답을 안다며 이것은 틀렸고 저것은 이렇게 해야하며 이러하게 고쳐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글쓰기 선생이 아닐 확률이 높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쓰고 싶은가 쓸 수 있는가 써야하는가</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3%B0%EA%B3%A0-%EC%8B%B6%EC%9D%80%EA%B0%80-%EC%93%B8-%EC%88%98-%EC%9E%88%EB%8A%94%EA%B0%80-%EC%8D%A8%EC%95%BC%ED%95%98%EB%8A%94%EA%B0%80/</link><pubDate>Sat, 09 Feb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3%B0%EA%B3%A0-%EC%8B%B6%EC%9D%80%EA%B0%80-%EC%93%B8-%EC%88%98-%EC%9E%88%EB%8A%94%EA%B0%80-%EC%8D%A8%EC%95%BC%ED%95%98%EB%8A%94%EA%B0%80/</guid><description>&lt;p&gt;쓰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언제나 &amp;lsquo;무엇을 쓰고 싶은가&amp;rsquo; / &amp;lsquo;무엇을 쓸 수 있는가&amp;rsquo; / &amp;lsquo;무엇을 써야 하는가&amp;rsquo; 에 대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삶과 같이 큰 주제는 모르겠지만 글쓰기에서는 유효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쓰고 싶은 것, 쓸 수 있는 것, 써야하는 것을 구분은 해야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글쓰기는 삶과는 다르게 &amp;lsquo;내가 좋아하는 글&amp;rsquo;과도 거리를 둬야한다. 독자인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글이라고해서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과 쓸 수 있는 글이 일치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뛰어난 재능이다. 보통은 아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도전했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글쓰기를 포기한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글만 쓰는 사람만이 소설을 쓰는 건 아니다. 글쓰기를 해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 수 없다고 생각한 글, 한 번도 본적도 없는 글, 어쩌면 싫어하는 글을 쓰기도 한다. 좋아하는 글과 쓰고 싶은 글과 쓸 수 있는 글과 써야하는 글들은 언제나 다르다. 좋아하는 글은 언제나 글쓰기의 예외에 위치한다. 독자인 나와 작가인 나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쓸 수 있는 글 위에 내가 있다. 써야하는 글이 내 앞에 있는 길이다. 쓰고 싶은 글은 내 지침이 된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웹소설이라는 미증유</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C%9D%B4%EB%9D%BC%EB%8A%94-%EB%AF%B8%EC%A6%9D%EC%9C%A0/</link><pubDate>Sat, 02 Feb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9B%B9%EC%86%8C%EC%84%A4%EC%9D%B4%EB%9D%BC%EB%8A%94-%EB%AF%B8%EC%A6%9D%EC%9C%A0/</guid><description>&lt;p&gt;비연재소설들과 달리 연재소설(또는 비교 될 수 있는 드라마 등의 연재작품들)은 항시 독자의 반응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오랜 미덕으로 알려진 작가 자신의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amp;lsquo;소통&amp;rsquo;에 말미암아 작가가 이미 알아차린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것인가? 후자의 경우 그것을 온전한 작가의 글로 볼 수 있을까? 소설에는 &amp;lsquo;작가주의&amp;rsquo;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상업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지, 하나의 소설은 응당 그 작가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상업적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의 상업적 작가주의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연재소설의 상업적 성과를 원한다면 틀림없이 작가는 독자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정말 그럴까? 많은 연재 소설 작품들은 독자의 요구에 말미암아 암초에 부닥친다. 작가 스스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글에 있어 좋은 선택인가? 독자의 요구는 &amp;lsquo;거의 항상&amp;rsquo; 정확하지 않다. 독자는 독자의 숫자 만큼의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지고 있다. 댓글과 쪽지는 물론, 선작수, 별점 등의 성적 지표는 작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찾아 읽는 독자를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독자의 기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 연재 중인 소설을 통해 투사 되는 작품의 결말 대다수는 작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자들은 결말의 완벽하지 않음에 불만을 느낀다. 소통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 독자의 의견이 결말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희망 그 자체가 이러한 불만족을 심화시킨다. 그렇다고해서 작가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웹소설 시대의 글쓰기는 수 많은 고전을 써온 대문호들이 해왔던 시대와는 완연하게 다른 시대의 글쓰기다. 신문 연재를 하고 독자의 손편지를 받는 것과 유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양이 다르면 질이 다른 법이다. 인기 연재 작품이 아니더라도 글을 쓰면 늦어도 5분이면 첫 댓글이 달린다. 원한다면 웹 상에 존재하는 작가에게 직접 말을 걸 수도 있다. 같은 작품을 읽는 이들과 모여서 그룹을 이루고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가 볼 수도 있다. 앞선 시대의 선배 작가들이 도달해보지 못했던 지점에 선 작가들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 의견을 피력하더라도 사람들은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기까지 당분간 작가는 골몰하여 답을 내는 수 밖에 없고, 이 고민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최고의 문장은 없다</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B5%9C%EA%B3%A0%EC%9D%98-%EB%AC%B8%EC%9E%A5%EC%9D%80-%EC%97%86%EB%8B%A4/</link><pubDate>Tue, 22 Jan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B5%9C%EA%B3%A0%EC%9D%98-%EB%AC%B8%EC%9E%A5%EC%9D%80-%EC%97%86%EB%8B%A4/</guid><description>&lt;p&gt;학교에서 배운 문장론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내용은 &amp;lsquo;최고의 한 문장&amp;rsquo;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 속 모든 문장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이다. 문장은 소설 안에서 서로 작용하면서 의미를 쌓아올리고 외연을 확장하며, 어떨 때는 일반의 언어가 다다르지 못하는 가장 세밀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것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좋은 소설 단 한 줄로 결코 요약될 수 없으며, 작가는 좋은 소설을 좋다고 느끼게 만드는 바로 &amp;lsquo;그 좋은 부분&amp;rsquo;에 도달하기 위해서 단어와 문장과 이야기들을 엮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문장론 이상의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소설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문장만이 아닌 것처럼, 소설에서 유기적인 부분도 문장만이 아니며, 인물과 배경, 묘사, 구성 등 소설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처럼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은 보기만해도 죽어있으며, 어떤 소설은 그 자체로 완벽한(것 처럼 보이는) 작품으로 살아 숨쉬기도 한다. (물론 모든 소설은 독자의 독해와 비평의 맥락 안에 존재하고 그 소설이 어떻게 읽어야하는가는 논외로 두어야할 것이다.)&lt;/p&gt;</description></item><item><title>주제 상향식 글쓰기와 주제 하향식 글쓰기</title><link>https://wirae.me/%EC%9E%91%EB%B2%95/%EC%A3%BC%EC%A0%9C-%EC%83%81%ED%96%A5%EC%8B%9D-%EA%B8%80%EC%93%B0%EA%B8%B0%EC%99%80-%EC%A3%BC%EC%A0%9C-%ED%95%98%ED%96%A5%EC%8B%9D-%EA%B8%80%EC%93%B0%EA%B8%B0/</link><pubDate>Sun, 13 Jan 2019 00:00:00 +0000</pubDate><guid>https://wirae.me/%EC%9E%91%EB%B2%95/%EC%A3%BC%EC%A0%9C-%EC%83%81%ED%96%A5%EC%8B%9D-%EA%B8%80%EC%93%B0%EA%B8%B0%EC%99%80-%EC%A3%BC%EC%A0%9C-%ED%95%98%ED%96%A5%EC%8B%9D-%EA%B8%80%EC%93%B0%EA%B8%B0/</guid><description>&lt;p&gt;작품에 작가의 생각이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가는 이유는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언젠가는 그것을 포장하고 끝내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왜 시작했는지에 대해 밝히면서 끝난다. 가장 역설적인 엔딩인 수미쌍관 플롯도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가 된다. 작가가 &amp;lsquo;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amp;rsquo;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많은 이야기들은 이야기가 시작 될 때 작가의 마음 속에 아무런 주제도 없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반짝이는 발상과 착상으로 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전개를 이어가며 작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며 끝내 어떤 결말에 다다르며 작가에게 답을 이끌어내도록 만든다. 창작가에 대한 수 많은 오해 중 하나인 &amp;lsquo;이 작품에는 작가의 메세지가 무엇일까?&amp;lsquo;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떤 작가들은 소설을 끝을 내고도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모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도래한 이후 독자들은 작품을 통해 작가가 가진 의도와 배경 이상의 것을 읽어내고 있으며, 여기에서 작가가 작품에서 의도한 무언가는 사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런 종류의 착각을 작가들이 가진 경우도 흔히 보인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된 이상,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 또한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작품의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욕구는 그냥 그 작품을 쓰기 위한 일종의 핑계에 불과할 수 있으며, 작가의 교조적 태도가 작품에서 드러날 때 좋은 평가를 내기 힘들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유가 작품이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시작된 이야기는 끝난다. 끝나는 이야기는 주제를 가진다. 주제가 없는 이야기는 없다.&lt;/p&gt;</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