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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라는 감각

장르를 감지하는 건 일종의 다른 감각기관을 가지는 거라고 생각. 이산화 작가가 쓴 정지돈의 <브레이브 뉴 휴먼> 감상을 보듯 SF적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SF의 좋은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까지의 SF에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를 잘 못함. 이건 개인의 취향이 아님. 비평문에서 비평가가 호오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같음. 그냥 ‘실제로 그렇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고, SF비평이라는 건 어떻게 느꼈는지, 그리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과정이 뒤따름. 즉 무언가를 SF로 읽는다는 건 의식적 구분이 아니라 감각적 체험임. 리얼리즘과 똑같이.

단지 SF적 감각, 더불어 다른 장르와 장르를 구분하는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군의 장르소설들을 장르적 일체감으로 묶지 못하고 공통되는 규칙과 관습, 형상을 놓치고 있고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없는 것.

이를테면 한국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한국소설의 현시대 소설은 그 이전 세대 소설의 장르성을 경유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도달하는 지점이 있고 그 부분이 바로 비평적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지님. SF 또한 마찬가지임.

따라서 하나의 소설이 좋은 ‘리얼리즘 또는 한국’ 소설이면서 좋은 SF가 아닐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좋은 ‘리얼리즘 또는 한국’ 소설이면서 좋은 SF일 수도 있는 것임.

한국에서 ‘문학성’이 오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짚을 수 있음. 한국에서 문학성이란 기존 한국/제도권/리얼리즘/모더니즘 소설이라는 각각의 분화된 장르성이 결합된 성질을 이야기함에도 소설이 가진 어떤 좋음을 대변하는데 가치를 두고 있음.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소설의 역사성과 유리되거나, 제도권에 소속되지 않거나, 리얼리즘 또는 모더니즘 소설이 아닌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의 가치들이 평가 절하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읽지 않는 것은 제대로 된 소설 읽기가 아니라고 빈번히 주장됨. 여기에는 계급성이 있음. SF 또는 웹소설 같은 장르소설이 소수의, 마니아의, 배우지 못한 사람의, 고전과 같이 깊이 있는 독서를 하지 못한 사람의 소설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소설과 장르성은 소설은 물론 여러 이야기 매체를 포괄하는 양식이며 독자 및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경험, 가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컨텐츠로 존재하고 있음.

결과적으로 SF를 비롯한 장르비평도 이 ‘인식되지 않는’ 장르 독자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이들이 무슨 이유로 읽는 것인지, 그렇게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로 향하게 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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